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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순환선 - 최호철 이야기 그림
최호철 지음 / 거북이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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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돈 주고 한국 작가의 ‘그림책’을 사 본 것 역시 처음인 것 같다. 타쉔이나 파이돈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서양 화가들의 화집은 그렇게 뻔질나게 사 모았으면서.. 그나마 이 작품집이 회개의 첫출발로 삼기에 더없이 훌륭하고 맞춤하다는 사실에 위안 삼는다.

 책은 묵직하다. 물리적 실체를 말하는 게 아니다. 한 폭의 그림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펼쳐지다 보니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빠를 수 없다. 구석구석 천천히 날 것 그대로 드러난 지금-여기의 현실과 충분히 교감한다. 행여 조그만 사연이라도 놓칠세라 사려 깊은 눈길로 음미하고 또 상상한다. 

 <을지로 순환선>을 보며 자연스레 도미에의 <삼등열차>를 떠올린다. 지친 표정과 남루한 입성의 군상들. 눈부신 경제발전과 대조를 이루는, 소외되어 시들어가는 계층의 존재는 세기를 건너 계속된다. 그들은, 또 그들이 탄 열차는 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건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와우산>에서는 브뤼겔의 <바벨탑>을 연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한강을 내려다보며 화면 가운데 자리잡은 산. 멀리 63빌딩에서 국회의사당을 거쳐 중앙으로 휘감겨들어오는 건물과 사람의 흔적은 산꼭대기 달동네 풍경에 이른다. 위태롭게 쌓아올린 이 자본주의 축적의 미래가 어떠할 것인지는 물론 누구나 안다. 문제는 끝에 당도하는 시간. 그 때까진 욕망이 욕망을 욕망할 뿐. 

 최호철은 작은 스케치북에 끈을 달아 늘 어깨에 메고 다닌단다. 본 것만 그리기 위해서라 했다. 그러니 천지사방이 작업실이고 일터인 셈이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 본, 촛불시위 현장을 담은 그림도 그렇게 탄생했을 것이다. 천천히 마우스로 스크롤하며 내려가자니 2008년 남한 사회의 단면이 그대로 엿보였다. 다중시점이라 하던가. 그는 망원경과 현미경을 동시에 사용하며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던 6월의 거리를 생생히 전하고 있었다. 동시대를 증언하는 이 위대한 풍속화가의 등장에 우리는 브뤼겔과 도미에를 평가하는 것 이상의 경의와 찬사를 보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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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피포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억관 옮김 / 노마드북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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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울 클레의 아름다운 수채화로 표지를 장식하고 있지만 책의 내용은 그야말로 정글의 세계를 담고 있다. 나이, 성별, 직업이 모두 제각각인 6명의 인물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일상을 풀어낸다. 유일한 공통점은 이들이 하나같이 내일도 희망도 없는 대도시의 밑바닥 인생이라는 것. 한마디로 ‘남쪽으로 튀어’ 갈 용기도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인간들의 이야기다. 자칫 우중충하게만 흘러갈 수 있는 스토리를 긴장감 있게 엮어내는 건 오로지 작가의 재기 넘치는 서술과 긴밀한 구성 덕분.

 대개 서사문학이란 장르가 등장인물에 대한 관심 내지 애정을 바탕으로 그가 겪는 갈등에 감정이입 하게 만듦으로써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고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걸 생각하면 이 소설의 비호감 주인공들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왜, 굳이 왜 그랬을까. 결국 그런 인간형이 실재하니까, 가 답이 아닐까. 실제로 편견덩어리의 외곬수 히로시나 거절을 모르는 소심남 고이치 같은 경우 주변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캐릭터다. 사건들은 그저 있을 법한 이야기로 넘길 수 있지만 사람들은 분명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이다. 언젠가 법정에서 장정일이 일갈했듯 현실이 소설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소설이 현실을 반영하는 법이니까.

