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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 없는 세계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우없다.’는 말을 요즘 꽤 자주 쓴다. 누구에게나 기본적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덕분에 나는 경우 없는 경우를 자주 마주한다. <경우 없는 세계>란 분명, 내가 겪은 것처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계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출 청소년, 학교밖 청소년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우리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대학교까지 포함하면 그 햇수는 늘어나겠지만, ‘학생은 학생답게’ 지내야 한다는 말은 보통 이 초중고 12년 동안에 많이들 들었을 것이다. 공부머리쪽은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던 어렸던 시기에는 두들겨맞는 수준으로 나에게 핀잔이 날아왔다. 집이 싫었다. 그러면 집을 나가면 된다. 선택지가 있음에도 집에 계속 머무른 것은 용기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집을 나가면 더 고생한다는 암묵적인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차라리 부담스러운 기대를 받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을 땐, 스스로가 한심해서 속상했다. <경우 없는 세계>의 ‘인수’에게 초장에 안타까움을 느낀 건 이런 이유 때문이겠다.
소설에선 10대와 30대의 인수가 함께 등장한다. 사람의 본질은 그대로겠으나 30대의 인수는 10대를 지나오며 후회했던 것들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의 기억 속 A라는 인물을 떠올리게 한 ‘이호’는 과거의 자신처럼 가출 청소년이다. 이호는 일부러 차에 뛰어들어 다친 다음 운전자에게 받아낸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인수가 이호를 모른척할 수 없던 이유에도 분명 A가 있었다.
이호를 자신의 집에서 기꺼이 지내도록 한 30대의 인수를 만든 것은 10대 시절에 만난 친구 ‘경우’다. 경우 또한 가출 청소년이었으나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훔치거나 부당하게 얻은 돈으로 생활하지 않았다. 가게에서 사람들의 신임을 받으며 생활비를 떳떳하게 벌었다. 똑같이 먹고 살기 힘든 입장에서 경우가 정도를 잃지 않은 것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수를 포함한 성연, 지민 등의 아이들은 살아가고 있었으나 그저 시간에 삶에 자신을 맡겨 수동적으로 끌려가고 있었을 뿐이다. 다른 아이들이 시간과 삶의 존재를 위한 수단이 되었다면 경우는 달랐다. 경우는 언젠가 엄마와 함께 살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떳떳하고 깨끗한 삶을 만들기 위해 주체적으로 살아간 경우. 이런 그가 인수에겐 눈부실 수밖에 없다. 그때부터 경우는 인수 삶의 기준이 되었다.
‘경우 있는 세계’에서 경우를 닮아가려던 인수는 다양한 사건에 휘말린다. (휘말렸다기에는 본인이 선택한 것이지만)악덕 사장에게 열정페이를 받아가며 의심없이 무보수로 일한 것, 같이 생활하는 여성 가출 청소년의 성매매 현장을 급습하여 성매수자에게 돈을 받아내는 것에 가담하는 등 경우라면 하지 않을 일들에 스스로 가담하게 된다.
인수는 점점 살이 빠진다. 20kg이나 빠지며 홀쭉해지지만 마음의 허기는 커져만 간다. 자신이 집을 나오게 된 계기인 아버지. 인수는 그를 마주하기 싫지만 어떻게든 가족이 자신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가족의 삶에 자신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기고 싶은 욕구에 몇 번씩 집을 찾아간다. 집에는 자신의 대체재인 (대체라기엔 인수보다 더 대접받으며 사는) 고양이가 살고 있었다. 마주한 현실에 허기는 커져만 가고, 인수는 가출한 동료들이 있는 ‘우리집’으로 돌아간다. ‘우리집’은 주영이라는 인물이 소유한 반지하방이다. 정작 집주인인 주영은 밖을 배회하며 살았고, 그 집은 잘 곳 없는 가출 청소년들이 오고가며 생활하는 터전이 되었다. ‘우리’라는 말이 주는 친근감과 소속감에 비해 ‘우리집’에 사는 아이들에게 유대감은 없었다. 그저 생존을 위해 ‘우리집’에 머무는 아이들. 인수에게도 ‘우리집’ 현관문에 붙은 구름 모양의 ‘WELCOME! 행복한 우리집’ 스티커는 거슬려 눈에 밟힌다. 단 한 명, 경우만이 더럽고 쓰레기가 넘치는 ‘우리집’을 청소하고 그곳에서 요리도 하며 생활한다. 살아간다는 것과 생활하는 것이 주는 미묘한 차이를 경우가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일상은 앞서 언급했던 A의 죽음으로 인해 끝을 맞는다. A 또한 누구나 올 수 있는 ‘우리집’에 몇 번씩 머물렀지만 더럽고 냄새나는 외관으로 인해 다들 그를 멀리했다. 인수는 예전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A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들었다. 30대의 인수가 만난 이호처럼 A는 움직이는 차에 몸을 들이받으며 운전자에게 돈을 뜯어냈다. 생존 방식이라기엔 너무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한 방법이었다. 그날도 A는 차에 몸을 내밀었지만 운전자는 멈추지 않고 A를 그대로 밟고 지나갔다. 뺑소니였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집’을 찾은 A는 분명 길바닥에서 쓸쓸하게 죽기는 싫었을 것이다. 죽더라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길 바라지 않았을까. 바깥에서 상처를 입고 들어왔지만 결국 ‘우리집’에서 죽은 A. 그의 몸에 남아있는 흔적들은 가출 청소년이라는 ‘우리집’ 멤버들의 취약성과 더불어 그들이 폭력적일 것이라는 편견에 맞물렸다. 경찰은 분명 ‘우리집’ 아이들이 A를 때려서 살해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모두가 A의 죽음 이후의 삶을 두려워했다. 이 모든 두려움은 인수의 결정적 한 마디로부터 시작됐다.
