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자신이 이주한 오스트레일리아를 중심으로 다양한 국가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사회 문제를 다루면서 그 문제에 피해를 받은 사람들과 대화한다. 자살 생존자, 마약 중독자, 홈리스, 전쟁 이민자, 나치 집단 수용소 생존자, 가정 폭력 피해자 등 많은 당사자의 증언은 사회에서 밝혀진 것들과는 조금 다르다. 이유 없이 자살하거나, 홈리스를 도왔지만 그를 사망케 한 사건이 일어나고 아이들은 나치 정체성을 배운 적도 없는데 배워버린다. 사회에 나타나는 다양한 통념들이 뒤섞이고 전복된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을 분류하고 통합하는 사회 제도가 실패하는 지점들을 보여주며 암담함을 직시한다. 고통을 겪는 이들은 ”커다란 요트나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 왜냐고? 난 어디에 가든 진심 어린 환영을 받지는 못할 것.“(「내게 일곱 살이 되기 전의 아이를-」) 같아서 점점 침잠하고 상징체가 되어가는 약자가 되어간다.
한 인간의 내면을 추적하기란 힘든 일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이의 다른 면을 목격했을 때 우리는 충분히 당황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한 인간은 다양한 파편으로 이루어진 깨진 거울 같아서 들여다볼 때마다 다른 표정을 볼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글의 구조 자체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타인의 마음의 복잡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복잡함은 누군가를 이해하기 전에 이미 구성되어버린 것이어서 이해를 거부하면서 발생한다. 그래도 저자는 왜곡하지 않고 들여다본다.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는 꽝꽝 언 호수 위에 선 사람처럼 말이다. 그것이 언제 깨질 줄 모르고 오도 가도 못하는 한 사람이 여기 있다.
언젠가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는 것을 포기했을 때, 나는 한 사람의 깨진 면 전체를 멀리서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균열을 세세하게 들여다볼 수 없음을 인정하고 어떤 방식으로 깨져 있는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부터 저자가 말하는 이해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주하기 어려운 것을 마주하는 것, 이해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 그 앞에는 표지의 무거운 돌처럼 커다란 벽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을 것이다. 흐린 세네카처럼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을 멀리서 보일 때까지 바라보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이해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