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악연
필립 그랭베르 지음, 홍은주 옮김 / 다른세상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악연’ - 내게 인연이 존재하듯 악연 역시 존재하리라. 사람은 누구나 인연과 악연을 동시에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주 기분 좋은 인연이 있는가 하면, 씁쓸함과 동시에 상처만을 안겨주는 악연 역시 존재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 <악연> 속 두 남자 주인공처럼 치밀하게 인연으로 가장한 악연도 분명 있으리라 생각한다. 너무도 치밀하게 치장되고 무장되어 치명적인 결말을 마주하지 않으면 이것이 악연인지 인연인지 분간조차 하기 힘든 것이다. 그것만큼 사람의 뒤통수를 휘갈기는 일이 또 있을까?
이들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무덤덤하게 흘러내려가는 이야기 속에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다. 마지막 책을 덮으며 흡사 이런 분위기에 이끌려 한동안 멍하게 생각에 잠긴 꼴이 되고 말았다. 처음 시작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이 책은 ‘루’라는 남자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줄곧 이 이야기의 주를 이루는 사람은 그의 샴쌍둥이와도 같은 친구 ‘만도’다. 두 사람은 늘 모든 것을 함께하는 사이다. 그것을 우정이라 하지만, 만도의 우정이 루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소 연약한 루에게 강인한 만도의 반강요적인 우정은 충분히 그렇게 다가올 법도 하다.
루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만도의 우정 앞에 몇 번의 배신과 시련을 안겨주게 된다. 결국엔 만도의 절교 선언을 받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꽤 오랜 시간이 흘러 만도의 연락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 만도가 정신착란의 증상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욱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만도의 그런 정신착란이 자신으로 인해 깊게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이었다. 루는 그러한 사실에 자신의 배신과 시련에 큰 후회와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 죄책감을 씻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이 함께 한 우정을 위해서라도 이번만큼은 그를 배신하지 않고 구해내겠다 다짐한다. 하지만, 결국 루가 택한 방법은 다시금 배신이라는 결말이었다.
정신착란이 있는 사람은 애초부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던 사람이다, 그 문제는 어떠한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 마치 의자의 다리 네 개 중 하나가 부러져 휘청거리는 것처럼. 이 모든 사건의 일련들을 바라보며 결국엔 이들의 천생연분과도 같았던 인연은 철저하게 악연이라는 끔찍함으로 결정된다. 절대적인 우정은 상대방이 되는 것이라고. 살아서도 죽어서도 함께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조차 악연이라는 말 앞에서는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꼴이 되고 말았다. 만도의 일기장을 보며 루가 느낀 감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글 속에 루의 소중한 친구는 만도를 제외 하고 그를 친 자식처럼 사랑하고 아껴준 닌느와 수요일이면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 브리지 게임을 즐기던 엄마의 친구 가비가 있다. 루는 닌느의 죽음과 죽음 후에도 그녀를 기억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가비는 그에게 좀 특별했다. 그녀의 자유분방하고 생기 넘치는 모습에 늘 생동감을 느끼며 종종 데이트를 즐기곤 했던 것이다. 결국 그녀의 죽음 앞에서 약속 하나를 지키지 못했지만 그는 그녀를 오래도록 기억했다. 루의 소중한 세 사람은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다. 루에게 소중한 세 친구는 결국 그보다 앞서 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왠지 모르게 씁쓸함이 느껴졌다.
진정한 우정이란 무엇일까. 인연과 악연은 무엇일까라는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다 다시금 정신착란이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람의 감정을 큰 기복 없이 무덤덤하게 끌고 가다가 어느새 큰 놀라움을 선사하는 작가의 글에 나름 흥미를 느꼈다. 그가 정신 분석가이기 때문일까. 어쩌면 처음부터 모든 것이 너무도 잘 짜여 진 음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초기작인 <비밀>이라는 책은 이미 예전에 사두었으나, 좀처럼 읽을 여유를 찾지 못해 여전히 내 책꽂이에 방치되어 있는 상태다. 어쩌면 지금 이 시점에서는 그 책을 꺼내어 볼 용기가 나는 것 같다. 인연이라고 섣불리 단정 지은 관계일지라도 혹시 모를 일이다. 그 속내의 진짜 모습이 무얼 감추고 있는지 말이다. 끔찍한 악연의 모습일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