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는 국문학도의 숙명이었고 대학시절 필독서였어서 20대 초반에 완독을 했었으나 그 나이에 제대로 이해했을리가 만무하였고, 드라마까지도 챙겨보았으나 커다란 줄기만 기억에 남아있다. 참으로 부끄럽지만 <토지> 외에는 박경리 선생님의 작품은 읽어보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박경리 선생님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새롭게 리커버되어 나온 <김약국의 딸들>을 좋은 기회로 읽게 되어 후기를 남겨본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워낙 두꺼운 책이고 등장 인물들이 많아서 초반 진입장벽이 있으나 1장만 딱 지나가면 흥미가 진진해서 쭉쭉 읽혔고 뒤로 갈수록 궁금해져서 빨리 읽고 싶어내고 마음과 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아껴 읽는 마음이 뒤섞여, 책을 받은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다.
최근에 본 영화 <네브라스카> 그리고 <센티멘탈밸류>, <화이트노이즈>에서 공교롭게도 모두 죽음과 삶, 가족을 다루고 있는데 이 책 역시 그 연장선 상에 놓여 있다고 여겨진다. 읽는 내내 몰입이 많이 되었고 5장과 6장에서는 턱턱 막히는 처절한 심정이 눈물로 터져버리기도 할만큼 오랜만에 긴 호흡의 깊고 진한 이야기를 통과한 기분.
통영이라는 공간적인 배경과 더불어 실감나는 경상도 사투리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는 시대적 배경까지 잘 어우러져 대를 잇는 김약국네 이야기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색인이 책 뒤에 붙어 있는 점이 편집에의 아쉬운 점. 개인적으로는 나의 부모님 고향이 대구라서 사투리에 익숙하고, 색인을 보지 않고도 크게 거슬리는 부분 없이 읽히긴 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사투리나 일본어 표현들이 상당히 많이 나오는데 그때마다 이 두꺼운 책을 앞뒤로 오가며 읽어냈다면 불편했을 것 같다는 생각. 페이지마다 각주를 달아주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조금.
도입부에서는 주인공인 김약국의 부모세대의 이야기가, 중반부에서는 본격적인 이야기와 다섯 딸들 각각의 수난사가 펼쳐지는데 나 역시 두 딸 중 첫째이자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의 위치인지라 김약국의 처인 ‘한실댁’에게 감정이입이 가장 많이 되었다. ‘딸 가진 죄인’이라는 말이 꼭 들어맞았던 시절이었구나. 딸들의 삶을 바라보며 어찌 살아냈을까.
다섯 딸들의 생생한 캐릭터 묘사는 압권이다. 다섯 딸들 모두 매력적이다. 밉다가도 짠하고, 왜저러나 싶다가도 일면 이해가 된다. 냉정하지만 따뜻하고, 어리석어 보이지만 진국인 가진 여러 가지 면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라 하나하나 마음이 간다.
과부가 된 첫째 용숙이가 하는 짓이 얄미웠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래도 고맙고, 용숙 대신에 장녀노릇 톡톡히 하는 둘째 용빈이는 멋지고 대견해서 그녀의 미래를 응원하게 되고, 정신을 놓아버린 셋째 용란이는 그저 안됐다가도 그래도 결국 너는 하고 싶은대로 살았지 싶어 네 속은 편하겠다 싶고, 가장 짠한 넷째 용옥이. (나를 가장 많이 울렸던 아이.) 그리고 새로운 희망인 다섯째 용혜.
다섯 딸 이외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도 누구 하나 배경처럼 희미하지 않고 고유의 색깔을 또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역시 소설이나 영화같이 긴 이야기를 다루는 장르에서 중요한 것은 특정한 ‘사건’보다는 ‘캐릭터’인 것 같다.
풍경이나 심리를 묘사하는 문장들은 감탄스럽다. 감히 내가 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서 더 이상 말을 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페이지는 소설 후반부, 말년에 이른 김약국의 심정을 묘사하는 부분.(389~390쪽) 정신없이 몰아치는 딸들의 수난사에 일언반구 하지 않지만 김약국이야말로 지금 우리내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어서 저 두 페이지를 읽을 때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다.
어떨 때는 김약국의 가족이었다가 어떨 때는 뒤에서 뒷말하는 구경꾼이었다. 같이 흉보고 같이 분노했기에 같이 울어줄 수 있었다. 긴 세월을 함께 살아온 기분이랄까. 지금보다 더 오래오래 이어질 이야기. 오랜만에 밀도 높고 감정선 짙은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던 2주였다. 우리에는 아직도 읽어야 할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