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차일드
김현영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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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은폐되어 있는, 비릿하고 구역질나고 소름끼치는 쓰레기 더미들. 폐기물들. 그것이 진정 쓰레기인가, 폐기처분되어야 하는 것들인가, 자기를 상실하고 본디의 기능을 잃어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할 만큼의 가치 소멸한 것들인가, 과연 그러한가. ‘폐기처분’ 된다는 말은 말 그대로 더 이상의 존재 가치가 전무하므로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재생 가치가 없는. 재활용이 될 수 없는. <러브 차일드>에서 폐기 처분의 대상자들은 노인, 혹은 팔이나 다리, 그 밖의 살아가는 데 장애가 있는 자들 등 말 그대로 보호해야 할 존재들이다. 그들은 재활용이 가능한지, 폐기처분되어야 마땅한지 심사를 거쳐 즉각 결과를 통보받고 행해진다. 마치 ‘인간’이 아닌 존재인 듯 인간적인 대우나 인간적인 심성은 일말도 느낄 수 없는 현장이다. 소름끼치도록 차갑기만 하다. 과연 이것이 놀라운 상상의 세계로, 단지 소설 속 이야기로 국한되는 것일까? 단연코, 아니라 확신한다. 이는 10년 혹은 20년 후에 우리에게 닥쳐올 미래일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참담한 미래. <러브 차일드>를 읽는 내내 이것은 결코 허구에 불과하다 생각지 않았다. 그렇게 때문에 더 가슴 아팠고, 그렇기 때문에 더 분노했고, 그렇기 때문에 가슴 한 쪽이 먹먹하다 못해 응어리져 갑갑했다.  


대량 강간 시스템으로 국가에 존속되어, 인간적인 모든 것을 배제시킨 채 자라나는 아이들, 민간인 집에 소속되어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당해내며 죽도록 일해야 하는 늙은 약자들, 겉모습이 어린아이인 채로 평생을 돈 많은 관리 급 집안에서 대대로 이어지며 그들의 성 노리개로 살아야 하는 가엾은 ‘디저트들’,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정과 사랑 없이 내던져야만 하는 세상. 먹을 것은 줄어들고, 노인들은 늘어나고, 생존경쟁에 있어 무능력하고 기능적 존재가 없는 노인들은 폐기처분해버리는 세상. 오래 전 시행되었던 고려장과도 같은 풍습. 과연 자신의 부모를 내버리는 자식들의 졸렬한 인간미는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저자의 말처럼 끔찍하고 극악무도해도 이들은 ‘인간’이다. 우리와 같은 ‘인간’ - ‘인간’이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실상이 어쩌면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로 얼마나 많은 혜택을 누려왔고, 몹쓸 짓을 반복해 왔던가. <러브 차일드>는 그런 행태로서의 대물림이다. 대물림이자 결과였고, 그에 마땅한 대가였다.  

