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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사람 비룡소의 그림동화 43
데이비드 맥키 글, 그림, 김중철 옮김 / 비룡소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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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 어른들이 물었습니다. "네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뭐니?" 대뜸 호랑이, 괴물, 귀신, 그러다가 조금 큰 아이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가장 무서워질 때, 그러면서 사람이 사람을 가장 무서워할 때 전쟁을 합니다.
  솔직히 아이들도 늘 전쟁 중입니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서 엄마와 전쟁을 하죠, 밥 먹으며 또 한바탕 전쟁을 치릅니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길에서 친구들과 책과 글씨와 학원 버스와 돌멩이와 선생님과 전쟁을 합니다. 전쟁 중에 느끼지요. 마음이 얼마나 심하게 부딪치고 다치는지를. 전쟁을 치르고 남는 건 "에잇" 하는 후회밖에 없는데도 전쟁은 그림자처럼 따라 붙습니다.
  어른들의 전쟁은 어떤가요? 귀가 닳도록 "하지 마라"를 외치는 어른들은 스스로에게는 "하지 마라"를 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른들의 전쟁은 한번 시작하면 중간에 끝내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른들의 전쟁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요? <냄비와 국자 전쟁>(미하일 엔데/소년한길)을 보면 모든 전쟁이 그다지 거창하고 중요한 문제로 시작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술궂은 마녀는 왼쪽나라와 오른쪽나라의 왕자와 공주 세례식 날 초대받지 못하자 선물로 마법의 냄비와 국자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냄비와 국자가 함께 있을 때에만 스프가 저절로 생기기 때문에 두 나라는 서로 냄비와 국자를 모두 갖겠다고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왕자와 공주의 생각처럼 그저 두 나라가 사이좋게 사용하면 될 것을 채워지지 않는 욕심으로 눈이 어두워진 두 나라는 너나 할 것 없이 상처만 남게 되었지요.
  <여섯 사람>(비룡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보초를 서던 군인들이 서로 물오리를 잡으려고 화살을 쐈다가 상대편 땅으로 화살이 넘어가는 바람에 전쟁이 시작되었지요. 아주 작은 오해가 생겼는데 그것을 풀려는 노력은 해 보지도 않고 서로 먼저 덤벼들기만 한 것입니다.
  군대는 왜 생겼을까요? <여섯 사람>에서 군대는 애초에 전쟁을 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네 땅을 빼앗길까 봐 걱정이 되어, 무서운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것을 지키려고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하던 마음이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군대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군대를 가진 사람이 힘이 세어지니까 다른 사람들까지 군대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에게 으르렁거리던 전쟁도 어떤 사람들의 노력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은 없었겠지요. <전쟁>(비룡소)에서 빨강나라 쥘 왕자와 파랑나라 파비앙 왕자가 전쟁을 끝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빨강나라 쥘 왕자는 파비앙 왕자와 싸워서 이기는 쪽의 나라가 승리하는 걸로 하자며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파비앙 왕자는 싸우지 않고 누구도 이기거나 지지 않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까요?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싸움을 끝내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던 파비앙 왕자였습니다. 쥘 왕자의 방법을 선택했다면 다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왕자가 당했는데 왕과 군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군인들이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전쟁터에만 전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글짓기 시간>(아이세움)의 소년은 친구의 아버지가 군인에게 잡혀가는 것을 보고 두려운 나머지 거짓 글을 썼습니다. 교실에까지 군인이 찾아와 글짓기를 시켰는데 제목이 '우리 식구가 밤마다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매일 밤 라디오를 들었지만 그렇게 썼다가는 친구의 아버지처럼 잡혀갈지도 몰라서 엄마와 아빠가 함께 체스를 둔다고 썼습니다. 덕분에 군인에게 칭찬을 들었지요. 전쟁은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시키기도 하고 거짓말에 칭찬을 해 주기도 하는군요.
