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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집 상 : 경허 EMPTY MIRROR ㅣ 경허집
경허 지음 / 사단법인경허연구소 / 2023년 2월
평점 :
품절
경허선사는 한국 근대불교사에 있어서 문제적 인물이다. 조선조 최고의 선승이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파계승이라는 꼬리표도 붙어 다닌다. 그는 과연 正覺者인가? 부처의 경지에 이른 사람인가?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다. 깨달았다는 기준도 사실상 없고 그걸 인정해줄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깨달음을 얻었다는 僧들은 존재한다. 조계종에서 큰스님 소리를 듣는 분들 중에도 자칭타칭으로 그렇게 일컬어지는 양반들이 있다. 또 일반인들 즉 處士들 중에도 존재한다. 유마거사 같은 부류들이다. 그들은 과연 깨달은 것인가? 그것 역시 아무도 알 수 없다.
분명한 점은 인류역사상, 불교역사상 한 분은 正覺을 얻으셨다는 것이다. 바로 역사적 실존 인물이자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모든 불교는 석가모니 왕자가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음을 전제로 해야 성립이 가능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각을 의심하면 불교는 존재할 수 없다.
문제는 그 이후에 누가 깨달았는가 하는 점이다. 부처님이 생전에 인가하셨으니 가섭존자까지는 이의를 달 수 없겠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는? 과연 또 다른 부처가 등장했는가? 용수 마명 달마 혜능 황벽 백장 조주 임제는? 과연 정각자 경지에 들어간 인물들인가? 우리나라 원효와 경허는? 성철은?
이건 누구에게나 의문의 대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나름대로 기준을 제시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후에 사셨던 45년의 삶의 궤적...그대로 산 사람이라야 그래도 정각자인지 여부를 한번은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처럼 산 사람...그런 인물이 바로 바로 정각자 즉 부처 아니겠는가?
경허는 과연 그렇게 살았는가? 부처님이 경허처럼 그렇게 파행을 일삼았다는 말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종교적 측면에서든 윤리적 측면에서든 아니면 세속적인 기준으로도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야말로 흠잡을 데가 없이 그렇게 완전한 45년을 살다가 가셨다.
그런데 부처님처럼 살지도 않은 사람들, 그렇게 살지 못하고 스스로 깨달았네 운운하면서 걸림 없음 즉 무애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세워 파계를 일삼았다면 그게 어찌 부처일 수 있는가? 그건 부처님이 불자에게 최소한의 계로 요구했던 오계조차 지키지 못한 종교적 만행일 뿐이다.
만일 부처님처럼 살지 못했다면 그게 원효든 경허든 간에 부처가 아니다. 무상정등각을 얻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걸림이 없다는 말은 (지극히 자의적인 판단의 결과인)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유로 파계를 일삼아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팔정도가 체화되어 마음 내키는대로 해도 팔정도에 어긋나지 않는 경지, 그걸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초전법륜에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는 중도를 얻어 완전한 깨달음(무상정등각)을 얻었노라...중도란 무엇인가? 팔정도다. 팔정도란 무엇인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선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육바라밀이라고 해도 좋고 계·정·혜라고 단순하게 표현해도 좋다.
마음이 가는대로 해도 팔정도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지켜지는 경지...그게 바로 佛地이자 佛智다. 부처의 경지라는 뜻이다. 애쓰고 노력해야 팔정도를 실행하는 수준이라면 그건 부처가 아니다. 아직 갈고 닦는 과정에 있는 ‘매우 훌륭한’ 수행자일 뿐이다. 경허가 나름 뛰어난 점은 분명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경허를 입에 올리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뛰어난 僧이라는 것(이른바 큰스님)과 부처님의 경지에 올라 온전한 깨달음 즉 무상정각을 얻었다는 말은 전혀 다른 것이다. 나름대로 결론은 있지만 굳이 경허가 부처의 경지에 이른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시비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가 무애라는 이름으로 행한 파계행위의 한국불교에 대한 부정적 영향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숫타니파타에 등장하는 문구를 인용하기로 한다. 금속세공인 춘다 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1) 의심을 넘어간 사람, 고통을 극복한 사람, 그리고 니르바나의 즐거움 속에서 이 모든 탐욕으로부터 벗어난 사람, 인간과 신들의 지도자 이런 사람들을 진리의 승리자라고 한다.
(2) 진리를 알고 자신 있게 진리를 말하는 사람. 의심을 끊어 욕망의 물결이 일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을 진리를 말하는 자라 한다.
(3) 진리 속에 살고 절제력이 있고 생각이 깊은 사람, 올바른 말을 믿고 따르는 사람, 이런 사람을 진리대로 사는 자라 한다.
(4) 계율을 잘 지키는 체하면서 뻔뻔스럽고 거만하게 거짓말을 곧잘 하고, 자제력이 없고, 말이 많으며 게다가 지혜로운 체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진리를 더럽히는 자라 한다.
2,500년전에 인류 역사에 살다 가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은 의문의 여지없이 (1)에 해당하는 분이다.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불교는 성립할 수 없다.
경허는 과연 어디에 속하는 인물일까? 답은 각자 찾아볼 일이다. 아울러 지금 깨달았다고 큰소리치는 이른바 큰스님들도 이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냉철하게 가늠해볼 일이다.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해도 중도 즉 팔정도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 정말로 삶과 죽음을 不貳法으로 보는 수행자...과연 있는가?
차라리 파계는 상대적으로 나을 수 있다. 하지만 깨닫지도 못한 자들이 정각자를 자처하는 것은 부처님 앞에 용서 받지 못할 대죄를 짓는 것이다. 한국불교에 그런 인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스스로 깨달았다고 착각하고 거짓 오도송이나 남발하는 것은 부처님 전에 큰 죄를 짓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