 책이 무척 ‘야하다’는 사전정보가 있었다. 읽고 보니 과연 성애묘사의 분량이나 표현 수위가 모두 상당했다. 하지만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 그런 종류의 상상력을 자극하지는 않는다. 등장인물들이 벌이는 정사는 오히려 처절한 몸부림에 가깝다는 느낌. 그저 먹고 살기 위해, 권태로운 생활을 이기지 못해, 왜소한 자아를 보상받기 위해 혹은 무의미한 집착에 빠져... 하고 또 한다.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이나 미래에 대한 꿈같은 건 없어도 절정으로 향하는 순간의 짧고 강렬한 체험만은 비길 데 없는 자기 확인. 오로지 몸뚱이 하나로 일구어나가는 삶, 이란 게 노동계급을 호출할 때에만 쓰는 표현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삶은 어쨌거나, 누구에게나, 고되고 신산하기 짝이 없는 것. 허구일망정 그걸 엿보는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았다.

 또 하나 사소하지만 인상적이었던 건 보잘 것 없는 군상들이 모여드는 만남의 광장으로 제시된 도서관이라는 공간이다. 자타공인 ‘하류인생’들의 집합소가 동네의 공립도서관이라는 사실. 이것보다 더 그 사회의 가치지향과 문화수준과 복지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엎어지면 코 닿을 그곳에는 평생 다 못 읽을 책이 있고, 종일 파묻혀도 좋을 편안한 소파가 있으며, 방해받지 않는 자신만의 시간과 예기치 않은 우연의 마주침 또한 기다리고 있다... 라고 상상하자니 괜스레 배가 아파온다. 남한이라면 어떨까. 종로3가 지하철역의 풍경이 먼저 떠오른다. 얼마 전 다큐학교 동료들이 찍어 온 그곳의 영상에는 열패자들의 절규와 분노가 가득했다. 노숙자부터 장애인, 노인, 노점상, 잡상인, 취객, 비정규직 노동자까지... 가진 게 없어 뭐라 이름 붙이기도 힘든, 그렇게 생의 변방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음습한 지하의 찬 바닥 위에서 서로 악다구니를 질러대고 있었다. ‘빵과 장미’를 다 얻자는 게 그렇게 주제넘은 일일까.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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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도 사랑해도
유이카와 케이 지음, 김성기 옮김 / 이레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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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가냘픈 손가락에 나비를 쥐고 있는 슬픈 표정의 여인이 투명하게 그려진 표지는 솔직히 유치뽕. 싸구려 신문 연재소설의 삽화 같은 느낌이다. 서점에 진열된 채로 나와 만났다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을 운명. 남이 보는 책에 욕심을 내는 괴팍한 취미 탓에 끝까지 읽게 되었다.

 젊은 층에게 호응을 얻는 일본의 신세대 여성 작가라는 선전 문구에 역시 팬시상품이군, 그럼 그렇지, 하는 편견으로 시작했으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는 성급하고 멍청한 예상이 빗나간 것에 대해 기분 좋은 낭패감을 느꼈다. 오가는 지하철과 카페 구석자리에서 틈틈이 느꼈던 감상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봤다.


1.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인문학자인 이득재가 도발적인 제목과 치밀한 실증으로 가족주의를 정면 비판했다면, 유이카와 케이는 있을 법한 사연을 잔잔한 서술로 풀어냄으로써 전통적 가족관에 도전한다. 혈연에 얽매이지 않는, 이해와 배려로 충만한 가족 공동체의 모습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할머니 오토와, 어머니 시노, 그리고 동갑내기 딸인 리리코와 유키오는 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 기구한 사연으로 한 가정을 이루었지만 피로 맺어진 어느 가족보다도 그 관계는 끈끈하고 튼튼하다. 부모는 자식을 억압하지 않고 자식은 부모를 외면하지 않는다. 일방적인 희생이나 강요된 헌신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따스한 동정과 연민이 있기에 지속될 수 있는 관계다. 공교롭게도 가족 구성원은 모두 여성. 또 다른 비혈연 모녀 가족이 새로이 합류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자연스레 알모도바르의 영화들이 떠오른다. 아름다운 여성 연대. (여기까지 쓰고 나서 굳이 이건희의 남다른 자식사랑이나 김승연의 애끓는 부정(父情)을 다시 한 번 조롱하고 싶어지는 건 역시 내가 비뚤어진 인간이기 때문일까. 공공성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적 시민사회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에게 가족은 여전히 문제적이다.)