  어른들의 전쟁이 '서로 과자 먹여 주기 전쟁'이나 '아이스크림 퍼 주기 전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절대 그렇게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완전히 없앨 수도 없는 것이라면, <전쟁>의 파비앙 왕자 같은 사람을 많이 키워야겠습니다. 전쟁의 진짜 영웅은 끝까지 싸우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싸움을 막으려고 하는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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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로버트 먼치 글, 안토니 루이스 그림, 김숙 옮김 / 북뱅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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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무엇일까요? 가만가만 불러보면 왠지 가슴이 찡해 오는 그 말은 무엇일까요? 누구에게나 태어나기 전부터 가까이 있지만 영원히 곁에 남아 줄 수는 없는 그 말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부모이지요. 함께 지낼 때보다 떨어져 있을 때 소중함을 더 많이 깨닫게 되는 게 부모랍니다. 이 집에도 있고 저 집에도 있고 숲에도 있고 강물에도 바다에도 있습니다. 온 세상에 너무나 많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부모입니다.
  그러면서도 '엄마,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부모는 정해져 있지요. 부모와 자식이 영원한 짝꿍이 되어 언제까지나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모와 자식은 영원히 함께 살 수 없습니다. 자식이 자라 어른이 되면 부모는 늙어서 다른 세상으로 갈 차비를 하니까요. 그리고는 운동회에서 계주할 때 바통을 이어받듯이, 자식이 새로 태어난 아이의 부모가 됩니다.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로버트 먼치/B·B아이들)는 이런 부모(엄마)와 자식의 이야기를 아주 짧으면서도 정확하게 펼쳐 줍니다. '너를 사랑해 언제까지나/너를 사랑해 어떤 일이 닥쳐도/내가 살아 있는 한/너는 늘 나의 귀여운 아기'라는 노랫말이 두어 장에 한 번씩 등장합니다. 이보다 더 확실하게 부모의 마음을 표현한 것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가 낮동안 말썽을 피우고 속을 썩이지만, 아이가 천사처럼 잠든 밤 엄마는 아이 곁에서 이 노래를 불러 줍니다. 아이가 나이 들어 집을 떠나도 엄마는 몰래 찾아가 잠든 얼굴을 보며 이 노래를 부릅니다. 엄마가 늙어서 더 이상 이 노래를 불러 줄 수 없을 때 어른이 된 아이는 '사랑해요 어머니 언제까지나/사랑해요 어머니 어떤 일이 닥쳐도/내가 살아 있는 한/당신은 늘 나의 어머니'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는 엄마가 들려주던 그 노래를 자신의 갓난아기에게 들려주지요.
  어쩌면 부모는 자식에게 부모가 되는 길을 밝혀주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부모는 동시에 자식이기도 하니까요. 자식이 되는 것에는 공부가 필요 없지만, 부모가 되는 것에는 아주 많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부모가 되기 위한 공부는 부모의 하염없는 자식 사랑에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이 책은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엄마의 사랑만이 부모 사랑을 대표하지는 않습니다. <나비를 잡는 아버지>(현덕/길벗어린이)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대신해서 마름(남의 땅을 빌려서 다른 사람이 그 땅에서 농사짓도록 해 주고 관리하는 사람) 집 아들에게 바칠 나비를 잡으러 뛰어 다닙니다. 마름 집 아들은 아들과 동창이라 자식뻘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아들의 자존심에 상처라도 입힐까 봐 아버지는 아들 몰래 직접 나섭니다. 겉으로 요란하게 표현하지는 않아도 자식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물겹습니다.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작품도 있지요. 셸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과나무는 소년에게 평생 자신의 모든 것을 내줍니다. 사과나무를 그저 인간이 막무가내로 파헤치고 베어내는 자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 학생들조차 책을 덮고 나서 부모를 떠올릴 정도로 사과나무는 부모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부모의 사랑이 나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식의 이기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뭔가 얻어 가려 할 때에만 사과나무를 찾아오고 필요 없을 때에는 가까이 오지도 않는 소년은 영락없이 철부지 자식의 모습입니다. 
  엄마의 변함 없는 사랑, 아빠의 보이지 않는 사랑, 그리고 희생적인 부모의 사랑. 가만 보면 책 속에서의 부모는 서로 다른 사람인데도 모두 같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마음을 갖고 있는 쪽은 자식이군요. 엄마의 마음을 그대로 이어받아 멋진 부모가 되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뒤늦게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가슴아파하는 자식이 있고(<나비를 잡는 아버지>), 너무하다 싶을 만큼 부모에게서 빼앗기만 하는 자식이 있습니다(<아낌없이 주는 나무>). 우리는 부모 앞에 어떤 자식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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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보 까보슈 - 3단계 문지아이들 3
다니엘 페나크 글, 마일스 하이먼 그림, 윤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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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를 보면 헷갈립니다.
