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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트
아네 카트리네 보만 지음, 이세진 옮김 / 그러나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이제 노년이 되어 평생을 지속해온 일을 정리하고 그만두려는 의사가 있다. 그는 정신과 의사로서 수십년을 지내오며 수많은 환자들을 진료해온 베테랑이다. 환자들을 향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던 그는, 이제 그만 일을 그만두고 남은 여생을 보내려 한다. 그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의사로서의 삶을 별탈 없이 마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차 있어 환자들을 대할 때도 자신의 매뉴얼을 따라 진행하고 진료가 끝날 때마다 남은 진료 횟수를 세곤 한다. 이제 편하게 살 여생만 바라보는 노년의 의사에게 어느 날 갑작스러운 환자 한명이 찾아온다. 이 환자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정신과 의사로서 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관찰과 치료가 필요하다. 그래서 소설 속의 이 의사는 자신을 갑작스레 찾아온 환자에게 자신이 곧 퇴직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사실 말하지 않은 속마음에는 더 이상 장기치료로 인해 환자로부터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크기도 했다. 의사는 갑작스레 찾아온 환자에게 치료를 맡을 수 없다고 강조하며 돌려보내려 하지만 의문의 환자는 말을 듣지 않는다. 하지만 의문의 환자는 끝끝내 이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만다. 바로 의사의 비서인 쉬뤼그 부인이 의사의 동의 없이 진료 의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쉬뤼그 부인은 30여년간 의사의 비서로서 충실히 의사의 업무를 도와 병원이 운영되도록 도왔다. 그래서 의사는 쉬뤼그 부인을 신뢰하며 그녀의 의사를 늘 존중했지만 이번의 결정은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치료를 약속한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의문의 그 환자는 마침내 의사의 진료실에 찾아와 의사에게 자신의 치료를 맡긴다. 의사는 어떤 환자인지 지난 진료 기록을 검토하며 파악해간다. 그녀는 과거에 자살 시도를 했을 만큼 위험한 상황에 놓인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 의사는 내키지 않는 진료였지만 이미 시작된 이상 이 환자의 마음 속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이 환자의 이름은 아가트 지메르만이다. 아가트는 의사에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와 그동안 억눌러온 고통을 의사에게 진솔하게 털어놓는다. 의사는 아가트의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에는 매뉴얼에 따라 반응할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가트를 치료하는 의사는 자신이 아가트로부터 내면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아가트가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고통스러운 일을 고백하고 현재의 아픔을 이야기할수록 의사는 의사로서의 치료적 개입보다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는 순간이 오고는 한다. 분명 아가트를 치료하는 사람은 이 의사이지만 이제 의사라는 직업을 내려놓는 노년의 의사의 심경에 잔잔한 물결로부터 큰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은 다름아닌 아가트였다. 의사와 아가트는 치료자와 내담자로 만났지만 서로에게 삶의 여백을 메워주는 존재가 되어간다.
의사는 얼마 남지 않은 의사 생활을 마무리하는 시기에 특별한 환자를 만나 자신의 의사로서의 삶을, 그동안 일에 매달리며 외면해온 숨겨진 진실들을 마주하며 의사인 자신도 스스로를 알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의사는 긴 의사 생활을 정리하며 주변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고 자신의 삶의 일부를 차지해온 쉬뤼그 부인에 대한 심경과 이웃집 장애를 가진 남자에게 관심을 가지며 보다 인간적인 내면의 변화를 겪게 된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아가트가 있었다. 아가트와의 만남은 의사가 노년의 삶의 변화를 느끼도록 하는 계기였다.
소설을 끝까지 다 읽으며 느낀 점이라면 이 소설은 역시 소설이기에 이러한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정신과 의사와 환자라는 비수평적 치료 관계에서 의사와 환자가 심경의 변화가 올만큼 가까워진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 소설의 난해한 개연성에도 허구이기에 감안하며 읽었다. 노년의 의사에게 마지막 환자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고 소설로서도 어려움을 느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읽으며 소설 속의 인간 존재에 대한 여러 실존적 고민들을 다시 한번 곱씹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잔잔한 여운이 남는 무겁지는 않지만 깊이가 있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