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좋아해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좋고, 젖은 나무 곁에 잠시 서 보는 것도 좋아합니다. 저는 여고를 나왔는데 지금도 여름 장맛비 끝날무렵에 친구랑 비에 젖어가면서 플라타너스 심어진 길을 걸었던 기억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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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낮은 곳에, 언제나 더 낮은 곳에 물은 스스로를 자리한다. 그래서 나는 바라본다. 언제나 내리깐 눈으로, 바닥이라도 되는 듯한, 바닥의 일부라도 되는 듯한, 마치 바닥이 바뀌기라도 했다는 듯한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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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필의 힘은 언제나 나를 압도한다.
서울 남산 아래에 있는 ‘문학의 집‘ 에서 문인들의 육필 전시회가 열린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본 소설가 김주영 선생의 원고가잊혀지지 않는다. 그분의 원고는 원고지 칸을 또박또박 채운 게 아니라,백지의 여백을 빈틈없이 메운, 무슨 추상화 같은 느낌으로 처음에다가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백지를 메우고 있는 것은 정말 깨알처럼 촘촘하게 들어박힌 글자들이었다. 글자 하나가 얼마나 작은지, 개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형상에 다름 아니었다. 평소에 선생은 매우 호탕한 성품의 소유자로 알고 있었는데, 작업에 들어가면 저리 꼼꼼한 ‘좀팽이‘의 글쓰기를 하시는구나싶어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 작은 글자 하나마다.
혼을 불어넣으며 글쓰기에 임했을 시간을 생각하니, 그 육필 원고앞에서 나는 저절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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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는 심마니처럼 길 없는 곳, 아니
길 아닌 곳만 찾아다니고 싶었었다. 지금
또한 여전히 그러한 도정 속에서 완전히 벗
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길을 내는 일, 그런
시간이 내게 온다면 내 유치한 재능도 별반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창밖의 구름떼가 어
느새 제자리를 걷어차고 내 어리석은 눈조
리개를 비웃고 있다.


1995년 겨울
성 윤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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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다는 것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수원은사시나무 한그루가 쓰러지고
나무 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 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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