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햄릿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아, 내 죄 썩은 내가 하늘까지 나는구나. 난 인류 최초의-형제를 죽인 저주를 받고 있다. 난 기도할 수 없다. 물론 의향은 의지만큼 뚜렷하나, 더 강한 죄의식이 내 강한 의도를 꺾어버리니, 난 두 가지 일에 매어 있는 사람처럼 어느 쪽을 먼저 할까 멈춰 서 있다가 둘 다 못하는구나. 저주받은 이 내 손에 형의 피가 겹겹으로 묻었다 한들, 그걸 눈처럼 희게 씻어줄 만큼의 빗물이 저 자비로운 하늘엔 없는가? 죄의 얼굴을 마주보게 도와주는 것밖에 자비가 뭣 하러 있는가? 또 기도에 이중의 힘, 타락 전에 우릴 막고 후에는 용서하는 그 힘밖에 뭐가 있지? 난 위를 보리라. 과오는 지나갔다-허나 아, 어떤 기도가 내게 맞을까? <더러운 살인을 용서하소서?> 그건 안 돼. 왜냐하면 난 내가 저지른 살인의 결과를-내 왕관과, 내 야망과, 내 왕비를 아직도 소유하고 있으니까. 사면받고 범죄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을까?......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클로디어스의 대사 중에서
*
영문학을 하는 사람치고, 또 연극을 한다는 사람치고 셰익스피어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셰익스피어 작품을 참 좋아해서 많이 읽었는데 이번 기회에 햄릿을 다시 읽었다. 햄릿 역시도 이번에 읽은 것까지 합치면 4~5번 정도 읽은 것일텐데 읽을 때마다 다르니 역시 명작이라 하겠다. 내가 처음 햄릿을 읽었던 꼬꼬마 시절에는 햄릿이라는 캐릭터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흔히들 얘기하는 것처럼 우유부단하고, 생각은 많되 행동하지 못하는 나약한 남자의 전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클로디어스는 야비하며 사악한 사람이라 생각했고 왕비와 오필리어는 아무 생각없는 여자라고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다시 읽었을 때에는 이 작품과 극중 인물들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햄릿은 정말 '왕자'였던 것이다. 진정한 왕족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고귀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봉착한 상황과 문제에 대해 이만큼이나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 했다. 내가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나는 어땠을까? 셰익스피어가 묘사한 햄릿보다 더 찌질했거나, 더 무감각했거나, 설득력이 없을 정도로 과격했을 것이다. 한 나라의 왕자로서, 억울하게 살해당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혐오하면서도 사랑하는 어머니의 아들로서, 파렴치한의 조카로서, 한 여자의 정인으로서 그가 짊어졌어야 할 인생의 무게를 떠올려보면 ... 누군들 햄릿만큼 고뇌하지 않겠는가?
어렸을 땐 클로디어스가 자신이 지은 죄와 벌을 두려워하는 구절 따윈 읽은 기억이 없는데 다시 읽어보니 클로디어스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형'을 살해한 극단적인 인물로 묘사가 되긴 했지만 요즘에도 클로디어스 같은 사람은 많지 않은가. 욕망에 충실해서 나쁜 짓을 저지르고 괴로워하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 인간이란 이렇듯 바뀌지 않는다. 읽으면서 클로디어스라는 인물에 대해 동정심마저 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오필리어는 이해할 수 없다. 여자 입장에서 볼 때에도 딱히 동정심이 가진 않아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셰익스피어가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잣대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햄릿에서는 여성들의 부정적인 모습이 많이 묘사되는데, 남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시동생과 살림을 차린 ㅡ 그래서 햄릿을 무척이나 괴롭게 만드는 ㅡ 욕망에 충실하고 부도덕한 왕비와 햄릿에게서 버림을 받고 미쳐 죽는 오필리어가 그러하다. 또 한 편으로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인 <베니스의 상인><이나 <십이야> 같은 것을 보면 여성이야말로 용기와 지혜, 매력을 모두 갖추고 있는 존재인 것처럼 묘사한다. 내가 이 점에 대해 얘기했더니 남편은 '셰익스피어가 여자라는 존재를 그렇게 봤나 보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게 나뉘어지지 않나?' 라고 대답했다. 흠... 생각해볼 문제이다.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 죽다>에서의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의 <햄릿>의 등장인물들이라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시 보니 반가웠고,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호레이쇼와 햄릿이 나누는 대화나 분위기가 좀 호로에로티시즘 쩐다고 생각했다. 그 부분을 지적했더니 남편은 별로 놀랍지 않다는듯 흥, 하며 '세상에 안 그런 게 어디있냐'라고 말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꼭 원서로 다 읽어 보고 싶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예전부터 <맥베스>였는데, 다시 읽은 햄릿이 이렇게 좋아졌으니 맥베스를 다시 읽으면 감회가 얼마나 새로울지 두고 봐야겠다.
출처 : http://blog.naver.com/dionysos83/301056626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