내 생애의 아이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가브리엘 루아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방인을 대하는 한 가지 태도, "모르는 만큼 보인다."
<내 생애의 아이들>을 읽고

 

  90년대 중반에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란 책과 함께 유행되었던 유홍준의 명언이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말도 다시 검증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베트남 여행 때가 그러했고,  <내 생애의 아이들>을 읽고 난 한동안이 그러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란 말은 대상에 대한 인식의 주체성과 개성을 강조했다는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다시 이 말도 달리 해석해보면, '아는 만큼 보이기'는 할 터이나, '아는 만큼만 보이기' 때문에 그 알고 있는 이의 사고의 틀을 벗어난 진정한 앎에는 도달하기는 어렵다는 논리에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대상 그 자체가 본래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라기 보다는 보는 이의 기준과 틀에 따라 대상을 왜곡해서 해석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때 그 '아는 만큼'은 언제 '편견만큼'이란 뜻으로 둔갑해버릴지 모를 일이다. 베트남 하노이 공항 주변 논에서부터 우리와 전혀 다르게 풍기던 그 곳 특유의 땅 냄새를, 그 이질적인 문화를 도대체 우리의 그 무엇과 관련지어, 혹은 우리가 가진 무엇이 바탕이 되어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가진 기준과 배경지식을 겸허히 접고, 우리의 것과 전혀 다른 별개의 기준, 대상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본성을 가지고 바라보고 해석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적어도 다른 나라 문화, 다른 나라 사람, 그리고 낯선 이방인을 바라볼 때는.