 
<러브 차일드>는 용산 참사 사건 때를 떠올리게 한다. 정부의 잘못 된 대응과 감추려 드는 속셈. 그것은 곧 가려진 채 행해지고 있는 폐기물 처리장과 흡사 닮아있다. 더욱이 노년의 문제가 부각되는 것은 저자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점점 더 나이가 먹는다는 것이 두려웠고, 거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비단 이것이 저자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늙고 병든다는 것에 두려워하고, 더 어려보이고 싶어 안간힘을 쓰고 있지 않은가. 무엇이든 자연적 순리대로 살아야 함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망각하고 있다. 때문에 글 속 ‘진’의 존재가 가엾고, 또 가엾고 가여웠던 것이다. ‘수’ 역시도 정부의 대량생산에 이용당하고, 민간인 집에 소속되어 갖은 학대를 당했다. 그들은 바로 그 전쟁터의 중심부에서 철저하게 유린당했고, 감내한 존재들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쓰는 내내 아프고 힘들었던 만큼 이 책을 읽는 나 역시도 무척이나 아프고 힘들었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그러하리라. 하지만 <러브 차일드>는 우리에게 언제고 다가올 수 있는 미래의 실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읽는 내내, 읽은 후 나는 감탄을 금치 못할 만큼 이 책의 모든 것에 흠뻑 빠져들었다. 내겐 그 밖에 개인적인 의미에서도 많은 깨달음을 준 책이다. 기꺼이 당신에게도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잔인한 실상과 인간의 내면적 악랄함과 잔인함(나와 당신에게도 존재할)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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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꿈 맨발의 여행자 - 낯선 이름의 여행지 동티모르의 조금은 쓸쓸하고 조금은 달콤한 이야기
박성원 지음, 정일호 사진 / 21세기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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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름의 여행지, 동티모르. 그 낯선 이름이 더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이라는 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나서고 싶은 욕심이 한 몫 한다. 그 때문인지 친숙한 곳 보다는 낯선 곳이 더더욱 사람의 발길을 재촉하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잡아끌곤 한다. 최근 <맨발의 꿈>이라는 영화로 우리에게 찾아 온 곳의 배경 역시 동티모르다. 동티모르에서 축구를 가르친 전 축구선수 김신환 선수의 실제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그래서 인지 이 책 속에서도 김신환 선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 당시 직접 축구를 했던 소년에 대한 이야기도 실려 있다. 어쩐지 타지에서 무언가를 이룩해 낸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 언저리부터 시큰하고 뿌듯해지곤 한다.



이 책은 다소 사진을 보는 재미는 다른 여행 에세이집에 비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책 속에 담긴 글은 어느 정도 내 마음을 움직였고, 공감을 일으켰다. 간섭하지 말고, 비교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저자의 말처럼 이는 우리가 갖고 있는 선입견을 깨부수는 일이다. 비단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 역시 너무도 많은 것들을 단편적인 시선과 개인적인 감정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는가. 글 속 소녀처럼, 그저 지니고 있는 기타로 인해 풍족한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이 행복이자 기쁨인 것인데, 엉켜있는 기타 줄을 애써 맞춰주겠다 나서 외려 기타 줄을 끊어 먹고 말았다. 그 그대로가 소녀에겐 행복이 되고, 꿈이 되고, 인생이 되는 것인데 말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그대로의 온전한 것들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오기를 부렸는가 말이다.



나는 비오는 날을 참 좋아한다. 비바람을 동반한 강풍이 아니라 온전히 쏴- 하고 내리는 소나기를 말이다. 그럴 때면 간혹 밖으로 뛰쳐나가 흠뻑 비에 젖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그것이 너무도 시원해 보여서 말이다. 시원하게 비가 내리는 거리를 맘껏 내달리는 동티모르의 소년과 소녀들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도 그 충동을 다시금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온 몸을 감싸는 빗줄기. 그 거센 빗줄기에 많은 것들을 흘려보내고 싶기 때문일까. 그리고 비오는 날의 축 처지는 그 묵직함과 아련함 역시도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결코 가볍지 않은 그 감정. 그것은 슬픔이자 즐거움이었고, 기쁨이었다. 가끔은 빗줄기에 내 몸을 맘껏 맡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빗줄기에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씻어내 보는 거다. 아주 개운하고 시원하게 말이다.



