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보다 Vol. 1 얼음 SF 보다 1
곽재식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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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학과지성사의 새로운 단행본 시리즈 『SF 보다ㅡVol. 1 얼음』의 가제본을 운이 좋게도 읽어보게 되었다.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두었기에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아주 작고 날카로운 얼음조각이 옷 안으로 들어간 것만 같았다. 처음엔 살을 긁듯 독자를 사로잡지만, 읽을수록 얼음을 가까이 두게 된 나의 온도를 생각하게 된다. 투명한 얼음 같은 작품을 들여다보며 나는 녹일 수 있고 깨트릴 수 있고 손을 차갑게 해서 최대한 느리게 녹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은 그저 얼음처럼 투명하게 품을 연다. 다양한 각도에서 얼음의 형태와 질감 등을 관찰할 수 있어서 좋았다.

「얼어붙은 이야기」 / 곽재식

"인생이 길지 않잖아요. 수십억 년 된 행성과 별들이 지내오는 시간에 비하면 백 년쯤은 잠깐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나마 넓디넓은 우주의 한 귀퉁이에서 수십억 명이나 되는 사람 사이에 부대끼며 보내는 삶이거든요. 그런데도 그게 굉장히 귀중하다는 생각은 또 있어요. 아까 우리가 이야기했던 대로, 이런 삶 하나를 위해 은하계 몇 개를 희생해도 된다고 생각하기도 하거든요."

「얼어붙은 이야기」 / 곽재식

화자는 자신을 소설의 등장인물이라 소개하며 소설은 시작된다. 상황은 트럭에 치이기 전 시공간이 멈추고 외계인 "생사귀"가 등장해 화자와 이야기를 나눈다. 화자가 어떤 상황인지 "생사귀"에게 전달하며 소설 초반에 제시한 떡밥을 회수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독자를 향해 농담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소설은 화자가 삶의 대부분을 알고 있다는 말을 의식적으로 하며 독자의 상상을 제한한다. 제목처럼 이야기를 얼어붙게 하는 작가는 제한된 이야기가 독자에게 끼치는 영향에 관해 말하려고 이러한 방식으로 소설을 쓴 건 아닐까 생각했다. 읽다 보면 작가가 만든 길을 의심할 새도 없이 이끌려 가게 된다.

「채빙」 / 구병모

그리고 사한도 현명도 아닌 이것을 망설임 없이 폐기하기를. 혹여 당신들의 후속 연구에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감만으로 나를 이 진절머리 나는 세상에 붙들어놓지 말기를. 공허한 단어와 무용한 진실들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주기를.

「채빙」 / 구병모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얼음이 녹으며 인류는 사라지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고, 남은 인류는 물에 잠긴 현대 문명을 뒤로하고 다시 기술이 없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 주인공은 사람들이 채빙을 하러 온 곳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존재로, 배경지식은 있고 생각은 가능하지만, 자신이 누군지조차 모른 채 수호신처럼 사한 또는 현명으로 불리며 추앙받는다. 소설을 읽으며 누군가가 자신을 규정하려 하고 그것을 오랜 시간 견뎌온 존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이질적인 아름다움이 아닐지 생각했다. 이질적인 아름다움이란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이 사라져도 마음 한편에서는 자리하고 있는, 냉동실 속 작은 눈사람 같은 것.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이 두 소설은 가장 먼저 나오는 두 소설이기에 먼저 소개해 보았다. 나머지 소설들도 귀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가득해서 많은 독자들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선보이는 투명한 얼음을 자신의 방식으로 쥐고 느끼고 관찰하는 기회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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