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하고 천박하게 둘이서 1
김사월.이훤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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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상하고 천박하게 』, 김사월/이훤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떠나고 싶은데 죽을 용기는 나지 않아서 그냥 살았다. 삶은 기쁨보다 고통을 더 많이 수확하는 밭이니까. 어느 순간부터 삶은 최선과 상관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슬아를 만났어. 살아 있음에서 오는 책임은 무겁지만 그래도 사는 게 좋아졌다. 머물고 싶어졌다. 이 울타리를 잘 지킬 수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한 사람 때문에 이렇게 달라질 줄 나도 몰랐다.


넌 누군가가 널 복잡하게 알아줄 때 눈물이 난다고 했지? 그 마음에 사무치게 동감해. 아니, 그냥 완전히 찬성한다. 나 역시 다면적인 내가 복잡하게 알아차려지는 순간을 지나치게 갈망하고 꿈꾸기에... 


저는 종교는 없지만 만약 신이 있다면 제게 사랑 대신에 아픔을 주셔서 그걸 제가 노래하게끔 만들고 그걸 통해서 사랑을 얻으라고 아픔을 주신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됐어요.


스스로에게 좋은 걸 많이 먹이고 나를 거의 죽음으로 내모는 풍경 앞에도 나아가며 살자 친구야. 라디오도 가끔 듣고. 두려워하면서.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으면서. 어떤 날은 눈물이 질질 나는 대로 흘러내리게 두면서. 


✍️<고상하고 천박하게>는 뮤지션 김사월과 시인이자 사진작가인 이훤이 1년간 주고받은 서간을 엮은, 열린책들 출판사의 ‘둘이서 시리즈’ 그 첫 번째 이야기를 장식한 책이다. 


생각을 글로 옮겨적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서평을 쓰며 종종 느끼는데, 그래서인지 작가들에게 자주 경외심이 든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내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콕 찝어서 글로 나타내기도 하고, 때론 나조차도 몰랐던 내 마음을 감쪽같이 하나의 문장 혹은 한 권의 책으로 표현해내기도 하기에. <고상하고 천박하게> 역시 그랬다. 자연스럽게 교차되는 두 사람의 시선을 좇으며, 내밀한 속마음과 인간적인 고뇌가 담긴 그들의 이야기에 속절없이 빠져들어 읽었다. 특히 작가 둘이 식당과 카페에서 시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이 꽤나 인상 깊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과 상대방 덕분에 무지했던 분야에 점차 매력을 느끼게 되는 사람, 주파수를 점차 맞춰가는 듯한 두 사람의 대화에 매료되었다. ‘그 자리에 나도 껴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솔함이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온 글이었다. 이쯤에서 책 문장 하나를 인용하고 싶다. “혼자만 알고 있을 내밀한 자신을 책 곳곳에 바치고 나눠주어 감사합니다.”


#고상하고천박하게 #책스타그램 #책추천 #에세이 #김사월 #이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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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빚을 져서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4
예소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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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루되는 일은 불가항력이지만 연루된 모든 존재를 놓치지 않고 톺아보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_p145 작가의 말 中


✍️동이는 대학교 해외 봉사 프로그램을 통해 혜란과 석을 처음 알게 된다.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동고동락하며 한 계절을 보낸 세 사람. 하지만 많은 관계가 그렇듯 그들 사이에도 조금씩 미묘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렇게 약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동이는 혜란으로부터  캄보디아에 홀로 여행을 간 석이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석이의 휴대폰에 기록된 마지막 위치는 프놈펜 국제공항. 나와 혜란은 석이가 해외봉사를 떠났을 적 바울학교의 학생이었던 삐썻을 만나러 캄보디아에 간 것이라고 확신하며 석이를 찾기 위해 캄보디아로 떠난다. 