여행은 새로운 무언가를 깨닫고,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모험이기도 하지만, 지치고 힘든 일상에서 벗어나 평온하고 나른한 휴식을 취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가 여행 도중 방갈로에 들어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홀로 보내는 시간을 바라보며 그 역시도 여행의 묘미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도 가고 싶은 여행지 중 한 곳이 이탈리아의 오르비에토인데, 그 이유가 바로 편안함과 나른함, 느긋한 여유를 즐기고 싶은 연유에서였다. 작은 마을에서의 평화로움, 그 곳에서는 마치 시간마저도 느리게 움직일 것만 같다. 이러한 여행 역시 꿈꾸는 것은, 간혹 이런 잔잔함 속에서 인생의 여유와 반환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엉뚱하게도 바다 위를 날아가는 나비들이 있다. 한없이 이어진 바다에서 나비들이 바닷바람을 이기며 길을 찾으려면, 수 만 번의 날개 짓이 필요하다. 저자의 말처럼 나 역시도 그런 적이 있었다. 많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씩 부족했고, 가까이 있는 줄 알았는데 한 참을 지나쳐 멀어져 버린 길. 인생을 살면서 이런 좌절과 쓰린 기억을 몇 번이나 맛보았던가.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고통과 아픔을 겪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고, 바다를 뛰어 넘는 나비 역시 존재하는 것이리라. 좌절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 역시 목표와 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티모르 사람들은 악어를 조상이라 섬기며 절대 해치지 않는다. 또한 악어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알아보고, 나쁜 사람들만 해친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악어와 마주쳤다면, 악어는 나를 해치려고 공격을 가할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나를 피해갈까. 과연 나는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썩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악어의 공격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만약 동티모르에 가게 된다면 악어만은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이 책 속의 글을 읽으며, 참으로 행복하게 지친다는 저자의 말이 계속해서 잊혀지지 않은 채 머릿속에 맴돌았다. 여행 자체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낯선 환경에 놓인 채 두렵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적응하느라 지치고 힘들면서도, 그것이 가슴 벅차도록 행복한 것. 그것이 바로 계속해서 사람들을 떠나게 만드는 여행의 최고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 중독성에 빠져 다시금 여행자의 길로 나서게 만드는 것이다. 행복하게 지친다는 말을 들으니, 더더욱 여행이 떠나고 싶어지는 이 마음. 계속해서 들뜨는 기분이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저자는 여행 중 만난 사람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픈 강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이 질문은 돌고 돌아 내게도 의문점을 남겨놓았다. 과연 나는 행복한가? 이 책에서 넌지시 말하고 있듯 행복은 말 그대로 일상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삶, 그 삶 속에서 행복을 찾고, 그 삶 자체가 행복인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나는 참 행복하다. 행복한 삶을 살아왔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바다와 하늘이 아름다운 저자의 마지막 여행지, 아따우로를 바라보며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당신 역시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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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연
필립 그랭베르 지음, 홍은주 옮김 / 다른세상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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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연’ - 내게 인연이 존재하듯 악연 역시 존재하리라. 사람은 누구나 인연과 악연을 동시에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주 기분 좋은 인연이 있는가 하면, 씁쓸함과 동시에 상처만을 안겨주는 악연 역시 존재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 <악연> 속 두 남자 주인공처럼 치밀하게 인연으로 가장한 악연도 분명 있으리라 생각한다. 너무도 치밀하게 치장되고 무장되어 치명적인 결말을 마주하지 않으면 이것이 악연인지 인연인지 분간조차 하기 힘든 것이다. 그것만큼 사람의 뒤통수를 휘갈기는 일이 또 있을까?



이들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무덤덤하게 흘러내려가는 이야기 속에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다. 마지막 책을 덮으며 흡사 이런 분위기에 이끌려 한동안 멍하게 생각에 잠긴 꼴이 되고 말았다. 처음 시작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이 책은 ‘루’라는 남자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줄곧 이 이야기의 주를 이루는 사람은 그의 샴쌍둥이와도 같은 친구 ‘만도’다. 두 사람은 늘 모든 것을 함께하는 사이다. 그것을 우정이라 하지만, 만도의 우정이 루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소 연약한 루에게 강인한 만도의 반강요적인 우정은 충분히 그렇게 다가올 법도 하다.



