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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평점 :
🔖인물에게서 인물에게로 이어지는 ‘호위’의 서사를 엮어가면서, 누군가는 비웃을지라도,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다시, 믿고 싶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권은에게 증여된 카메라가 이 세상의 본질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_p258 작가의 말 中
이 소설은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다. 승준의 마음이 허기와 추위 속에서 죽음만을 생각하던 열두 살의 권은을, 권은의 마음이 가족을 잃고 죽은 거나 다름없던 살마를, 살마의 마음이 전쟁의 한가운데 놓여 있던 나스차를 구한다. 연쇄적으로 작용하는 인간의 호의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인생을 구원한다. 다른 형태이지만 결국 같은 형질의 사랑. 삶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단순한 진심>을 인상 깊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이번 소설은 전작보다 훨씬 좋았다. 작가님께서는 사회적 주목과 관심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인물들에 주목하는 소설을 꾸준히 써오셨는데, 이번 작품 역시 소외된 타인을 조명하는 이야기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2017년 출간된 작가님의 소설집 <빛의 호위> 중 표제작 '빛의 호위'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빛과 멜로디를 읽기 전 빛의 호위를 먼저 읽으면 좋을 듯하다)
어떤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든지 간에 어린 승준의 행동은 권은의 인생을 (좋은 쪽으로) 송두리째 바꿔놓았고, 결과적으로 그녀에게 세상에서 하나뿐인 값지고 아름다운 인생을 선물한 셈이 됐다. 선의가 선의를 낳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정말 뭉클했고, 그들의 결심과 마음이 너무나도 숭고하게 느껴졌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눈물이 고이고 목이 멨는지 모르겠다. 권은과 승준은 연인 관계가 아니지만, 그들 사이엔 그 어떤 사랑 이야기 속 주인공들보다 더 애틋하고 절절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이 책을 한 층 더 매력적으로 만든 요소라 생각한다. 겨울에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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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 은에게 중요한 사람이었어?”
“중요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왜냐하면•••••• 버려진 나를, 고작 숨을 멎게 해달라는 기도밖에 할 줄 몰랐던 열두 살의 나를, 그 자신도 모르게 다시 살게 한 사람이었으니까. _p83-84
🔖“게리는 사진에 자기 삶을 다 바쳤잖아요. 저는 게리 같은 사진가는 될 수 없는 사람이에요.”
“한 사람이 살면서 어떤 고생을 했고 뭘 포기했는지, 실버, 그걸 속속들이 파악한 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_p113-114
🔖일산의 북 카페 앞에서 눈을 맞고 서 있던 권은, 을지로에서 택시를 타기 전 다급하고도 간절하게 고맙다고 말했던 권은, 병실 침대에 앉아 그를 건너다보며 말을 고르던 권은, 그리고 열두 살의 권은들ㅡ그가 골목과 이어진 현관문을 연 순간 낡은 이불 속에서 가늘고 긴 목을 삐죽 내밀고는 경계의 눈빛으로 그를 건너다보았던 권은과 눈 쌓인 운동장에서 마주쳤던 권은이 그 순간 차례로 떠올랐다. 다른 차원의 시간에서 추출된 그 모든 권은이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네가 이미 나를 살린 적 있다는 걸•••••• 반장, 너는 기억할 필요가 있어. _p 222-223
🔖알마를 살린 장 베른의 악보와 권은을 방에서 나오게 한 카메라는 결국 사랑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둘은 다른 사랑이지만 같은 사랑이기도 하다고, 한 사람에게 수렴되지 않고 마치 프리즘이나 영사기처럼 그 한 사람을 통과해 더 멀리 뻗어나가는 형질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고 덧붙이면서. _p223-224
🔖“나는 누구를 위해서 레스보스섬에 가고 너를 도운 게 아냐. 나는 오로지 나를 위해 그렇게 한 것인지도 몰라.” 그녀의 말을 듣고도 바로 대꾸하지 않던 살마는 잠시 뒤에야 그게 문제가 되느냐고 물었다. “오히려 너는 지금보다 더 너 자신을 위해 살 필요가 있어. 은이 행복하지 않다면 다 무슨 소용이야?” _p241
🔖지난번 편지에서 나는 네게 부탁했지. 그 친구와 나의 이야기를 잊지 말아달라고. 누군가 너의 진심을 몰라준다 해도, 세상이 지금보다 황폐해져 네가 기대어 쉴 곳이 점점 사라진대도, 네가 그것을 잊지 않는 한, 너는 죽음이 아니라 삶과 가까운 곳에 소속돼 있을 거야. _p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