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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나
정은우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5년 12월
평점 :
현실에 붙어 있는, 내가 익숙하고 내가 살아가는 이곳의 이야기도 좋지만 잘 모르는 세계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소설을 좋아하고 읽는지도. 건축이나 미술, 그림이나 운동 등 내가 잘 모르고 경험해보지 못한 다양한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많은 편인데 발레와 AI의 만남이라니 재미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세 친구들의 이야기라고 하니 더더욱.
장편소설이 아니고 연작소설인 것은 각각의 주인공을 화자로 내세운 3부 구성이라는 점. 제목 ‘포나’는 이 세 친구가 사용하고 있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이름이다. AI가 이미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설정. 평화 할머니를 중심으로 세 친구가 엮여 있고, 포나라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세 친구 모두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연작소설로서 잘 꾸려질 수 있는 듯.
어렸을 때부터 함께 발레를 배워온 정서와 현정, 연우의 이야기.
치열한 발레의 세계에서 넘어서지 못할 산을 마주하고 밀려나버린 정서.
어찌저찌 대학은 갔으나 실력과 운 사이에서 늘 고민해 왔고,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모습이 참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뛰어넘을 수 없는 산을 바라보고 느꼈던 ’오만감정‘. 발레를 그만두고 ‘앓던 이를 뺀 양 홀가분했다.‘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대체 얼마나 힘들었을지.
/ 희박하다 못해 없는 것에 가까운 가능성에 모든 걸 거느니 포나와 함게 안정적인 삶을 택하는 편이 나으니까. 그렇다고 믿었다. (p.125)
부모와 같았던 평화의 죽음 이후 현실을 받아들이고 발레를 포기한 현정.
’보호자 없이 낯선 밀림에 뛰어들‘ 자신이 없었던 그녀는 셋 중에서 제일 먼저 발레를 포기하게 된다. 세 명의 인물 중 가장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제시되는데 (외로웠던 어린시절, 약혼자와의 파혼, 아팠던 동생과의 재회 등) 평화 할머니의 친손녀이기도 하고 세 명의 친구 중 성격적인 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
/ 목표치고는 비현실적이고, 꿈이라 해도 비효율적이었다. 인간의 몸과 삶은 유한했다. 유한한 몸과 삶으로 무한한 꿈을 향하는 인간, 위대하기보다는 어리석어 보였다. 언젠가는 산산이 부서질지도 몰랐다. 현정이 바라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p.216)
점점 더 철저해지고 단단해지고 좋아하는 발레를 놓지 못하는 연우.
하고 싶었고, 잘 했다. 그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이야. 차라리 하고 싶지나 말지. 아니면 잘 하지나 말지. 좋아서 하는데 실력까지 있으니 승승장구일 것 같으나 그런 세계는 그 어디에도 없다.
‘성장기의 몸은 감옥과 같았다’고 표현하는 그 마음은 어떤걸까. 지옥에 살면서도 그만둘 수 없는 그 마음은 열정일까 오기일까. 욕심일까 욕망일까.
/ 분했다.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사랑하는 걸 그만둘 수 없어서. ... (중략)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연우가 하고 싶은 건 오직 발레뿐이었다. 끔찍했다. (p.331)
/ 간절해질수록 괴롭고, 괴로울수록 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쉽고, 미워하기를 그만두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p.390)
세 친구는 가끔 모여서 할머니 이야기와 발레 이야기, 현생의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주는 친구들. 물론 투닥투닥거리긴 하지만 서로에 대해 깊이 알고 함께 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차가운 무대 아래에서 더욱 끈끈해지는 그들만의 유대.
단순히 우정 이야기는 아니다. ‘꿈’과 ‘삶’의 이야기이다. ‘재능’과 ‘선택’의 이야기이다.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할 수 있다고 잘 한다는 것도 아니지만 세 명의 선택은 모두 옳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평화의 말처럼 ‘아주 밝은 별은 아침에도 빛나’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