2. 나이주의(Ageism)에 대한 도전

쉰을 바라보는 어머니와 일흔을 넘긴 할머니는 어느날 문득 유키오와 리리코 앞에서 결혼 계획을 발표한다. 결혼 상대자로 소개된 인물들이 너무나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남자들이어서 지나친 판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진실한 사랑의 감정만큼은 감동을 자아낸다. 중년/노년의 열정적인 사랑 앞에서 젊은 두 딸은 잠시 혼란스러워 하지만 곧 깨닫게 된다. 결혼을 통해 내가 뭘 얻을 수 있을까, 만을 계산해왔던 자신들의 행동이야말로 사랑/연애를 가장한 이기적인 욕망의 거래였다는 사실을. 사려 깊은 딸들의 신속한 자기 성찰이 미처 독자들에게 닿지 못할까봐 걱정이라도 하듯 할머니는 덧붙인다. “예전에 들은 얘긴데, 젊을 때는 사랑하기 위해 살지만 나이가 들면 살기 위해 사랑한다더구나.”


3. 20대의 자아 찾기, 성취와 좌절의 기록

함께 자랐지만 두 딸은 기질이 판이하게 다르다. 리리코가 한 번 마음먹으면 뒤돌아보지 않고 밀어붙이는 저돌적 성격이라면 유키오는 모든 조건을 꼼꼼하고 세밀하게 살펴보고 결정하는 모범생 스타일. 각자 취향과 적성을 살려 방송작가와 대기업 사원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역시나, 사는 게 만만치 않다. 남들이 보기엔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에 용맹정진 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그 길이 상처투성이의 진창길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물론 누구에게도 그 고충을 털어놓을 순 없다. 순전히 혼자 감당해야 할 실존의 무게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뤄나간 점이 이 소설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방황하는 젊은 세대의 길찾기, 라는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회사’라는 가상의 세계를 내세워 애매한 유비와 모호한 결말을 유도했기에 김영하의 『퀴즈쇼』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4. 운명의 장난

놀랍게도, 어렸을 때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존재라든가 사랑에 빠진 고향 친구가 알고 보니 이복남매였다는 둥의 설정이 등장한다. 진부하고도 전형적인 한국 드라마의 공식을 일본 소설에서 발견하게 되어 놀랐고, 같은 공식에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에는 감탄했다. 전자가 뻔한 전개와 결말로 시청자들을 맥 빠지게 한다면 후자는 운명의 굴레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성숙하게 대응하는 주인공들을 통해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쿨하다는 건 프리섹스나 충동적인 생활태도 같은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자기 본위의 삶이 아니라 긍정적인 자기애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삶이라고 믿는다. 더도 덜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두려움 없이 수긍하는 것,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자세.


5. 마음의 안식처

일상에 지치고 사람들에게 상처받을 때마다 주인공들이 찾아가는 곳은 고향이다. 모든 것을 감싸안아주는 치유와 위로의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가족에 대한 애틋함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먼 세상, 남의 일로만 느껴지는 나로선 상상하기 힘든 감정이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반겨주는 작은 풀과 나무들, 집으로 향하는 등 뒤에서 바다 속으로 번지는 노을, 떠들썩하게 이야기꽃을 함께 피울 어릴 적 친구들까지... 자신의 뿌리, 유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물리적 공간보다 더 나를 객관화시켜 돌아보기에 적합한 장소가 또 있을까. 그것은 익숙한 곳으로 떠나는 낯선 여행이다. 낡고 오래되어 여전한 배경 속에서 자라고 변해 새로워진 내 모습은 묘한 부조화를 일으킬 것이다. 그 부조화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다. 자, 이제 딱히 행선지를 찾지 못하고 서성이는 여행자들은 서둘러 자신의 오래지 않은 과거부터 더듬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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