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기와 만다라 - 나를 찾아 떠나는 한 청년의 자전거여행
앤드류 팸 지음, 김미량 옮김 / 미다스북스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여행기라기보다 군더더기 없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다'-책 뒤표지에 실린, 미국 필라델피아의 지역 매체쯤 될 거라 짐작되는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의 평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군더더기 없는'의 대목에서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지만, 뭐 어떠랴. 몇 군데의 군더더기 정도, 가비얍게 무시해줄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걸. 아니, 겨우 괜찮다니. 이 무슨 망발인가. 괜찮은 정도를 5만 배 정도 넘어 훌륭하다. 묵직한 감동과 울림을 주는 이 책, '메기와 만다라'는 예술작품이 맞다.  

지은이 앤드류 팸에게 우선 사과부터 해야겠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 여행기 하나를 세상에 내놓았나 했다. '운 좋은 미국 교포, 팔자 좋아 모국 여행-'의 기획인 줄 지레 짐작하고 읽기 전부터 사알짝 경계한 것도 사실이다. 그 동안 '여행기'라는 장르에 워낙 많이 덴 까닭이다. 세상은 넓고 여행할 곳은 많다. 지구 곳곳을 휘젓는 여행자들도 많다. 좋은 데 여행한 것으로 만족하고 멈춰주면 좋으련만, 여행지에서 맛본 얄팍한 감상을 주체하지 못해 쓰레기같은 여행기를 쏟아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몇월 며칠에 어디 가서 누구랑 만나 맥주 먹고 놀았다. 풍경이 멋졌다. 감동 짱이다.' 따위의, 초등학생 그림일기도 못한 여행기를 읽다 보면 한숨이 나올뿐이다. 그 풍경들에게 내가 미안하다. 

'메기와 만다라'를 그저 그런 여행기 가운데 하나로 오해하게 된 데는 출판사의 실수가 크다. '진정한 나 / 청년의 자아 찾기 / 자전거 여행' 따위의 틀에 박힌 홍보라니. 책이 품고 있는 가치를 이야기하기에 홍보 문구가 너무 빈약하지 않은가. 이 책을 단순한 여행기의 범주에 넣는 것에 '난 반댈세-'이다. 잘 짜여진 한 편의 장편소설같고, 치밀하게 계산된 영화 시나리오 같기도 하다. 과거-현재가 날실 씨실처럼 촘촘히 엮여 빈틈없는 사유의 궤적을 그린다. 1975년의 베트남과 30년 뒤의 베트남이 무리 없이 녹아드는 과정에서 나는, 앤드류와 숨가쁜 시간여행을 즐겼다. 

그는 답을 알고 있었으리라. 지은이는 자신의 '자아'를 결코 베트남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생에서 가장 중요한 10대 사춘기 시절과 20대의 청춘을 미국에서 보낸 그가 아니던가. 그는 영어로 말하고 영문을 읽고 햄버거와 콜라를 먹고 미국식 사고와 미국식 관계에 익숙해져있는, 그야말로 미국인이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그가 새삼 베트남으로 떠난 것은,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자신은 미국인이라는, 미국인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그 뼈저린 현실을 인정하기 위해서.

이 책이 가진 여러 가지 훌륭한 점에도 불구하고 오리엔탈리즘의 폭력적인 시선이 느껴져 가끔, 몹시 불편했다. 그 시선은 베트남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계속된다. 질서 따위는 무시한 채 우왕좌왕 자신만 생각하는 고향 사람들을 경멸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는 앤, 사기와 가난이 생활이 되어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시선을 느끼며 당혹해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앤. 책 속에는 날것 그대로의 베트남을 직접 부딪쳐 체험하며 느낀 기쁨, 절망, 위안, 실망, 평화, 혼란, 측은함, 미안함, 부끄러움, 경멸, 공감 등 모든 감정들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앤을 따라 여행하는 내게 베트남 사람들의 목소리와 냄새가 어찌나 생생하게 다가오던지. 그 실감이 너무 두드러져 때로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더 나은 미국인이 되기 위해서", 라는 말로 그는 여행을 마무리한다. 그래. 그것이 맞겠다. 그에게서 '나, 베트남의 뿌리를 발견했어. 그러니 이제 진짜 베트남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래!' 하는 결심을 바랐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비록 그가 선택한 삶은 아니었지만, 그의 생은 그곳-미국-에 있고, 그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남은 생도 거기에 있다. 부모가, 이모가, 누이(형)가, 그의 동생들이 악착같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듯 그 또한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베트남이 그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어느 삶도 일방적으로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는 깨달음, 그것이 아닐까. 그는 1년 동안 베트남의 속살로 들어가 자신의 가장 추악한 부분과 가장 고귀한 부분을 함께 보았고, 그 극단적인 힘으로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할 것이다. 여행의 고통이 가져다준 크나큰 선물, 나 또한 그것을 절실히 바라게 되었다. 이 책 '메기와 만다라'는 그 자체로 귀한 삶의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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