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법 스님의 신심명 강의 - 중도연기의 눈으로 본 깨달음의 노래
도법 지음 / 불광출판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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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범부가 부처가 되는 것을 궁극적 목표, 지향점으로 한다. 그걸 깨달음이라고 한다. 도법 스님이 이야기하는 중도라는 것도 결국 깨달음에 다름 아니다. 같은 의미 다른 표현일 뿐이다.

 

범부가 부처가 되는 것이 도피안이다. 이쪽 언덕에서 깨달음의 세계 즉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그걸 위해 스님들은 수행을 한다. 깨달음은 장소적 이동이 아니다.

 

정신적 각성이다. 도법 스님은 지금, 여기라는 말에 꽂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수행의 세계에서 지금, 여기라는 것도 범부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한 의미가 없다.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야 한다.

 

그게 바로 중도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확철대오는 곧 중도를 정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중도를 보면 어떻게 되는가? 분별이 없어진다. 망상이 사라진다. 불이의 세계가 온 우주를 덮고 있다.

 

그걸 보면 이젠 더 이상 수행이 필요 없다. 부처의 행, 즉 佛行이 있을 뿐이다. 번뇌가 사라진다. 부처의 삶을 사는 것이다. 혹자들은 석가여래도 정등각 후에 45년간 수행을 했다고 하는데 그건 수행이 아니다. 부처로서의 삶을 여여하게 살았던 것이다.

 

도법 스님은 소시 적에 성철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하다. 하긴 60, 70년대 해인사 강원 출신 치고 성철의 그늘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성철의 신심명은 여전히 베스트 셀러다.

 

왜 그런가? 그만큼 깨달음에 다가가 있고 선적 깊이가 있기 때문이다. 성철 이후 수많은 신심명 해설서가 나왔지만 성철의 아성은 견고하다. 혜능의 육조단경에 대한 해설 역시 마찬가지다.

 

도법 스님은 확철대오, 돈오돈수, 오매일여 등등의 가르침이 너무 어렵고 추상적이어서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좌절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 여기에 적용할 수 있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법 스님은 삶의 지혜를 얻는 것과 부처가 가르치는 깨달음의 세계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교의 가르침도 삶은 지혜서로 읽을 때와 수행자로 공부할 때는 접근하는 태도가 전혀 다르다.

 

인간의 본성에 완전히 각인된 탐진치를 버리고 분별 망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완전한 깨달음, 중도를 얻는 것이 어디 쉬운가? 그래서 선사들이 목숨을 건 수행을 하는 것이고 성철도 그걸 강조하신 것이다.

 

도법 스님은 평생 스님으로 수행자로 살아오신 분이다. 참으로 성실한 분이다. 하지만 왠지 깨달음의 경지를 사실상 포기하고 다만 지혜로운 범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확철대오하지 않으면 늘 번뇌와 망상에 시달리게 된다. 불교적으로 접근하면 그건 한번의 생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어렵다고 생활인 수준의 지혜를 강조하는 것은 수행자의 길과는 거리가 멀다.

 

확철대오, 오매일여, 돈오돈수는 사실 성철의 독자적인 주장이 아니다. 전부 육조단경에 나오는 이야기 그대로다. 성철은 육조의 가르침을 한국 수행자에게 마치 피자 배달원처럼 배달했을 뿐이다.

 

도법 스님은 굳이 성철에게 오류가 있다고 따질 필요가 없다. 굳이 그걸 시도한다면 육조단경을 비판하면 된다. 또 자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도피안 즉 저쪽 언덕으로 가는 방법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굳이 성철의 도피안 방법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따질 필요가 뭔가? 자기 길 가기도 바쁜고 시간이 부족한데 남의 말에 굳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탐진치를 버리고 분멸 망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세상을 불이의 시각으로 볼 줄 아는 눈을 갖는 것이다.

 

그게 정등각이고 확철대오이다. 중도가 바로 그것이다. 깨달음은 이론의 영역이 아니다. 실참의 세계이다.

 

한국 불교 수행자들은 굳이 성철의 아성에 이런저런 이론적 도전을 할 이유가 없다. 그저 자신이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면 된다. 성철의 가르침, 육조단경의 본지가 맞는지 틀리는지, 좋은지 그 반대인지는 그 후에 말하면 된다.

 

그게 바로 절에서 말하는 자기 살림살이다. 도법 스님을 포함해서 한국의 수행자들이 석가여래, 육조, 성철의 말에서 벗어나 자기 살림살이를 말하는 시절이 오길 바란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다만 간택하지 않으면 된다...이게 신심명의 첫 번째 문장이고 신심명 전체를 관통하는 가르침이다. 이는 다른 것이 아니다. 분별에서 벗어나 불이중도를 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승찬 같은 도인이 보기에는 쉬울지 몰라도 범부에게 있어 세상 모든 존재를 분별하지 않는 안목을 갖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승찬이 쉽다고 해서 진짜 쉬운 줄 알면, 수행의 길에서 일을 그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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