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피포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억관 옮김 / 노마드북스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파울 클레의 아름다운 수채화로 표지를 장식하고 있지만 책의 내용은 그야말로 정글의 세계를 담고 있다. 나이, 성별, 직업이 모두 제각각인 6명의 인물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일상을 풀어낸다. 유일한 공통점은 이들이 하나같이 내일도 희망도 없는 대도시의 밑바닥 인생이라는 것. 한마디로 ‘남쪽으로 튀어’ 갈 용기도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인간들의 이야기다. 자칫 우중충하게만 흘러갈 수 있는 스토리를 긴장감 있게 엮어내는 건 오로지 작가의 재기 넘치는 서술과 긴밀한 구성 덕분.

 대개 서사문학이란 장르가 등장인물에 대한 관심 내지 애정을 바탕으로 그가 겪는 갈등에 감정이입 하게 만듦으로써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고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걸 생각하면 이 소설의 비호감 주인공들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왜, 굳이 왜 그랬을까. 결국 그런 인간형이 실재하니까, 가 답이 아닐까. 실제로 편견덩어리의 외곬수 히로시나 거절을 모르는 소심남 고이치 같은 경우 주변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캐릭터다. 사건들은 그저 있을 법한 이야기로 넘길 수 있지만 사람들은 분명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이다. 언젠가 법정에서 장정일이 일갈했듯 현실이 소설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소설이 현실을 반영하는 법이니까.

 책이 무척 ‘야하다’는 사전정보가 있었다. 읽고 보니 과연 성애묘사의 분량이나 표현 수위가 모두 상당했다. 하지만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 그런 종류의 상상력을 자극하지는 않는다. 등장인물들이 벌이는 정사는 오히려 처절한 몸부림에 가깝다는 느낌. 그저 먹고 살기 위해, 권태로운 생활을 이기지 못해, 왜소한 자아를 보상받기 위해 혹은 무의미한 집착에 빠져... 하고 또 한다.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이나 미래에 대한 꿈같은 건 없어도 절정으로 향하는 순간의 짧고 강렬한 체험만은 비길 데 없는 자기 확인. 오로지 몸뚱이 하나로 일구어나가는 삶, 이란 게 노동계급을 호출할 때에만 쓰는 표현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삶은 어쨌거나, 누구에게나, 고되고 신산하기 짝이 없는 것. 허구일망정 그걸 엿보는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았다.

 또 하나 사소하지만 인상적이었던 건 보잘 것 없는 군상들이 모여드는 만남의 광장으로 제시된 도서관이라는 공간이다. 자타공인 ‘하류인생’들의 집합소가 동네의 공립도서관이라는 사실. 이것보다 더 그 사회의 가치지향과 문화수준과 복지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엎어지면 코 닿을 그곳에는 평생 다 못 읽을 책이 있고, 종일 파묻혀도 좋을 편안한 소파가 있으며, 방해받지 않는 자신만의 시간과 예기치 않은 우연의 마주침 또한 기다리고 있다... 라고 상상하자니 괜스레 배가 아파온다. 남한이라면 어떨까. 종로3가 지하철역의 풍경이 먼저 떠오른다. 얼마 전 다큐학교 동료들이 찍어 온 그곳의 영상에는 열패자들의 절규와 분노가 가득했다. 노숙자부터 장애인, 노인, 노점상, 잡상인, 취객, 비정규직 노동자까지... 가진 게 없어 뭐라 이름 붙이기도 힘든, 그렇게 생의 변방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음습한 지하의 찬 바닥 위에서 서로 악다구니를 질러대고 있었다. ‘빵과 장미’를 다 얻자는 게 그렇게 주제넘은 일일까.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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