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꼬까신 아기 그림책 3
최숙희 글.그림 / 웅진주니어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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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워낙 짧기 때문에 굳이 인용할 구절도 없다. 알라딘에서 반값 세일 하길래 구입한 책인데 잘 샀다는 생각이 든다. 개미는 작아도 힘이 세니까 괜찮고, 고슴도치는 가시가 많지만 뾰족뾰족하니까 괜찮고, 타조는 못 날지만 빨리 달리니까 괜찮다. "괜찮아!" 라는 긍정적인 한 마디의 말이 아이들에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며 괜찮다고, 자신감을 북돋워주기에도 좋은 책이다. 생각해보면 평소에 '괜찮아!'라는 말을 생각보다 많이 안하는데 책을 함께 읽으며 입에 붙여보는 재미도 있는 것 같다. 그림도 제법 부드럽고 섬세하게 잘 그려졌다. 홍조2세는 애벌레가 잎을 우걱우걱 먹는 장면과 사자가 고슴도치의 가시에 찔려서 아파하는 장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글이 그렇게 많지 않고 문장들도 아주 짧기 때문에 돌 전의 아이들에게 읽어주기에도 좋은 책. 


출처 : http://blog.naver.com/dionysos83/30108899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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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피트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6
마르쿠스 피스터 지음, 김미경 옮김 / 시공주니어 / 199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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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피트와 스티브는 금세 친한 친구가 되었지. 둘이서 함께 날 수는 없었지만 말이야.

하지만 피트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친구랑 함께 하늘을 날아보는 것이었어.

피트는 펄쩍 뛰어 보고 또 뛰어 봤지. 그렇지만 번번이 바닥으로 떨어져 엎어지고 말았어.

새떼가 떠나야 할 날이 다가왔어. 스티브도 떠나야 했지. 두 친구가 작별 인사를 하는데, 스티브보다 덩치는 커다란 피트는 뺨 위로 눈물을 뚝뚝 흘렸단다.

스티브는 날아가면서 뒤를 돌아보았어. "피트야, 너무 슬퍼하지 마. 우린 내년에도 다시 너희 얼음 마을에 올 거야."

 

- 마르쿠스 피스터, <펭귄 피트> 중에서

 

*

 

마르쿠스 피스터는 <무지개 물고기> 시리즈로 유명한 동화작가인데, 개인적으로 무지개 물고기의 내용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던지라 펭귄 피트도 딱히 탐탁치 않았다. 펭귄 피트나 무지개 물고기나 한 권으로 끝나는 책이 아니라 여러권으로 이루어진 시리즈물이기 때문에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일단 <펭귄 피트> 한 권만 달랑 읽어서는 이 동화책이 왜 인기가 많은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식상한 얘기인 것 같고 그렇다고 그림이 예쁜 것도 아니고 ... 무지개 물고기는 비늘에 반짝이를 붙이는 상상력이라도 발휘했지만 이건 그런 것도 없다. 날고 싶어하는 작고 어린 펭귄 피트가 우연히 그 동네에 날아온 작은 새 스티브와 함께 놀다가 스티브가 다시 떠나자 슬퍼한다는, 그리고 그런 피트를 달래기 위해 엄마가 다이빙을 허락한다는 내용. 어쩌면 이 작가가 너무 착하고 부드럽고 예쁘고 다정한 이야기만 써서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스티브가 떠나가야 한다며 작별인사를 할 때 피트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림이 있는데 홍조2세를 앉혀놓고 이 책을 읽어줄 때마다 홍조2세는 피트가 눈물 흘리는 장면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운다, 운다 엉어엉' 하고 흉내를 낸다. "친구가 떠난다고 해서 슬퍼 우는거야"라고 설명해주면 음~ 하고 수긍한다. 
 

출처 : http://blog.naver.com/dionysos83/3010842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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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같이 놀자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5
마리 홀 에츠 지음 / 시공주니어 / 199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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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나는 숨을 죽였습니다. 아기 사슴은 천천히 다가왔죠.

어찌나 바짝 다가붙던지 쓰다듬어 주어도 될 것 같았어요.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도 않고, 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아기 사슴이 곁에 와서 내 뺨을 핥았죠.

아이, 좋아라. 정말 행복해!

모두들, 모두들, 나하고 놀아 주니까.