루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만도의 우정 앞에 몇 번의 배신과 시련을 안겨주게 된다. 결국엔 만도의 절교 선언을 받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꽤 오랜 시간이 흘러 만도의 연락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 만도가 정신착란의 증상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욱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만도의 그런 정신착란이 자신으로 인해 깊게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이었다. 루는 그러한 사실에 자신의 배신과 시련에 큰 후회와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 죄책감을 씻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이 함께 한 우정을 위해서라도 이번만큼은 그를 배신하지 않고 구해내겠다 다짐한다. 하지만, 결국 루가 택한 방법은 다시금 배신이라는 결말이었다.



정신착란이 있는 사람은 애초부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던 사람이다, 그 문제는 어떠한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 마치 의자의 다리 네 개 중 하나가 부러져 휘청거리는 것처럼. 이 모든 사건의 일련들을 바라보며 결국엔 이들의 천생연분과도 같았던 인연은 철저하게 악연이라는 끔찍함으로 결정된다. 절대적인 우정은 상대방이 되는 것이라고. 살아서도 죽어서도 함께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조차 악연이라는 말 앞에서는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꼴이 되고 말았다. 만도의 일기장을 보며 루가 느낀 감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글 속에 루의 소중한 친구는 만도를 제외 하고 그를 친 자식처럼 사랑하고 아껴준 닌느와 수요일이면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 브리지 게임을 즐기던 엄마의 친구 가비가 있다. 루는 닌느의 죽음과 죽음 후에도 그녀를 기억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가비는 그에게 좀 특별했다. 그녀의 자유분방하고 생기 넘치는 모습에 늘 생동감을 느끼며 종종 데이트를 즐기곤 했던 것이다. 결국 그녀의 죽음 앞에서 약속 하나를 지키지 못했지만 그는 그녀를 오래도록 기억했다. 루의 소중한 세 사람은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다. 루에게 소중한 세 친구는 결국 그보다 앞서 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왠지 모르게 씁쓸함이 느껴졌다.

진정한 우정이란 무엇일까. 인연과 악연은 무엇일까라는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다 다시금 정신착란이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람의 감정을 큰 기복 없이 무덤덤하게 끌고 가다가 어느새 큰 놀라움을 선사하는 작가의 글에 나름 흥미를 느꼈다. 그가 정신 분석가이기 때문일까. 어쩌면 처음부터 모든 것이 너무도 잘 짜여 진 음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초기작인 <비밀>이라는 책은 이미 예전에 사두었으나, 좀처럼 읽을 여유를 찾지 못해 여전히 내 책꽂이에 방치되어 있는 상태다. 어쩌면 지금 이 시점에서는 그 책을 꺼내어 볼 용기가 나는 것 같다. 인연이라고 섣불리 단정 지은 관계일지라도 혹시 모를 일이다. 그 속내의 진짜 모습이 무얼 감추고 있는지 말이다. 끔찍한 악연의 모습일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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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 - 독서의 즐거움
정제원 지음 / 베이직북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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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책읽기’란 무엇인가. 책을 읽음으로 하여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인가. 혹은 책을 읽음으로 하여 내 인생이 풍족해 지는가. 한 단계 더 나아가 그렇다면 책을 읽는다는 것이 내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내 인생에 있어 책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좌지우지 되는가. 그리고 당신에게 ‘책읽기’란 무엇인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3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에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로 10권의 책이 소개되며, 2부에서는 “지식을 어떻게 확장하는가?”라는 화두로 8권의 책을 소개한다. 마지막 3부에서는 “작가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로 12권의 책이 소개된다. 그리고 총 서른 개의 독서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책은 흔히 아는 것처럼 ‘읽는’매체가 아니다. 책은 도리어 ‘생각하는’도구다.”(17쪽) 독서는 작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책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깨닫게 하고 새로움을 발견하며 더 나아가서는 앞으로의 자신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며 깊은 내면의 자신과 마주하게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말처럼 책은 단순히 줄줄 읽는 것에만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다. 혹 읽되, 이는 읽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도 독서는 그런 의미다. 내 인생에 있어 ‘책’을 빼놓을 수 없다. 유달리 어려서부터 책 욕심도 많았지만, 늘 책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던 것 같다. 책을 읽고 나면 마치 또 다른 세계에 놓인 듯한 그 황홀감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떨림. 깊은 내면과의 마주보기 등 그 순간순간이 바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더욱이 이젠 책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직업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내 인생에서도 책의 비율은 족히 어마어마하지 않을까 싶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라,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을 읽어라, 같은 테마의 책을 읽어라, 과거의 읽은 책 중 인상 깊은 책을 다시 읽어라, 같은 장르의 고전을 읽는다, 베스트셀러를 선택하라, 머리말이 좋은 책을 읽어라 등등 총 서른 개의 독서법을 한 권씩의 책과 매치되어 소개된다. 즉 기존의 책에 대한 감성과 소개에 비해 이는 어떻게 책읽기를 하는 것이 좋은지 알려주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아무래도 책읽기가 지겹도록 싫거나, 정말이지 책읽기에 흠뻑 빠져들고 싶은데, 이상하리만치 책만 읽었다하면 졸음이 쏟아진다거나 집중이 안 된다는 사람이라면 이 독서법들을 이용해 보는 것도 아주 유용하리라 생각된다.