타인을 향한 비뚤어진 마음, 서로를 향한 치졸한 의심, 결국엔 금이 가고야 마는 관계 같은 것들이 잘 드러난 소설이었다. 사소하기도, 때론 심각하기도 한 문제 때문에 서로 오해하고 어긋나지만 그렇게 멀어진 관계는 어떤 사건이 트리거가 되어 다시 회복되기도 한다. 복잡미묘한 인간관계를 정확히 꼬집으면서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상실과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드는 점이 좋았다. 예기치 못한 참사와 어쩌면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참사, 그리고 인간에 의해 자행된 극악무도한 학살에 대해서도. 


동이와 혜란, 써삣 셋이서 사람이 되는 게임을 하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삐썻이 석이와 자주 했던 게임이라며 동이와 혜란에게 사람이 되는 게임을 하자고 제안한다. 이 게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말하는 게임인데, 게임 도중 석이가 되는 게임으로 자연스럽게 바뀌고 그러면서 동이는 깨닫는다. 석이가 ‘우리가 아닌 사람’임을. 스스로 석이를 자꾸 우리라는 이름에 가두려고 했음을 말이다. 우리는 애석하게도 타인의 일면만을 보고 그 사람 전체를 안다는 듯 판단하는 실수를 빈번히 저지른다. 석이를 찾아 떠난 여정에서 동이와 혜란은 스스로를 톺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석이를 진정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수많은 장애물들을 통과해 종국에는 관성적인 ‘나’에게서 벗어나 자신이 만든 한계를 깨부순 동이와 혜란을 보며, 누군가에게 빚진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마음에 감사해할 줄 아는 건 정말 용기있고 멋진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미완이기에 온전한 사람들이다.' 라고 말해주는 이 소설이 참 좋다.


🔖혜란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속으로 석이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맞아,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우리조차 쉽사리 말할 수 없는 사건을 캄보디아 사람이, 하필 그런 식으로 부려놓는 것이 못마땅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게 테이블 위에는 침묵이 이어졌고 먼저 삐썻이 침묵을 깼다. “벙도 그렇게 죽을 수 있어요. 어떤 죽은은 그런 식이기도 해요. 다를 게 없어요.” _p58-59


🔖“마음이야? 통증이야?” 엄마는 내게 그때그때 간신히 대답했다. 이건 마음, 이건 통증. 그제야 내가 아픈 엄마에게 참 웃기는 질문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마음과 통증은 어떤 관점에서 동일한 맥락이다. 나는 그걸 한 번도 살핀 적이 없었다. 결국 나와 혜란의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석이의 마음과 고통을 함부로 가늠하려고 했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이해하는 것과 가늠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_p65


🔖상실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수많은 상실을 겪은 채 슬퍼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될 거고 그것은 나와 관계 맺은 이들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다. 엄마를 잃음으로써 내가 상실을 겪었듯, 누군가도 나를 잃음으로써 상실을 겪을 것이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상실의 늪 속에서 깊은 슬픔과 처절한 슬픔, 가벼운 슬픔과 어찌할 수 없는 슬픔들에 둘러싸여 종국에는 축축한 비애에 목을 축이며 살아가게 되겠지. _p113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든 사람들, 그래서 좋든 싫든 나의 일부가 된 이들은 나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어떤 관계들은 “나를 망가뜨릴 수 있는 문제”(12p)가 된다. 어쩌면 내가 무너질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ㅡ이것이 이해와 공감에, 그리고 애도에 필요한 일일 것이다.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화자가 여러 번 놀라고, 부끄러워하고, 자신의 판단을 번복하고 후회하는 이유는, 그가 특별히 어리석은 사람이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사라진 친구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이 변하는 것을 감내할 만큼 용감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_p136-137 작품해설 


