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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브라이 ㅣ 뒹굴며 읽는 책 4
마가렛 데이비슨 글, J. 컴페어 그림, 이양숙 옮김 / 다산기획 / 1999년 10월
평점 :
세상을 둘로 나누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남자와 여자, 남과 북, 왼쪽과 오른쪽, 천재와 바보, 가난과 부, 물과 불……. 어떤 것을 기준으로 두느냐에 따라 똑같은 세상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눠진다. 그렇게 나뉘는 가운데 심각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자리잡기도 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란 나눔은 얼마 전까지 '비정상인과 정상인'이라는 무서운 잣대로 불리기도 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나누는 사회는 장애인이 햇빛 아래 나가 자유롭게 산책을 할 수 있게 하며, '비정상인과 정상인'으로 나누는 사회는 장애인을 어두운 다락방에 가둬 놓게 한다. 눈과 귀와 팔 다리가 두 개씩이며 남들 달린 자리에 똑같이 달려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만 다르면 괴물 취급을 하고 손가락질과 돌팔매질까지 했던 시절이 있었다. 오죽하면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는 장애인이 살지 않는 줄 알았을까. 장애아를 둔 부모가 세상의 눈이 두려워 자기 자식을 창피하게 여기고 집 밖으로 내보내기조차 꺼려했기 때문이다.
옛날이야기 <반쪽이>(보림)에서 눈도 한쪽 귀도 한쪽, 팔 다리도 한쪽씩 그야말로 반만 갖고 태어난 '반쪽이'가 비장애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괴력을 보여준다. 초등학교 1학년쯤인 아이들은 깔깔거리고 웃으며 읽지만, 반쪽이를 업신여기고 미워하는 형들의 눈이 실제로 장애인을 보는 사람들 눈과 같다는 걸 느끼면 씁쓸하다.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아직까지도 '비정상인과 정상인'으로 구분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장애인을 위해 조금씩 바깥 세상으로의 통로를 열어 주는 일이 드물지 않다. 그와 더불어 장애 극복 이야기가 한동안 인기 동화 주제로 떠올랐었다. <루이 브라이>(다산기획)는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다른 시각장애인을 위해 점자를 발명하는 실존인물을 그렸다. 죽어가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하는 모습에서 남에게 의존만 한다고 생각했던 장애인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루이 브라이가 실존인물이기 때문에 더욱 장애인과 가까워지기 힘든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위인이지 보통의 장애인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잔다르크가 될 수 없듯이 모든 장애인이 루이 브라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따금 TV에서 엄청난 시련을 이겨내고 성공한 장애인이 나오지만 그것은 평범한 장애인을 두 번 상처받게 하는 것이다. 하늘의 별을 따와야만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애 이야기는 좀 더 가까이 다가와야 한다. 괴물도 아니고, 영웅도 아닌 우리 친구 이야기로 말이다. <가방 들어주는 아이>(사계절)에서 주인공은 장애인 영택이가 아니라 비장애인 석우이다. 억지로라도 영택이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석우는 영영 영택이의 아픔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친구도 되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 속의 사람들이 느끼는 그 만큼 석우도 영택이를 그저 딴세상 사람처럼 대했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당부로 시작된 부대낌은 결국 두 사람을 '그냥' 친구로 만들어 주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눈이 장막을 걷고 드디어 해맑아진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여동생이 있습니다>(중앙)에서는 장애인과 피를 나눠 태어나 늘 함께 살아가는 피붙이의 정이 나온다. 그리고 남다른 눈을 읽을 수 있다. 그저 형제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동정심에서 안타까워하는 게 아니라, 함께 살면서 다른 세상을 느끼는 아이의 아름다움을 같이 봐 주는 눈. 소리를 듣지 못해도 다른 감각으로 소리를 느끼는 동생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마음.
아직도 일부 학부모들은 자식이 다니는 학교에 장애아가 함께 다니는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한다. 그러나 부모의 시각에 날이 설수록, 아이들의 생각은 장애 수준이 되어간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자신과 같지 않다고 밀어내고,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로 되돌아오는지 생각해 보길 바란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다르다'는 말을 '틀리다'라고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 또한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과 일맥상통하다.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다를 뿐 장애인이 비정상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지 않으면 앞으로도 '우린 달라요'를 '우린 틀려요'라고 어리석은 표현을 아무 생각 없이 하고 다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