- 마리 홀 에츠, <나랑 같이 놀자> 중에서

 

*

 

굉장히 단순한 그림체와 단순한 이야기.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이 아닌, 그런 그림 책. 책 뒤의 해설을 보니 에츠는 원래 색을 극도로 아끼는 작가라서, "흑백만큼 풍요로운 색은 없다"라고 평소에도 말했다는데 <나랑 같이 놀자> 에서도 역시나 색이 별로 없다. 전체적인 바탕은 따뜻한 느낌의 노란색. 그리고 그 노란색보다 좀 더 짙은 노랑의 아이 머리 색깔. 얼굴의 살색. 매 장 새롭게 등장하는 작은 동물들의 황토색? 갈색? 요 정도 제외하고는 전부 가벼운 검은 색 색연필로 그린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심심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햇님이 떠 있는 맑은 날에 한 아이가 들판으로 놀러 나갔다. 그곳에서 메뚜기, 개구리, 거북, 어치 등을 만나서는 "나랑 같이 놀자!" 라며 두 팔을 쭉 내밀고 다가가는데 모두들 후다닥 도망가 버린다. 의기소침해진 아이가 연못가에 앉아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있자 도망쳤던 동물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마지막엔 그 경계심 많은 사슴까지 아이를 핥아준다. 아이는 동물들이 자신과 놀아준다는 기쁨에 충만한 행복을 느끼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누군가와 함께 논다는 것, 나와 놀아줄 누군가가 있다는 건 이런 행복감을 준다. 그건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급하게 두 팔을 뻗어 놀아달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을까? 나는 상대방이 좋아서 하는 행동이겠지만 상대에게는 겁을 주고 부담을 느끼게 만들어 도망치게 하고 있지는 않나? 항상 그렇진 않지만 때로는 상대방에 다가오기를 기다려야만 할 때도 있고 나와 상대방이 가깝고 친해지기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할 때도 있는 법이다.

 

아이가 동물들과 친해지는 과정 동안 하늘에서는 인자한 얼굴의 태양이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단순한 그림에 단순한 내용일지 모르지만, 아이가 입고 있는 하얀색 원피스가 나풀거리는 모습이라든지 동물들과 친해져보겠다고 뛰어다니는 동작이라든가 마지막에 연못에서 가만히 숨죽이며 동물들이 자신의 옆으로 다가오는 걸 곁눈질하는 표정 같은 건 아주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동화.

출처 : http://blog.naver.com/dionysos83/30107960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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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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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 죄 썩은 내가 하늘까지 나는구나. 난 인류 최초의-형제를 죽인 저주를 받고 있다. 난 기도할 수 없다. 물론 의향은 의지만큼 뚜렷하나, 더 강한 죄의식이 내 강한 의도를 꺾어버리니, 난 두 가지 일에 매어 있는 사람처럼 어느 쪽을 먼저 할까 멈춰 서 있다가 둘 다 못하는구나. 저주받은 이 내 손에 형의 피가 겹겹으로 묻었다 한들, 그걸 눈처럼 희게 씻어줄 만큼의 빗물이 저 자비로운 하늘엔 없는가? 죄의 얼굴을 마주보게 도와주는 것밖에 자비가 뭣 하러 있는가? 또 기도에 이중의 힘, 타락 전에 우릴 막고 후에는 용서하는 그 힘밖에 뭐가 있지? 난 위를 보리라. 과오는 지나갔다-허나 아, 어떤 기도가 내게 맞을까? <더러운 살인을 용서하소서?> 그건 안 돼. 왜냐하면 난 내가 저지른 살인의 결과를-내 왕관과, 내 야망과, 내 왕비를 아직도 소유하고 있으니까. 사면받고 범죄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을까?......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클로디어스의 대사 중에서

 

*

 

