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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에 다가가지 말 것
폴 맥어웬 지음, 조호근 옮김 / 허블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원제는 Spiral, 소용돌이다. 소용돌이는 일본어로 ‘우즈마키’라고 한다. ‘우즈마키’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나는 일본 소년만화 3대장으로 꼽히던 ‘원나블 -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 중 ‘나’에 해당하는 <나루토>가 떠오른다. 그 주인공인 닌자 ‘우즈마키 나루토’. 그러고 보니 나루토가 소속된 나뭇잎마을의 문양에도, 그의 최종기술인 ‘나선환’에도 모두 소용돌이가 들어간다. 나루토는 소년만화 주인공답게 차근차근 성장해서는 결국 만화 속 세계관의 최강자가 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우즈마키’도 세계관 최강의 위력을 자랑한다. 단, 이 ‘우즈마키’는 사람이 아니다. 여러분은 어쩌면 오늘 아침, ‘우즈마키’의 친구뻘 되는 녀석을 볶아먹었을 것이다. 이 서평을 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이 ‘우즈마키’의 동료와 접촉하고 한 공간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에 이 소설의 정가 14,500원을 걸 수 있다. ‘우즈마키’와 같은 부류는 전 세계 어느 곳에나 있다. 그렇다. ‘우즈마키’는 균류. 즉, 곰팡이다. “우리 곁의 버섯”.
‘우즈마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세를 뒤집고자 발악하던 일제의 731부대가 “종말병기”로 개량한 최악의 인체 감염 곰팡이다. 언제나 우리 곁에서 닦아내도 닦아내도 끈질기게 자라나는 곰팡이가 소재라는 점이 포자 하나만 뿌려져도 세상이 끝날 것 같은 특별한 공포감과 긴장감을 자아낸다. 소설은 이 곰팡이를 둘러싼 음모를 중심축으로 삼아 할리우드식 판데믹 아포칼립스의 소용돌이 속으로 독자를 빨아들인다. 평범한 곰팡이의 역습에도 속수무책인 나약한 우리가 이런 지독한 곰팡이는 또 무슨 수로 당해낸단 말인가.
작가 폴 맥어웬은 본래 물리학, 화학, 생물학까지 넘나드는 나노기술 전문가다. 그 저력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특히 노벨상 수상자이자 명망 높은 생물학자로서 코넬대 명예교수로 설정된 허구의 인물 리암 코너의 경력에 대한 서술은 왓슨이나 파인만 같은 과학자들과 동시대에 실제로 리암 코너라는 과학자가 살았던 것 아닌가 하는 혼동이 올 정도로 사실적이다. 리암 코너의 업적을 실제 과학사의 궤적 안에 교묘히 섞어둔 부분은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백미라고 하겠다. 그러나 때로는 과학 교양서를 읽는 듯해 SF 장르의 서사는 좋아하되 상세한 기술 설명은 그리 즐기지 않는 독자라면 이런 부분이 도리어 읽는 맛을 해칠지도 모른다.
이 책에 대한 영미권 저널의 찬사는 과학기술과 의약지식, 사실과 공상, 액션과 서스펜스를 교묘히 뒤섞은 훌륭한 스릴러라는 평이 대세를 이룬다. 한국 독자에게도 그럴까. 판데믹을 다룬 작품들이 영미권 독자, 특히 미국 독자에게 크게 어필하는 부분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한다. 세균, 박테리아 등에 대한 미국 사회의 유별난 공포가 바로 그것이다. 미국 마트의 입구에는 카트 손잡이를 소독하기 위한 소독제가 반드시 구비되어있다.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는 손 소독제가 꼭 갖춰져 있다. 전염병에 과민한 독자들에게 곰팡이라는 신선하면서도 모든 곳에 있는 소재를 다룬 이 소설은 더욱 각별한 공포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한국 사회는 미국에 비하면 이런 류의 공포에 비교적 둔감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특별히 어필하지 못할 것은 없다고 본다. ‘분량이 얼마 안 남았는데 수습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싶을 정도로 소설의 맨 마지막까지 사건이 긴박하게 전개되며, 결말도 무난하게 수습한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제의 중국 침입과 관동군, 731부대, 현대 일본의 초식남 현상 같이 한국 독자들이 가깝게 느낄만한 소재들도 흥미를 자극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아시안 캐릭터에 대한 서술이나 미국 중심주의적 세계관, 세력 간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는 전형적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미국의 영웅들이 대재앙과 음모로부터 가족과 전 세계를 구한다는 할리우드식 영웅 서사에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독자들이라면 이 소설을 스릴러 영화 한 편 보듯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제이크는 현대 약학의 선구자 윌리엄 오슬러의 격언을 떠올렸다. "인류의 적은 오직 세 가지뿐이다. 질병, 기아, 전쟁. 이 중에서 가장 강대하고 가장 끔찍한 적은 바로 질병이다."
질병은 단순한 사망자 수의 문제가 아니다. 생물학병기의 위협은 사회를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전쟁은 물론 끔찍한 일이지만 동시에 사회에 충격을 주어, 공동의 적에 대해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만든다. 그러나 질병은 전혀 다른 부류의 적이다. 질병은 국가 내부에서 공격을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을 주변 사람들과 접촉을 꺼리는 피해망상에 걸린 고립주의자로 만들어버린다.
명예 없는 고통일 뿐이다. 용기 따위는 식수나 접촉이나 호흡을 통해 퍼지는 박테리아나 균퓨 포자나 바이러스를 상대로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 가시 영역 밖에 존재하는 위험에 대해서는 용감하게 맞설 방도가 없는 것이다. 인플루엔자 희생자를 기리는 전쟁 기념비를 마을마다 세울 수는 없다. 그들은 그저 고통을 겪다가 죽은 이들일 뿐이고, 모든 사람들이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잊으려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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