1부: 나는 누구인가? - 독서는 나를 찾아서 떠나는 무한의 시간여행이다.

2부: 지식을 어떻게 확장하는가? - 교양과 배경 지식을 쌓는 독서가 곧 인생성공의 열쇠이다.

3부: 작가는 누구인가? - 진정한 책읽기의 즐거움은 작가와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누군가의 인생에서는 ‘책읽기’가 결코, 추호의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혹은 누군가의 인생에서는 ‘책읽기’가 인생의 전반부를 지대한 영향으로 작용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책읽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왈가왈부 장황하게 ‘책읽기’의 필요성과 당신이 꼭 책을 가까이 해야만 하는 이유를 늘어놓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만큼 내면이 깊고 성숙한 사람이 없는 듯 하다. 이는 그 만큼 ‘책읽기’를 통해 많은 ‘생각하기’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리라.



연극, 영화, 콘서트 등 인간이 즐길 문화생활은 넘쳐난다. 더불어 이러한 문화생활이 일반화된 추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책읽기’라는 문화생활은 일반적이진 못하다. 서점에 차고 넘치는 사람 모두가 ‘책읽기’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 사람은 아니리라. 그저 시간 때우기, 모두들 베스트셀러라고 하니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아무런 생각 없이 읽는 어리석음, 책을 ‘생각’하지 않고 ‘읽는’사람들. 자신만의 독서법은 필요하다. 자신에게 맞는 독서를 함으로 인해 한층 더 솔직한 ‘생각하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이미 책과 사랑에 빠진 사람도, 책과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된 사람에게도 유쾌한 시간을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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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엽감는 여자
박경화 지음 / 책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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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과 상처, 거기에 또 다시 덧난 상처와 진물…. 그리고 자기 합리화와 고립된 자아와의 싸움, 외로움, 잃어버린 인생…. 박경화 작가의 소설을 무어라 정의 내려야 할지 쉽사리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앞서 나열한 모든 말들이 각 단편 속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에게 속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가을몽정>, <어항>, <딤섬>, <스무개의 담배>, <지금 그대로의 당신들>, <태엽감는 여자>, <현실은 비스킷>, <어느 삭제되지 않은 비망록> 이렇게 8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목만을 훑었을 땐 매 단편마다 신선하고 새로운 것이라 여겼지만, 다 읽고 난 뒤에는 마치 한 권의 소설집을 읽은 듯 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 만큼 모든 이야기들이 연계되어 있었고, 하나의 스토리로 이어지듯, 마치 매 단편 속의 주인공의 한 사람인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현실은 비스킷>만 제외한다. 이 단편만이 유일하게 남자 주인공이었으므로 별개로 여겨졌다.)