*서평단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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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투라 CULTURA 2024.11 - Vol.125, 한강 작가
작가 편집부 지음 / 작가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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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지금까지 움직였다기보다는 저에게 가장 절박한 질문을 가지고 씨름하면서 답을 내기보다 질문을 완성해보려고 써왔습니다. 간절한 이야기를 쓰다가 어느 순간 돌아보니 여기까지 왔구나 싶은데 앞으로 어떤 궤적을 그려나갈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그때 근근이 한 치 앞을 모르고 나아갈 뿐이지요.” _2016.3.7. 한강 인터뷰 중에서 (*한강은 이 인터뷰 이후로 2016 맨부커상을 수상했고,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2024년 10월 10일, 한국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스웨덴 한림원으로부터 날아들었다. 한강 작가가 한국인 최초, 아시아 여상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닷새 만에 그의 책이 100만 부 이상 팔렸다는 사실은 우리의 격양되고 요동치는 마음을 한껏 반영하고 있다. 아시아, 그중에서도 한국만이 사용하는 언어로 구성된 한국문학은 세계문학과 얼마간 동떨어질 수밖에 없었기에 이러한 거리 감각에 한강이 일으킨 파장은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닌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말씀하신 김구 선생님의 소원대로, 한류에 한국문학까지 힘을 보태면서 한국이 문화 강국으로의 도약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 셈이다.


시기적절하게 월간 문화전문지 쿨투라에서 11월의 테마로 한강작가를 선정했다. 이번 호에서는 한국문학을 전 세계에 알리며 한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강 작가의 작품을 다양한 각도에서 심도 있게 조명하고 있다. 


1993년 《문학과사회》에 시로,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소설로 등단하면서 20대 초반부터 작가로서 활동하셨다는 것, 무려 동화도 집필하셨다는 것, 한때 싱어송라이터를 꿈꾸셨다는 사실까지,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하나둘 접하면서 작가님에게 한 발짝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이밖에도 現  한국 예술계의 이모저모를 조명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한다.


+ 부드러우면서도 잔인하고, 강렬하면서도 서정적인 한강의 산문을 직접 느껴보시길😊 한강 작가가 생소하신 분들이라면 개인적으로 <소년이 온다>를 가장 먼저 읽을 것을 권장한다. 


🔖“채식주의자는 쓴 지 10년 넘었는데 갑자기 해외에서 호평을 받는다고 그 책이 변한 것도 아니고 제가 변한 것도 아니어서 담담한 편입니다. 소년이 온다는 그 삶의 시기 동안 저의 시간과 감각과 몸을 죽은 소년에게 빌려드려 제가 썼다기보다는 소년이 쓴 거나 마찬가지여서 먹먹합니다.” (...) 사춘기 접어드는 중학교 때부터 인간은 왜 태어나고 죽어야 하는지부터 제 안에 너무 많은 질문이 생기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집 안에 널려 있는 책들을 보면서 살았는데 이때부터는 필사적으로 그러한 질문에 답을 찾으려고 작품들을 읽었어요. 읽다 보니 작가들에게도 별다른 답이 없고 오히려 저처럼 연약하고 답을 찾기 위해 애쓰는 존재들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_p84-86 한강 인터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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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 제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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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대인 1977년부터 1981년, 한 가족의 애환과 주인공이 겪는 일련의 사건들을 순수한 소년의 시선으로 담아냄과 동시에 우리네 역사를 간접적으로 비추며 한국인의 비애를 가감없이 그려낸 소설이다. 정겨운 정취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정경 묘사가 탁월한 작품이기도 하다.

인왕산 허리 부근에 딸린 조그만 달동네에 사는 4대 독자 동구에게 6살 어린 여동생 영주가 생긴다. 아기는 더럽고 이기적인 존재라 여겼던 동구는 자신이 영주의 아빠라도 된다는 듯 영주를 예뻐한다.

영주가 세 돌이 되기도 전에 한글을 뗀 것과는 사뭇 다르게, 동구는 초등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난독증으로 인해 학업에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동구의 담임을 맡게 된 박 선생님 덕분에 동구는 조금씩 읽고 쓰는 법을 터득해 나간다. 다른 어른들과 달리 박 선생님은 동구의 내면에 관심을 가지고 동구의 이야기를 세심히 들어준다. 자신을 타박하지 않고 넓은 마음으로 보듬어주는 박 선생님에게 동구는 경모의 감정을 품는다.

