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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쾌하고 이해하기쉬운 이야기를 기대하고 책을 펼친다면, <방랑자들>은 굉장히 당혹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전혀 상관없이 보이는 듯한 짧은 이야기가 100꼭지 넘게 연달아 이어진다. 심지어 화자도차도 명확하지 않다. 편지글 형식의 글 등 몇몇 편에서는 누가 쓰고 말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언급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 몇몇 대목을 제외하면 주체가 워낙 모호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한 명이 자기 이야기를 100가지 넘게 하는지, 아니면 적게 잡아 수십 명의 화자가 자기 이야기를 한두 꼭지씩 늘어놓고 있는지도 분간이 되지 않을 지경이다. 양쪽 해석 모두 들어맞기에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이 모호함은 난해함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성으로 다가온다. 왜냐 하면 이 책은 특정한 인물 한 명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공감할 법한 수많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방랑자들>은 겉보기에는 일종의 옴니버스 형식처럼 보인다. 가끔씩 같은 제목 하에 단선적으로 이어지는 몇몇 페이소드가 듬성듬성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이 정도를 제외하면, 겉보기에는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간헐적인 에피소드가 산발적으로 나오는 것만 같다. 마치 에피소드 순서를 뒤섞어서 읽어도 별다른 지장이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치밀하고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어느새 느끼고 체감하게 된다. 앞 에피소드를 읽지 않은 상태로, 겉으로는 별다른 연관이 없어 보이는 뒷 에피소드를 읽으면, 감상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마치 특정한 일을 같이 겪었는데, 개인의 경험이나 사고관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그런 유기적인 절묘한 구성을 차치해도, <방랑자들>의 이야기는 어수선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어딘가를 떠돌아다니거나, 떠돌아다니지 않는 것을 갈구하는 내용이 주축을 이룬다. 여행이란 과연 즐거운 오락이기만 할까. 새로운 곳을 마음껏 돌아다니는 것은 즐겁고 재미난 일일까. 그렇다면, 영원히 어딘가에서 정착하며 안도감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 여행하고 다니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본인이 불행해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할까? 지속적으로 자청해서 방랑자 신세가 되는 것과 과연 얼마나 다른 걸까?
개인적으로 <방랑자들>을 읽을 때 특히 자주 들었던 생각은, 일상적인 풍경도 자신이 보고 듣고 겪었던 경험이나 기억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호기심의 방'에 대한 연출에서 그런 부분은 그야말로 극에 달한다. 호기심의 방이란 르네상스와 근대 유럽에서 큰 저택을 가진 부유한 권력자들에게 유행했던 사설 전시관 같은 장소이다. 이 책에서 처음 언급될 때에는 마치 "옛날엔 그런 것도 유행한 적이 있었대." 정도로 가볍게 언급된다. 여러 생물이 화학처리를 거쳐 전시관에 전시된 모습을 그저 전시품 바라보듯이 무심히 넘기게 된다.
하지만 이런 묘사가 여러 번 단발적으로 나오다가, 요피피네 졸리만이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츠 1세 황제에게 보낸 세 편의 편지가 나오면서 분위기는 일변한다. 첫번째 편지에서 졸리만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 편지에서, 요제피네의 아버지가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이유는 다름아닌 그 시신이 박제처럼 호기심의 방에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프란츠 1세가 정말 그랬는지는, 오스트리아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19세기, 20세기 전의 유럽에서는 그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일명 후진국 사람을 동물원처럼 사람들 앞에서 전시하거나, 시신마저 전시품으로 만든 일이 여러 번 있었으니까. 호텐토트 비너스, 이누이트 미닉...... 이 지점에 이르면, 여러 생물을 전시한 '전시품'도 그저 물건 바라보듯이 무심히 볼 수 없게 된다. 사람을 전시하는 것이 사람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라면, 다른 생물을 전시하는 것은 생물의 생명을 무시하는 것인가? 사람은 전시하면 안 되고 사람이 아닌 생물은 전시해도 되는 건가?
시신을 전시품으로 만들기 위해 화학 처리를 하는 내용이 거의 맨 마지막에 위치하는 대목은 더욱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어느새 이런 생각이 들게 된다. 평생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하고, 어디에서도 안도감을 느끼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만을 추구하던 존재가 박제처럼 전시된다면, 그것은 안식을 찾은 것일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 떠나갈 자유마저 박탈된 것일까. 그것은 아마 끊임없이 방랑하는 사람이 자기가 있을 곳을 과연 찾을 수 있을지만큼이나, 답을 찾기 힘든 문제일 것이다. 누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답이 달라질 테니까. 마치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보다 납득할 수 있을 새로운 대답을 찾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