<가을몽정>의 그녀는 약혼자가 있음에도 우연찮게 다가온 중년의 남자와 사랑 아닌 사랑(?)을 하며 자기합리화를 동반했고, <어항>의 그녀는 알코올 중독치료를 받고 있는 남편과 떨어져 홀로 뱃속의 아이를 키우며 옆집여자와의 미묘한 갈등과 스스로의 심리적 압박을 느꼈고, <딤섬>의 그녀는 퍼포먼스를 통해 자기 자신을 내보이는 동시에 스스로의 안식처를 꿈꿨으며, <스무개의 담배>의 그녀는 지긋지긋한 일터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알게 된 남자와 지독하게도 고독한 인생의 쓴 단면을 나누었고, <지금 그대로의 당신들>의 그녀는 구식의 수선 집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위해 내조했던 어머니의 상처, 그리고 그 위에 덧붙여진 그녀의 상처가 돋보였고, <태엽감는 여자>의 그녀는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 딸을 버려둔 채 이혼하고 나섰지만 결국엔 스스로의 자유조차 누리지 못한 채 상처만 입는 꼴에 처하고 말았고, <현실은 비스킷>의 ‘그’는 1년 동안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사장의 집을 찾아가지만 결국 받지도 못한 채 빚더미에 앉은 채 가족들을 고생시키는 무능력한 가장이 되어버렸고, <어느 삭제되지 않은 비망록>의 그녀는 집에서 나와 몸을 파는 인생으로 전락해 늘 아픔에 시달리고 만다. 이처럼 모든 단편속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아픔과 고통, 슬픔을 동반했고 이는 내게도 쓰디쓴 이면적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특히나 나를 동하게 만든 것은 <가을몽정>과 <딤섬> 그리고 <지금 그대로의 당신들>과 <태엽감는 여자>였다. 사실 어느 것 하나 내 마음을 편하게 해준 것이 없었지만, 유독 이 작품들만큼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더 나아가 온통 가슴을 먹먹하게 물들인 동시에 쓰라린 아픔을 느끼게 했다. 과연 무엇 때문에? 라고 생각해 보았지만, 이는 나 또한 그녀들에게서 동질감을 느꼈거나 혹은 동정심을 느꼈다는 데에서 연유한 것이리라. 자기합리화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이기적인 해결책이자, 자기 스스로에게는 약이 되는 법이다. 이것만큼 편리한 것이 또 있을까. ‘그녀’처럼 생각해보자. 나에게는 약혼자가 있지만 상대방 측에서 일체 그런 것은 묻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난 대답하지 않았고, 나 역시도 대답해주지 않는 것을 묻지 않았다. 그녀는 곤란한 질문을 피해가는 것이 관계의 미학이라고 정의했다. 이처럼 손쉬운 방법이 또 있을까 싶다. 세상에 모든 관계와 감정이 이처럼 자기합리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면 무엇 하나 진실하고 올바른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합리화는 나 역시도, 그리고 당신 역시도 심심찮게 저지르고 있는 꽤나 좋은 방법임은 확실하다.



각 단편 속 그녀들과 그는 딱히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 다른 대체로 불리거나 혹은 그것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양상은 그들의 정체정과 자아를 의심케 만드는 것이었고, 때문에 나조차도 혼동스런 자아를 경험하며 그들을 위태롭게 바라보아야 했다. 인생의 단면 중 유독 아프고도 쓴 단면 속에서 신음하는 그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했다. 너무 빠르고, 급하게 사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과연 그들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면 이미 그것은 우리에게도 있는 모습일 것이다. 지독히도 현실을 꿈꾸고 그 현실 속에서 소통하게 위해 발버둥치는 그들의 모습은 안타까운 동시에 바로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소설은 우리에게 있어 자아와 정체성, 인간관계의 진면목, 감정의 소통 등 다양한 바를 시사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먹먹한 가슴으로 내게 전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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