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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의 도시
연여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9월
평점 :
『 각의 도시 』, 연여름
*서평단 도서제공 @moonji_books
🔖주권과 정체성을 빼앗긴 도시에서 방향을 찾고자 헤매고 고민하는 소년은 여기에도 있지만, 그 행보가 ‘부재함’보다는 ‘존재함’으로 ‘사라짐’보다는 ‘드러남’ 쪽으로 향하기를 바라며 쓴 글이다. 현재 우리의 모습을 조금씩 거울에 비춰보기도 하면서. p457 작가의 말 中
✍️인생의 많은 부분을 운에 내맡겨야 하고 때론 목숨까지 위협당하더라도, 주어진 삶에 순응하기보다 닥쳐온 운명에 과감히 맞서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
주인공 시진은 각인인 누나를 위해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사막으로 뛰어들어 흑각을 가져오고, 자기도 잡혀왔으면서 각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노모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굳이 코어에 있는 라티오를 찾아가 약속과 신뢰를 끝끝내 지키고, 자신의 목숨이 간당간당한 순간에도 라에를 구하기 위해 있는 힘껏 발을 내딛는다. 굳은 심지와 용기, 단단하고 선한 그의 마음이 책을 읽는 동안 내게도 전염되는 것만 같았다.
호의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장면들도 인상 깊었다. 시진은 로드와 데인에게서 얻은 호의를 혼자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시진에게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라티오에게 베푼다. 라티오 역시 얼마 되지 않는 흑각을 각통으로 고통 받는 어린 아이에게 나눠준다. 그런 순간들이 모여 세상을 지탱하는 지지대가 되는 게 아닐까. 내가 건넨 작은 호의가 타인에게는 숨 막혀 질식할 것 같은 순간에 이루어지는 심폐소생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작품을 통해 이렇게 또 한번 깨닫는다.
차별과 배제, 혐오는 한 순간에 사라지지 않는다. 제 2 국경이라는 개념이 사라졌을 뿐, 라뎀은 여전히 공중과 지상으로 분리되어 있고, 본사의 영향력 하에 각인과 면역인으로 구별되어 있다. 하지만 기존의 견고한 틀은 무너졌고, 그늘에도 밝은 태양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초중반에 쌓아놓은 두터운 서사층에 비해 뒷심이 다소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은 조금 아쉽지만, 탄탄한 세계관과 매력적인 등장인물, 뚜렷한 메시지가 강점인 작품이다. 전작에서도 느꼈지만, 연여름 작가님이 구축한 세계관은 내게 늘 흥미롭다. (나랑 잘 맞는다는 얘기다🤭) 다음 작품도 기대가 되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만나뵙고 싶다 !
🔖“사막은 어땠지? 암석사막, 처음 나갈 때 기분이 어땠는지 묻는 거야.”
당연히 가슴이 터져나가도록 무서웠다. 열 살짜리 아이에게 내가 알지 못하는 것과 두려움은 같은 의미이기도 했다. 어쩌면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끔찍했지. 사막에서의 첫날. 공포 그 자체였어.”
하지만 자기가 그렇게 빠르게 달릴 수 있는지 처음 알게 된 날이기도 했다. 두렵던 감정은 곧 내가 해냈다는 흥분으로 변했다. 그리고 암석사막을 감히 자신의 두 번째 집이라고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p92-93
🔖“나는 대체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했느냐고 유진을 다그쳤어. 겁도 없느냐면서. 그런데 되레 유진이 나한테 화를 냈지. 왜 그렇게 하면 안 되느냐고. 어째서 하고 싶지 않은 러프 샌딩을 해야 하고, 흑각에 안달복달해야 하고, 왜 마음대로 길을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거냐고.” p288
🔖"나는 그늘에서 태어나 그늘에서 자랐어. 어둠을 마치 공기처럼 친숙하게 느끼는 인간이고. 그늘이 나를 키웠으니까. 너처럼. 물론 때로 모든 게 견딜 수 없이 지긋지긋할 때도 있지만, 그건 그만큼 이 어둠의 땅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해. 내가 기대왔던 것들이나 지켜내고 싶은 것들을 포함해서 말이지. 그래서 지금 내가 지키고 싶은 건, 이 땅보다 거기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이야. p309
🔖많은 사람이 새로운 인생을 찾아서 포르틴으로 떠나도, 최악의 경우 본사가 지상을 완전히 버린다고 해도, 그늘의 모두가 남김없이 이곳을 떠나진 않아. 그늘의 시간은 그늘대로 계속해서 흐를 거야. 여기의 사람들과 변함없이. 그게 어떤 모양이든. 폴린이 그랬어. 라뎀의 원래 명칭은 라뎀이었다고. 본사가 사들여서 이 모든 규칙을 만들기 전에도 같은 이름이었다고. 그 흔적을 지니고 살아갈 사람들도 있다고. p342-343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네가 싫었던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으니까. 면역인이면서 공중에 초연한 것도, 뱅커에 쫄보인 주제에 그늘을 좋아하는 것도. 각인들과 우정을 쌓는 것도. 그런데 그게 우월함이나 반항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단순한 진심이라는 사실이.” p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