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 구원받는다는 것 - 삶을 파괴하는 말들에 지지 않기
아라이 유키 지음, 배형은 옮김 / ㅁ(미음)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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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말이 우리를 아낄 수 있도록

아라이 유키, 배형은 옮김, 『말에 구원받는 것』(ㅁ, 2023)

사회를 흔드는 빈약한 언어에 맞서는
존엄한 말의 힘에 관하여


아라이 유키의 『말에 구원받는 것』이 ㅁ(미음)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2021년에 말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고찰한 『말에 구원받는 것』이 일본에서 출간된 뒤 한국에서 올해 출간되었다. 아라이 유키는 문학 연구가이며 소수자의 자기표현법과 장애인의 사회 활동을 연구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타인을 깎아내리는 말이나 자신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말들에 익숙해졌다. SNS 댓글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계속되었다. 사회는 점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괴된 것처럼 보이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넘쳐흐르는 자극적인 말과 태도에 있어 더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타인을 대한다. 이러한 삶의 형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서로의 존엄을 해친다고 해서 자신의 존엄이 올라가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행되는 폭력의 말들은 그러지 않는 이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끼쳐 사회를 병들게 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언어 사용에 있어서 의문이었고 해결할 수 없어 사람을 포기했던 적 있었다. 나라도 조금 더 폭력적이지 않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폭력적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순 없어도 내가 타인을 파괴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쉬웠다. 나의 말이 타인을 깎아내리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 점에서 아라이 유키의 『말에 구원받는 것』은 나의 기나긴 의문에 어떤 답변을 들려주었다.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파괴된 언어와 사회를 돌이킬 수 있는 언어의 힘을 보여준다. 이것은 말을 믿는 자의 태도일 것이다. 빈약한 언어가 축적될 때 끔찍해지는 사회를 들여다보고 지금 여기에 ‘없는’ 언어를 불러온다. 그 언어는 회복과 구원의 말이 세상에 여전히 존재함을, 존엄 가득한 언어가 사회와 존재를 살릴 수 있다는 가능성과 힘이 있음을 증명한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갈라 나누고 몰아세우고

입 다물게 하는 사회는 누구에게나 ‘살기 힘든’ 사회임에 틀림없다.

그런 사회가 ‘살기 편하다’면 그런 ‘살기 편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야말로

도리어 비참한 일이다.

「마이너스 감정을 처리하는 비용」 중에서

나는 어떤 현상이 벌어진 것에 대한 잘못을 나에게 버릇처럼 묻곤 한다. 그것이 나의 잘못이든 아니든 ‘나는 왜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는가’라는 생각 앞에서 나는 작아지고 어떠한 말을 할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된다.

세상에는 엄격한 잣대가 있고 그 잣대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일수록 가벼워진다. 가볍게 다루는 사람일수록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간혹 인터넷 댓글을 보면 어떤 잘못을 개인에게 집중적으로 전가하고 욕한다. 물론 개인의 잘못일 가능성이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회 문제’를 ‘개인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을까? 책에서는 ‘육아’, ‘돌봄’ 등과 같은 문제를 여성의 ‘개인 문제’로 치부하는 현상에 관하여 물음을 던진다. 이러한 예처럼 근본적으로 무엇이 정말 ‘문제’인지 정확하게 봐야 한다. 무분별하게 타인을 향해 잣대를 들이미는 폭력적인 태도 또한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되물어야 한다. “자신이 어쩔 수 없이 힘든 일을 겪게 되었을 때 ‘내가 나를 죽이지 않기 위해 필요한 말’은 어느 쪽”일지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 그런 뒤에 말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강권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

우선 누군가에게 ‘쓸모없다는 낙인’을 찍는 데 망설임이 없어진다.

다음에는 낙인 찍힌 사람들을 박해하고 배제하고 입 다물게 한다.

입을 다물린 뒤 이번에는 거꾸로 말하게 한다.

‘이렇게 말하면 동료로 받아줄 수도 있다’는 태도를 취하며 ‘강제’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말하게 만든다.

‘‘강제로 말하게 한 사람’의 책임은 이런 식으로 사라지고

‘자발적으로 말한 사람’만이 상처받는다.

「나라를 위한 쓸모가 없었던 사람」 중에서

‘쓸모’를 다하는 삶은 기구하다. 자신의 ‘쓸모’를 사회의 규범에 맞추어 삶을 재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 사람의 몫을 다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배웠고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내가 사회에 합당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나의 상처를 늘리는 방식으로 살아왔다는 점에서 충격받지 않을 수 없었다. 믿음이 부정당한 것보다 폭력이 삶의 태도에 깊숙이 들어왔다는 것을 자각조차 못 했다는 것이 더 충격적이었다.

이러한 ‘쓸모’를 요구하고 타인을 공격하는 언어는 “높은 사람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신의 허상을 부풀리기 위해, 적을 만들어 걱정을 해소하기 위해, 누군가를 위압해 입을 다물기 위해” 쓰인다. 약자는 사회가 자신을 파괴하고 있음조차 알지 못한 채 고갈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약자인 본인도 누군가에게 어떤 ‘쓸모’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사회의 메커니즘 속에서 약자가 이러한 폭력을 마주하고 폭력 속에서 상처받는 약자를 마주하고 서로가 연대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약자가 약자를 생산하는 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언어는 무력하다고, 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글을 놓은 적이 있다. 그때의 나는 사회의 합리주의적 사고에 몰두하고 있었고 스스로 손목에 상처를 내듯 살아갔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에게 사랑을 보여줘서, 그 사랑이 문을 열고 눈밭을 달려 나가는 개처럼 스스로 나아가고 주변을 믿는 힘을 보여줘서 나는 다시 언어의 힘을 믿게 되었다.

「격려를 포기하지 않기」에서 문학자인 저자가 어떤 환자가 쓴 시를 보며 생각하는 대목이 있다. 여기서 저자는 말의 힘에 관해 말한다. “적어둔 말로 남겨두면 언젠가 누군가가 친구를 생각하며 친구를 위해 기도해줄지도 모른다.”면서 말이다. 무용한 언어의 힘은 자각할 때 그 무엇보다 강력해진다.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일수록 언어의 힘을 믿어야 하고 그 힘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분량 상의 이유로 더 쓰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이것으로 마친다. 정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읽고 고민하고 서로를 환대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바람과 바람이 만나 현상으로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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