1980년, 동구의 인생에 첫 역경이 찾아온다. 쿠데타로 인해 정세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동구가 그토록 따르던 박 선생님이 5.18 민주화 운동의 급류에 휘말려 서울로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소식을 듣는다.(복선을 알아차렸을 때 자연스레 입을 틀어막게 된다) 설상가상 동생 영주에게도 비극적인 사고가 생긴다. 안 그래도 웬수같은 엄마와 할머니의 관계가 영주의 일로 돌이키기 힘든 상황으로 치닫고, 가부장의 표본이던 아버지도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동구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큰 결단을 내린다. 네 식구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동구는 비록 어릴 적 추억이 곳곳에 묻은 동네와 정원을 떠나게 되지만, 동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마음속 한 켠 깊숙한 자리에 그곳을 영원히 간직하며 살아갈 것이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생각하며, '모두'의 마음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정원을 떠올리며, 먹먹하고 아련하면서도 따스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었다.

"동구"라는 캐릭터에 애정이 참 많이 갔다. 동구는 어리숙하면서도 생각이 깊다. 말썽을 부리다 사고를 친 영주를 대신해 혼나주는 듬직한 오빠이자 엄마를 위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아들이고,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도 아는 속 깊은 아이다. 나보다 나이는 한참 어려도, 가족을 이해하고 사랑할 줄 아는 어른스러운 면모를 지닌 동구를 보며 많이 배웠던 것 같다.

🔖선생님이 물으시는 대로 조심스럽게 대답을 하면서 나는 뜻밖에도 후련한 감정을 느꼈다. 나에게 이런 것들을 물어본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다들 착하고 똑똑한 영주, 미련 맞고 덜렁대는 동구라고만 생각했다. 커튼을 젖히고 무대 뒤편으로 가보면 그곳에는 아직 어리고 미숙한 영주, 생각 깊고 마음 넓은 동구가 있었다. 선생님이 지금 처음으로, 어두운 무대 뒤편에 쪼그리고 있는 착하고 멋진 나를 무대 위로 불러내려고 했다. _p116

🔖언제였던가. 엄마와 영주가 학교로 찾아왔던 그날. 선생님은 칠판에 예쁜 글씨를 쓰셨고 지저귀는 어린 새 같은 영주는 배에 힘을 주며 큰 소리로 그 글씨들을 읽었다. 아이들은 신나게 박수를 쳤고 엄마는 교실 문 앞에서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누르며 겸손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행복한 날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훗날 박 선생님이 나에게 그렇게 큰 은혜만을 베풀고 자취 없이 떠나가실 줄도 몰랐고, 사랑하는 나의 동생이 그렇게 덧없이 어린 숨결을 거둘 줄도 몰랐고, 엄마가 광인(狂人)이 되도록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 줄도 몰랐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순간이 나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깊고 소중한 찰나라는 사실도 까맣게 모른 채 그저 신명 나게 손바닥이 부풀도록 박수만 치고 있었다. 지금 단 한 번만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그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_p35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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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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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에게서 인물에게로 이어지는 ‘호위’의 서사를 엮어가면서, 누군가는 비웃을지라도,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다시, 믿고 싶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권은에게 증여된 카메라가 이 세상의 본질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_p258 작가의 말 中


