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암실문고
마리아 투마킨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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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인간이 선명해질 때까지 바라보기

마리아 투마킨, 서제인 옮김,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을유문화사, 2023)


불가능한 이해를 시도하기 위해

망가진 기억의 저편으로 걸어가는 여정

마리아 투마킨의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이 을유문화사의 암실문고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소련 하르키우(현재 우크라이나에 속함)에서 태어난 작가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하여 다양한 사회 문제와 인간 내면의 수수께끼를 탐구하였다. 2018년에 해외에서 먼저 출간되었던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이 전미 비평가 협회상 비평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는 등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가끔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타인의 고통에 관해 들었을 때 ‘나는 너를 이해한다’라는 식의 말을 한다고 해도, 타인의 고통의 실제적인 고통과 아픔 그리고 이후의 여파까지 체감하여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아예 시도조차 될 수 없는 미지의 감각일지도 모른다. 최근 팬데믹을 지나며 많은 예술 작품 혹은 사회의 태도에서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를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고통을 많이 겪는 약자를 공감하고 이해하여 더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에서 말이다. 약자를 이해해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식의 생각에서 비롯된 행위일 것이다. 하지만 이해를 시도하고자 하는 사람 중에서 정말 그들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거나 고통 이후의 세계에 발을 디뎌 피부로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이해하고자 하는 행위나 연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약자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껴 손을 건네는 전형적인 부르주아의 호의는 아닐까? 이해는 시도와 동시에 결례와 오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그 이해조차 ‘이해해 주려는 사람’이 섣부르게 베푸는 호혜”(책소개)일 수 있다고 한다. 정확히는 타인을 향한 태도로서는 합당하지만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는 아름다운 결말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이해는 환상에 가깝다고 언급한다. 그러기에 계속해서 시도하고 실패의 벽에 머리를 박으면서도 기어코 시도하는 실패-움직임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한다.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저자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 대화하여 듣게 된 고통을 어떤 고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고통을 들은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보여주는 고통 그 자체는 어딘가 뒤틀려있고 평생 평평해질 수 없는 망가진 땅처럼 보인다. 뒤섞이고 망가져 어떤 이야기는 먼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도착하는 혹은 도착할 수 없는 미래의 이야기처럼 먼 곳에서 고통이 기다리는 듯하다. 고통을 겪는 사람은 끝이 고통인 그 길을 계속 걷게 된다. 저자는 그 걸음에 함께하며 그저 듣고 이해되기 전의 고통과 사건을 통해 한계 없는 슬픔을 목도한다.

이것은 태어난 환경이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치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운명이 어떻게 세대를 건네 이어지는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다시 말해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 부모로서의 고통, 슬픔 학대(당한 것이든 가한 것이든), 무관심, 손에 쥔 채 건네 주지 않은 애정, 마치 탱크처럼 자식의 삶을 밟고 올라가 터뜨려 버리기.

「역사는 반복된다」 중에서

저자는 자신이 이주한 오스트레일리아를 중심으로 다양한 국가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사회 문제를 다루면서 그 문제에 피해를 받은 사람들과 대화한다. 자살 생존자, 마약 중독자, 홈리스, 전쟁 이민자, 나치 집단 수용소 생존자, 가정 폭력 피해자 등 많은 당사자의 증언은 사회에서 밝혀진 것들과는 조금 다르다. 이유 없이 자살하거나, 홈리스를 도왔지만 그를 사망케 한 사건이 일어나고 아이들은 나치 정체성을 배운 적도 없는데 배워버린다. 사회에 나타나는 다양한 통념들이 뒤섞이고 전복된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을 분류하고 통합하는 사회 제도가 실패하는 지점들을 보여주며 암담함을 직시한다. 고통을 겪는 이들은 ”커다란 요트나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 왜냐고? 난 어디에 가든 진심 어린 환영을 받지는 못할 것.“(「내게 일곱 살이 되기 전의 아이를-」) 같아서 점점 침잠하고 상징체가 되어가는 약자가 되어간다.

한 인간의 내면을 추적하기란 힘든 일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이의 다른 면을 목격했을 때 우리는 충분히 당황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한 인간은 다양한 파편으로 이루어진 깨진 거울 같아서 들여다볼 때마다 다른 표정을 볼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글의 구조 자체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타인의 마음의 복잡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복잡함은 누군가를 이해하기 전에 이미 구성되어버린 것이어서 이해를 거부하면서 발생한다. 그래도 저자는 왜곡하지 않고 들여다본다.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는 꽝꽝 언 호수 위에 선 사람처럼 말이다. 그것이 언제 깨질 줄 모르고 오도 가도 못하는 한 사람이 여기 있다.

언젠가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는 것을 포기했을 때, 나는 한 사람의 깨진 면 전체를 멀리서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균열을 세세하게 들여다볼 수 없음을 인정하고 어떤 방식으로 깨져 있는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부터 저자가 말하는 이해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주하기 어려운 것을 마주하는 것, 이해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 그 앞에는 표지의 무거운 돌처럼 커다란 벽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을 것이다. 흐린 세네카처럼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을 멀리서 보일 때까지 바라보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이해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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