영문학을 하는 사람치고, 또 연극을 한다는 사람치고 셰익스피어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셰익스피어 작품을 참 좋아해서 많이 읽었는데 이번 기회에 햄릿을 다시 읽었다. 햄릿 역시도 이번에 읽은 것까지 합치면 4~5번 정도 읽은 것일텐데 읽을 때마다 다르니 역시 명작이라 하겠다. 내가 처음 햄릿을 읽었던 꼬꼬마 시절에는 햄릿이라는 캐릭터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흔히들 얘기하는 것처럼 우유부단하고, 생각은 많되 행동하지 못하는 나약한 남자의 전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클로디어스는 야비하며 사악한 사람이라 생각했고 왕비와 오필리어는 아무 생각없는 여자라고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다시 읽었을 때에는 이 작품과 극중 인물들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햄릿은 정말 '왕자'였던 것이다. 진정한 왕족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고귀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봉착한 상황과 문제에 대해 이만큼이나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 했다. 내가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나는 어땠을까? 셰익스피어가 묘사한 햄릿보다 더 찌질했거나, 더 무감각했거나, 설득력이 없을 정도로 과격했을 것이다. 한 나라의 왕자로서, 억울하게 살해당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혐오하면서도 사랑하는 어머니의 아들로서, 파렴치한의 조카로서, 한 여자의 정인으로서 그가 짊어졌어야 할 인생의 무게를 떠올려보면 ... 누군들 햄릿만큼 고뇌하지 않겠는가?

 

어렸을 땐 클로디어스가 자신이 지은 죄와 벌을 두려워하는 구절 따윈 읽은 기억이 없는데 다시 읽어보니 클로디어스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형'을 살해한 극단적인 인물로 묘사가 되긴 했지만 요즘에도 클로디어스 같은 사람은 많지 않은가. 욕망에 충실해서 나쁜 짓을 저지르고 괴로워하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 인간이란 이렇듯 바뀌지 않는다. 읽으면서 클로디어스라는 인물에 대해 동정심마저 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오필리어는 이해할 수 없다. 여자 입장에서 볼 때에도 딱히 동정심이 가진 않아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셰익스피어가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잣대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햄릿에서는 여성들의 부정적인 모습이 많이 묘사되는데, 남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시동생과 살림을 차린 ㅡ 그래서 햄릿을 무척이나 괴롭게 만드는 ㅡ 욕망에 충실하고 부도덕한 왕비와 햄릿에게서 버림을 받고 미쳐 죽는 오필리어가 그러하다. 또 한 편으로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인 <베니스의 상인><이나 <십이야> 같은 것을 보면 여성이야말로 용기와 지혜, 매력을 모두 갖추고 있는 존재인 것처럼 묘사한다. 내가 이 점에 대해 얘기했더니 남편은 '셰익스피어가 여자라는 존재를 그렇게 봤나 보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게 나뉘어지지 않나?' 라고 대답했다. 흠... 생각해볼 문제이다.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 죽다>에서의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의 <햄릿>의 등장인물들이라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시 보니 반가웠고,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호레이쇼와 햄릿이 나누는 대화나 분위기가 좀 호로에로티시즘 쩐다고 생각했다. 그 부분을 지적했더니 남편은 별로 놀랍지 않다는듯 흥, 하며 '세상에 안 그런 게 어디있냐'라고 말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꼭 원서로 다 읽어 보고 싶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예전부터 <맥베스>였는데, 다시 읽은 햄릿이 이렇게 좋아졌으니 맥베스를 다시 읽으면 감회가 얼마나 새로울지 두고 봐야겠다.


출처 : http://blog.naver.com/dionysos83/30105662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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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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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특히 그들 모두가 시거 연기를 코와 입으로 공중에다 뿜어 내는 태도를 보아 대단히 신경질이 나 있음이 역력했다. 그런데도 누이동생은 참 아름답게도 연주했다. 누이의 얼굴은 옆으로 숙여져 있고, 음미하며 슬프게 그녀의 시선은 악보의 행을 좇고 있었다. 그레고르는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 될 수 있으면 어쩌면 누이와 눈길이 만날 수 있도록, 머리를 바닥에 바싹 붙였다. 음악이 그를 이토록 사로잡는데 그가 한 마리 동물이란 말인가?

 

- 프란츠 카프카, <변신> 중에서

 

*

 