  얼마 전 <마음이>라는 영화를 봤을 땐 '마음이'(개) 때문에 가슴이 얼마나 뭉클했는지 모릅니다. 달릴 때마다 날리는 북슬북슬한 털과 새까만 두 눈이 따뜻했습니다. 주인공을 보살펴주는 모양새가 엄마 같은 개였지요.
  요즘 들어 힘없는 아이들을 물어 죽인 개 얘기가 신문이나 방송에 자주 나옵니다. 그 때마다 엄마들은, 개를 만나면 등을 보이지 마라, 개보다 키를 낮추면 안된다더라 하며 당부를 하십니다. 이럴 때 개들은 주인도 몰라보고 은혜도 모르는 흉악한 짐승이 되어 버립니다.
  진돗개 같은 영리한 개 가운데에는 요즘도 멀리 떨어진 주인을 찾아 수십 킬로미터를 달려오는 녀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식용으로 길러지는 개들은 비좁은 철창 안에서 사람들에게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몸부림칩니다.
  그렇다면 개들은 나면서부터 사람을 좋아하고 충성스러운 개와, 사납고 사람에게 공격을 하는 개로 갈라지는 것일까요? 개들은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는 개, 사람과 함께 살 수 없는 개로 나누어지는 것일까요?
  <새끼개>(낮은산)에서 개는 사람들한테서 버려집니다. 그것도 우리 주변의 이웃 아주머니와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에게서 말입니다. 귀엽다고 데려가 놓고는 애교도 안 떨고 시끄럽게 짖어댄다고 싫어합니다. 엄마가 개를 버렸는데 아이들 역시 개를 찾지 않습니다. 곧 다른 개를 데려다가 귀여워할 뿐입니다.
  <새끼개>에서의 개는 쓸쓸하게 죽어가지만, 개의 마음은 끝끝내 아이들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개는 개일 뿐 사람의 말을 할 수 없으니까요. 여기서 개와 사람 사이의 가장 큰 문제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이라는 점입니다. 개는 개의 눈과 귀로 사람을 판단하고, 사람은 사람의 눈과 귀로 개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개와 사람이 서로 맞지 않아 우울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같은 작가가 쓴 <어미개>는 완전히 다른 내용입니다. 개와 사람이 평생 함께 사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는 개와 사람이 너무나 닮았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면서도 함께 살지 못해 외로워하며 개와 사람이 의지하고 삽니다.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죽음까지 함께 합니다. 개와 사람이 그저 눈길만으로 서로의 생각을 읽습니다. 개가 없었다면 주인공 할머니가 얼마나 고달팠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보통, 사람이 개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집니다. 그런데 개와 사람이 친구처럼 맺어질 수도 있습니다. 말로만 친구로, 식구로 여기는 게 아닙니다. 나가고 싶을 때 마음대로 나갔다가 보고 싶으면 돌아오고, 간섭하지 않으면서 걱정해 주다가 잘 맞지 않아 다투기도 하는 친구 말입니다. <까보 까보슈>(문학과 지성사)에서 개는 제멋대로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걸으면서, 전에 못된 주인이었던 소녀를 진짜 친구로 길들이는 장면에서는 현실 속의 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실감이 납니다. 혹시 개를 훈련시킬 때 개의 입장에서는 사람을 길들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요? '귀엽게 쳐다보며 꼬리를 흔들면 먹을 것을 줘라!'라고.
  여전히 개를 보면 헷갈립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렇겠지요. 1∼2만 년 전에 이미 사냥개가 존재했다고 하는데, 개와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는 개, 사람과 함께 살 수 없는 개'로 구분하는 것이 왠지 개들에게 미안한 생각을 갖게 하는군요.
  개들이 저희들끼리 모이면 이런 얘기를 나누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개1 : 야, 오늘 1803호 새로 이사왔는데 그 집 아줌마가 날 보더니 소리를 지르더라.
개2 : 그래? 보나마나 '개 싫어하는 사람'이구나. 조심해. 지나다가 만나면 발로 찰지도 몰라.
개1 : 그러게 말야. 전에 살던 사람들은 '개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앞으로 불편해지겠어.