  소설 속 첫 이야기에서 '나'는 각기 다른 서른 아홉의 이민자의 자녀들과의 만남에 많이 난감해 한다. 처음부터 활달하고 밝은 성격의 아이가 있는가하면, 학교에 오자마자 빽 울어버리는 아이, 같이 온 부모만큼이나 무표정한 아이, 게다가 아버지와 자기를 떼어놓는 '나'에게 화가 나 '나'의 정강이까지 후려쳐 버리는 당돌한 '빈센토' 같은 아이도 있다. 그러나 이들을 바라보는 '나'의 관심은 어느 한 아이에 편중되어 있지 않다. 또한 일률적인 시각으로 아이들을 재단하지도 않는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나'에게 선물을 하려 애쓰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도 공평무사하다. 초콜릿 1파운드 상자를 선물한 '프티-루이'에서부터, 어머니가 남은 실로 손수 싼 덧신을 선물한 '조니', 어머니와 단둘 살림으로 가난고를 겪는 터라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클레르'에 이르기까지. '나'에게는 모두 하나같이 가난하지만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나'와 너무나 다른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고의 한 정점은 '막내 드미트리오프'를 통한 아버지 드미트리오프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에서 확연하다. '안나'나 다른 교사들의 드리트리오프네 아이들에 대한 비하와 편견은 그 아이들이 풍기는 특유의 가죽냄새만큼 지독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편견에 부화뇌동하지 않으면서 마침내 막내 '드리트리오프'에게서 글씨 쓰기 재주를 찾아낸다. 마치 '드리트리오프'를 맡기 전, 그 아이를 만나러 손수 '작은 러시아'로 주섬주섬 가보았던 것처럼. 그리고 글씨 쓰기 재주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아버지에게 보여줌으로 해서 드리트리오프에 대한 편견을 씻어버리게 만들고, 마침내 그와 그 아버지 사이에도 교감을 이룰 수 있게도 한다. 소설 속 대부분 교사들은 이 드리트리오프네 일가를 괴물 취급한다. 그것은 그들을 자신들과 전혀 다른 이방인으로 본다는 것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자기 자신도 드리트리오프네 일가에 대해서 낯선 이방인 일 수 있음을 놓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편견 없는 그런 사고가 없었다면 어떻게 또, 우크라이나 노래나 부르는 가난한 또 하나의 이방인인 '닐'에게서 샘물 같은 안식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러한 '닐'은 어떻게 보면 '나'의 자아의 극대화된 모습으로 보인다. 늙은 이, 정신병자, 혹은 육체나 정신의 고통을 겪는 누구에게나 다름없는 노래로 안식을 주며 그들과 교감을 이루는 '닐'은 바로 이방인을 대하는 편견 없는 '나'의 모습 그 자체이다 . 
  이방인이란 말의 표면적인 뜻 그대로 일반 사람들과 동 떨어져 외진 곳에 사는 '앙드레'에 대한 '나'의 태도는 또 어떤가. 폭설 뒤의 '앙드레'의 귀가를 걱정하는 마음에서도 드러나지만,  며칠째 결석인 '앙드레'를 만나고자 스키를 타고서 그의 집을 어렵게 찾아가 본다거나, 그 곳에서 '앙드레'의 학업을 돕는 '나'의 모습에서도 여실히 '나'의 본성이 드러난다, 마치 '가난'이라는 경계로 일반 사람들과 차별되고 외따로 멀리 떨어져 사는 이방인은 일반인보다 몇 배의 노력을 더 기울여 대하여야 교감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앙드레'를 찾아가 보는 외진 물리적인 길은 '이방인'의 마음을 찾아가는 심리적인 길인 듯하게 느껴졌다.
  한편, 어떻게 보면 '메데릭' 만큼 이방인의 형상을 뚜렷이 갖고 있는 이도 없을 것이다. 태생적으로 인디언의 피가 섞여 있는 혼혈이라는 면이 그러하고 무엇보다 일반 학교교육에 정착하지 못하는 소위 '문제아' 같은 이미지가 그것을 말해준다. 여차하면 일탈할 수 있는 수단인 말을 데리고 다니는 점, 편부 슬하인 점, 일반적이고 정상이라 여기는 학교와 박제된 교과서보다는 자연과 살아 있는 생물(자신의 말, 산의 식물, '찬물 속의 송어'와 같은 것들)에 더 집중하는 모습 등. 청소년기를 '주변기'라 칭하는 학자도 있듯이, 이러한 성향의 아이들은 당연히 학교와 사회적 관습의 이방인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런 '메데릭'과도 교감을 이루고야 만다. 그 첫 관문인 '종이 공 사건'에서 메데릭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다름 아닌 '상대에 대한 긍정'이었다. '나'는 마을 사람들처럼 메데릭을 편견을 갖고 보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메데릭을 '나'와 다른 이방인으로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메데릭에게서 자신의 예전 모습을 찾거나, '나'가 가지지 못한 부분을 메데릭이 가지고 있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나' 자신조차도 이방인으로 대상화하여 면밀하게 관찰하려 한 태도를 취하려했다는 점에서 메데릭 대목이야말로 이방인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가 가장 자세하게 드러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결국엔 메데릭은 아버지 때문에 영영 학교를 떠나게 된다. 메데릭 집의 무거운 가구와 메데릭의 아버지가 즐겨 입는 자연스럽지 못한 정장 풍의 옷이 모든 것을 말해 주듯, 메데릭의 아버지는 아들의 본성을 염려하지 않은 채 학교 교육에만 매어 두려하는 지독한 편견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의 아이들 군상은 정도와 영역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두 소외된 이방인의 초상을 보여준다는 면에서는 공통적이다. 부모와의 심리적 이유를 유독 힘들게 겪는 '빈센토', 늘 가난하고 검소하여 소외 받는 '클레르', 우크라이나라는 주변부의 노래로 주변 모두를 아우르는 '닐', 일반인들이 혐오해마지 않는 지저분한 피혁공장 아들인 '드미트리오프', 외따로 떨어진 집에서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노동에 시달리는 '앙드레', 그리고 고독한 반항아 '메데릭'에 이르기까지.  '나'는 이 아이들과의 소중한 추억을 안고 마을을 떠난다. 마지막으로 기차가 마을을 휘감고 돌아가듯, '나'는 "내 생애의 아이들"을 맘속에 그리며 떠나간다. 이제 '나'는 읍내로 가 또 다른 '이방인'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내 생애의 아이들' 만큼이나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간은 이방인일 수 밖에 없지 않나 싶다. 세대나, 계층, 성격, 취향 등 꼭 언어나 국가, 문화와 같은 확연한 경계가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또, 때로는 불합리한 관습과 편견을 가지고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이방인처럼 바라보는가. 우리 모두 정도와 영역의 차이일 뿐이지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은 이방인일 수 밖에 없다면, 이제  '누가 이방인인가'로 서로를 나누는데 시간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이방인(?)과 관계를 잘 맺을 수 있을 것인가'에 방점을 두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요컨대, '아는 만큼' 보인다 하여 자신의 '아는' 프리즘으로 상대를 재단할 것이 아니라, '모르는 만큼' 나의 기준과 편견을 일단 유보하고 대상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성과 논리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곧 나 자신을 관찰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 같다.  '메데릭'의 눈높이에 맞춰 나란히 앉아 얘기를 나누려 노력했던 '나'처럼. 섣불리 자신의 욕심이나 교육적 관점을 관철시키려 하지 않고, 메데릭이 관심 있어 하는 자연에 관한 공부부터 시작해주려고 백과사전을 권해 주던 '나'처럼. 나는 너의 또 하나의 이방인. 때로는 모르는 만큼 보일 때도 있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