카프카의 <변신>을 처음 읽은 건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이다. 당시 난 고등학생이었고, 누군가의 추천으로 잠자리에서 이 책을 펴들었다가 결국 밤을 샜던 기억이 있다.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 너무나 많은 생각이 내 머릿속을 휘저었으며, 나의 인지 능력이 사고의 속도를 따라잡히 못해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그만큼 이 책은 충격이었고 일종의 폭탄이었달까. 그렇게 기억의 저편으로 점점 사라져 가던 중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어렸을 때 읽었던 수많은 고전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지만 카프카의 <변신>은 다시 읽기가 참 꺼려지는 작품 중 하나였다. 그리 길지도 않은 중편 소설이고 문체가 어려운 것도 아니라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음에도 손이 선뜻 가지 않는 그런 책이었다. 역시나. 다시 읽어보니 예전에 읽었을 때보다 더 우울하고 더 불편하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로 시작하는 소설 <변신>.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부터 독자는 충격에 빠지고 이 소설의 장르가 SF였던가? 하고 다시금 표지를 살피게 된다. 벌레만도 못한 인생, 벌레 같은 인생... 이라는 표현을 그냥 표현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주인공을 갑작스레 벌레로 만들어 버리는 신선한 시작. 보험회사 외판원으로 살면서 연로한 아버지와 어머니, 음악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여동생을 실질적으로 부양해왔던 주인공 그레고르는 자신이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 보다는 벌레로 변한 나의 상태를 회사의 지배인이 알아채서 해고 당하면 어떡하나부터 걱정한다. 그의 이러한 속마음은 모른 채, 사람들은 그가 쓸모없고 흉하게 생긴 해충이라고 손가락질하며 혐오감을 숨기지 않고 심지어 그가 뼈를 깎는 고통으로 부양했던 가족들조차도 그를 외면한다. 심약한 어머니는 그레고르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아버지는 화부터 내는 상황에서 여동생만이 그를 돌보지만 그녀 또한 그레고르를 돌본다는 행위 자체를 일종의 집안에서의 권력으로 행사하고 있다. 그레고르의 걱정과는 달리, 가족들은 상황에 재빨리 적응하고 각자 살 길을 모색한다. 연로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였던 아버지는 멀쩡해진듯한 몸으로 일자리를 찾아내고 어머니와 여동생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그레고르가 방 밖으로 나왔을 때 아버지가 던진 사과 하나가 등에 박혀 결국 그 상처 때문에 삶을 마감한다.

 

가족이란 것,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왔을 때 하나의 편안한 둥지며 보금자리가 되어야 하는 것, 나의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는 상황이 되더라도 지키고 싶은 단 하나의 것, 그만큼 누군가들에게는 소중하고 듣기만 해도 뼈에 사무치는 어떤 것. 하지만 그만큼 날 옭아매는 굴레이기도 하며 남보다도 못한 존재이기도 한 게 바로 가족이다. 그레고르가 뼈 빠지게 일해도 그건 장남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몫이라고 생각하며, 막상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어 아무것도 자기 힘으로 할 수 없고 수치스러운 집안의 식충이가 되자 차갑게 외면하는 게 바로 그의 가족이었다. 참 슬픈 이야기지만, 내 주변만 봐도 가족 사이에서 그레고르 취급 받는 사람들이 제법 있고 그들의 부모와 가족은 혈육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옭아매며 착취한다. (이건 뭐 착취한다고 밖엔 표현할 단어가 없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었다고 묘사된 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날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장애인이 되었다거나,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병에 걸렸다든가, 어떤 사정으로 범죄를 저지르게 되어 전과자가 되었다든가 등등. 사회에서 착취 당하고 가정에서도 착취 당하는 무력한 개인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썩은 사과 때문에 목숨을 잃는 법이다.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소설 속의 그레고르 잠자는 현대를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자화상이다.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하는 희생,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생. 벌레가 되어 제 코가 석자인 상태에서도 음악적 재능이 있는 여동생을 어떻게 음악 학교에 보낼 것인지를 고민하는 그레고르. 읽으면서 어떤 의미로는 이상의 소설을 읽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음울하고 광기에 사로잡힌, 읽기 불편한 천재랄까. 이 책에는 <변신>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아주 짧은 단편과 에세이 같은 것들도 수록되어 있는데, 하나하나 찬찬히 읽다보면 에드가 앨런 포 소설의 느낌이 나는 것들도 제법 많다. 그만큼 환상과 공포, 욕망과 절망이 뒤엉켜서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한 번 생각해 본다. 당신의 남편을, 아내를, 어머니를, 아버지를, 아들을, 딸을, 오빠를, 동생을... 돈이나 벌어오는 하나의 기계쯤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가 벌레가 되어도 가족으로서 따뜻하게 보살펴주고 받아줄 자신은 있는지. 그만한 자신은 없으면서 그들이 당신에게 주는 것을 넙죽넙죽 받아 먹고만 있는건 아닌지. 그렇다면, 과연 진정한 식인 벌레는 누구인지 말이다 
 

출처 : http://blog.naver.com/dionysos83/30108504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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