개2 : 알지? 그런 사람 앞에서 기죽으면 안돼. 무조건 이빨 드러내고 짖어. 머뭇거리면 그 쪽에서 먼저 폭력을 휘두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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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브라이 뒹굴며 읽는 책 4
마가렛 데이비슨 글, J. 컴페어 그림, 이양숙 옮김 / 다산기획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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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둘로 나누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남자와 여자, 남과 북, 왼쪽과 오른쪽, 천재와 바보, 가난과 부, 물과 불……. 어떤 것을 기준으로 두느냐에 따라 똑같은 세상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눠진다. 그렇게 나뉘는 가운데 심각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자리잡기도 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란 나눔은 얼마 전까지 '비정상인과 정상인'이라는 무서운 잣대로 불리기도 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나누는 사회는 장애인이 햇빛 아래 나가 자유롭게 산책을 할 수 있게 하며, '비정상인과 정상인'으로 나누는 사회는 장애인을 어두운 다락방에 가둬 놓게 한다. 눈과 귀와 팔 다리가 두 개씩이며 남들 달린 자리에 똑같이 달려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만 다르면 괴물 취급을 하고 손가락질과 돌팔매질까지 했던 시절이 있었다. 오죽하면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는 장애인이 살지 않는 줄 알았을까. 장애아를 둔 부모가 세상의 눈이 두려워 자기 자식을 창피하게 여기고 집 밖으로 내보내기조차 꺼려했기 때문이다.
  옛날이야기 <반쪽이>(보림)에서 눈도 한쪽 귀도 한쪽, 팔 다리도 한쪽씩 그야말로 반만 갖고 태어난 '반쪽이'가 비장애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괴력을 보여준다. 초등학교 1학년쯤인 아이들은 깔깔거리고 웃으며 읽지만, 반쪽이를 업신여기고 미워하는 형들의 눈이 실제로 장애인을 보는 사람들 눈과 같다는 걸 느끼면 씁쓸하다.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아직까지도 '비정상인과 정상인'으로 구분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장애인을 위해 조금씩 바깥 세상으로의 통로를 열어 주는 일이 드물지 않다. 그와 더불어 장애 극복 이야기가 한동안 인기 동화 주제로 떠올랐었다. <루이 브라이>(다산기획)는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다른 시각장애인을 위해 점자를 발명하는 실존인물을 그렸다. 죽어가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하는 모습에서 남에게 의존만 한다고 생각했던 장애인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루이 브라이가 실존인물이기 때문에 더욱 장애인과 가까워지기 힘든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위인이지 보통의 장애인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잔다르크가 될 수 없듯이 모든 장애인이 루이 브라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따금 TV에서 엄청난 시련을 이겨내고 성공한 장애인이 나오지만 그것은 평범한 장애인을 두 번 상처받게 하는 것이다. 하늘의 별을 따와야만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애 이야기는 좀 더 가까이 다가와야 한다. 괴물도 아니고, 영웅도 아닌 우리 친구 이야기로 말이다. <가방 들어주는 아이>(사계절)에서 주인공은 장애인 영택이가 아니라 비장애인 석우이다. 억지로라도 영택이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석우는 영영 영택이의 아픔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친구도 되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 속의 사람들이 느끼는 그 만큼 석우도 영택이를 그저 딴세상 사람처럼 대했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당부로 시작된 부대낌은 결국 두 사람을 '그냥' 친구로 만들어 주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눈이 장막을 걷고 드디어 해맑아진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여동생이 있습니다>(중앙)에서는 장애인과 피를 나눠 태어나 늘 함께 살아가는 피붙이의 정이 나온다. 그리고 남다른 눈을 읽을 수 있다. 그저 형제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동정심에서 안타까워하는 게 아니라, 함께 살면서 다른 세상을 느끼는 아이의 아름다움을 같이 봐 주는 눈. 소리를 듣지 못해도 다른 감각으로 소리를 느끼는 동생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마음.
  아직도 일부 학부모들은 자식이 다니는 학교에 장애아가 함께 다니는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한다. 그러나 부모의 시각에 날이 설수록, 아이들의 생각은 장애 수준이 되어간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자신과 같지 않다고 밀어내고,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로 되돌아오는지 생각해 보길 바란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다르다'는 말을 '틀리다'라고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 또한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과 일맥상통하다.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다를 뿐 장애인이 비정상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지 않으면 앞으로도 '우린 달라요'를 '우린 틀려요'라고 어리석은 표현을 아무 생각 없이 하고 다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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