이 소설은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다. 승준의 마음이 허기와 추위 속에서 죽음만을 생각하던 열두 살의 권은을, 권은의 마음이 가족을 잃고 죽은 거나 다름없던 살마를, 살마의 마음이 전쟁의 한가운데 놓여 있던 나스차를 구한다. 연쇄적으로 작용하는 인간의 호의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인생을 구원한다. 다른 형태이지만 결국 같은 형질의 사랑. 삶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단순한 진심>을 인상 깊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이번 소설은 전작보다 훨씬 좋았다. 작가님께서는 사회적  주목과 관심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인물들에 주목하는 소설을 꾸준히 써오셨는데, 이번 작품 역시 소외된 타인을 조명하는 이야기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2017년 출간된 작가님의 소설집 <빛의 호위> 중 표제작 '빛의 호위'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빛과 멜로디를 읽기 전 빛의 호위를 먼저 읽으면 좋을 듯하다)


어떤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든지 간에 어린 승준의 행동은 권은의 인생을 (좋은 쪽으로) 송두리째 바꿔놓았고, 결과적으로 그녀에게 세상에서 하나뿐인 값지고 아름다운 인생을 선물한 셈이 됐다. 선의가 선의를 낳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정말 뭉클했고, 그들의 결심과 마음이 너무나도 숭고하게 느껴졌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눈물이 고이고 목이 멨는지 모르겠다. 권은과 승준은 연인 관계가 아니지만, 그들 사이엔 그 어떤 사랑 이야기 속 주인공들보다 더 애틋하고 절절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이 책을 한 층 더 매력적으로 만든 요소라 생각한다. 겨울에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지는 소설이다.


🔖

“그 친구, 은에게 중요한 사람이었어?”

“중요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왜냐하면•••••• 버려진 나를, 고작 숨을 멎게 해달라는 기도밖에 할 줄 몰랐던 열두 살의 나를, 그 자신도 모르게 다시 살게 한 사람이었으니까. _p83-84


🔖“게리는 사진에 자기 삶을 다 바쳤잖아요. 저는 게리 같은 사진가는 될 수 없는 사람이에요.” 

“한 사람이 살면서 어떤 고생을 했고 뭘 포기했는지, 실버, 그걸 속속들이 파악한 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_p113-114


🔖일산의 북 카페 앞에서 눈을 맞고 서 있던 권은, 을지로에서 택시를 타기 전 다급하고도 간절하게 고맙다고 말했던 권은, 병실 침대에 앉아 그를 건너다보며 말을 고르던 권은, 그리고 열두 살의 권은들ㅡ그가 골목과 이어진 현관문을 연 순간 낡은 이불 속에서 가늘고 긴 목을 삐죽 내밀고는 경계의 눈빛으로 그를 건너다보았던 권은과 눈 쌓인 운동장에서 마주쳤던 권은이 그 순간 차례로 떠올랐다. 다른 차원의 시간에서 추출된 그 모든 권은이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네가 이미 나를 살린 적 있다는 걸•••••• 반장, 너는 기억할 필요가 있어. _p 222-223


🔖알마를 살린 장 베른의 악보와 권은을 방에서 나오게 한 카메라는 결국 사랑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둘은 다른 사랑이지만 같은 사랑이기도 하다고, 한 사람에게 수렴되지 않고 마치 프리즘이나 영사기처럼 그 한 사람을 통과해 더 멀리 뻗어나가는 형질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고 덧붙이면서. _p223-224


🔖“나는 누구를 위해서 레스보스섬에 가고 너를 도운 게 아냐. 나는 오로지 나를 위해 그렇게 한 것인지도 몰라.” 그녀의 말을 듣고도 바로 대꾸하지 않던 살마는 잠시 뒤에야 그게 문제가 되느냐고 물었다. “오히려 너는 지금보다 더 너 자신을 위해 살 필요가 있어. 은이 행복하지 않다면 다 무슨 소용이야?” _p241


🔖지난번 편지에서 나는 네게 부탁했지. 그 친구와 나의 이야기를 잊지 말아달라고. 누군가 너의 진심을 몰라준다 해도, 세상이 지금보다 황폐해져 네가 기대어 쉴 곳이 점점 사라진대도, 네가 그것을 잊지 않는 한, 너는 죽음이 아니라 삶과 가까운 곳에 소속돼 있을 거야. _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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