“믿어줄까? 안 믿어줄 것 같아. 우리가 죽였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결국 몇 명의 아이들이 주도하여 A의 시체를 유기한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경우가 있었다. 어쩌면 경우는 A가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우리집’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엄마와 함께 하는 삶은 끝났을 것이라고 예감했을테다. 아이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상황도 예상했을까? 시체를 유기하기로 했을 때 아이들은 경우가 허튼 짓(아마도 신고)을 하지 못하도록 그를 데리고 갔으나, 결국 경우에게 시체 유기 장소를 알려주는 게 되었다.
얼마가지 않아 모두가 재판에 회부되었다. 경우가 자수했기 때문이다. 인수는 아버지를 통해 ‘우리집’ 아이들 중 유일하게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다. 변호사는 인수가 무죄를 받을 수 있도록 질문을 퍼붓는다.
“그래. 그럼 네가 그애 시신을 묻자고 했니?”
인수는 생각했다. ‘내가, 그랬나? 그런 적은 없었다. 나는 다만,’
아마도 뒤에 올 말은 ‘경찰에 신고하려는 경우를 말리고 다른 아이들의 약점을 끌어올려 시체를 묻을 수밖에 없도록 유도했다.'는 것일테다. 시체를 직접 묻지 않았어도, 인수가 그때의 어수선했던 ‘우리집’ 분위기를 전환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로인해 결국 A의 시신은 땅에 묻혔다.
인수는 무죄를 받았다. 경우는 이 일을 최초로 신고하여 자백한 것을 감안하여 8호 처분을 받았다. 그날은 엄마와 함께 살기로 한 경우 삶의 목표가 끝나는 날이기도 했다.
A의 시체를 묻고 난 후로 인수는 귀신을 본다. 몸에는 알 수 없는 추위가 몰려들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된다. A가 자신을 묻도록 유도한 인수를 저주했다는 오컬트적 사고보다는 인수 본인의 죄책감 때문에 귀신을 보게 됐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A는 죽었고 그런 A를 계속 떠올리며 자신의 죄를 상기하기 위해서는 이미 죽은 존재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경우 없는 세계>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경우는 죽었다. 경우는 오토바이로 치킨을 배달하다가 차에 치여 즉사했다. 인수는 경우가 죽은 후에도 경우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경우와 가장 친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오래 같이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경우가 집을 구하고, 그애의 소원대로 어머니와 함께 지내게 되더라도 그때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두운 마음 한편에는 저렇게 가식적이고 답답한 애는 도무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고, 그애에게 과하게 의미부여를 하는 나를 부끄럽게 여기며 경우에게 정을 떼기 위해 마음속으로 고군분투했다.’
분명, 경우 없는 세계를 슬퍼하고 그의 죽음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경우 없는 세계를 살아가는 30대의 인수는 이호를 만난다. 그가 A처럼 죽음을 맞지 않도록, 연약한 삶을 지지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수는 자신의 죄를 덜 수 있을까. 다만 그는 기회를 바랐다.
‘부디 한번 더 기회가 주어지기를. 햇볕을 쬐면 정화되기를. 경우 없는 세상에서도.’
<경우 없는 세계>를 읽으며 떠오른 동창이 있다. 사실 동창이라 하기엔 애매한 것이 그 아이는 우리 학교에 3개월 정도만 있다가 다른 학교로 다시 전학갔고, 계속 그 아이와 연락을 이어오던 몇명을 통해 그 아이가 가출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반만 알고 있던 그의 가출 소식은 전교로 금세 퍼졌고, 전학을 올 때부터 심상치 않았던 그에 대한 소문은 그가 학교에서 사라지자 더 무성해졌다. 나도 그랬듯, 중학교 2학년이라는 나이는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소위 노는 아이가 되는 것이 더 멋지다고 생각하는 시기였다. 전체가 정해놓은 규율의 장에서 혼자 균열을 일으켜 틈을 만드는 그 아이의 존재는 멋져보이기까지 했다. 미성년자임에도 담배와 술이 익숙하고, 성인 남자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그때는 우리와 다른 경지에 있는 존재로 느껴졌다. 그때로부터 십여년이 지난 지금, 그 아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나는 모른다. 한참 잊고 있던 한 사람이 떠오른 게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그 아이에게도 경우같은 아이가 곁에 있었기를, ‘경우 없는 세상’에서도 그가 무사히 살고 있기를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