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은 어디에나 트리플 20
임선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선한 조합과 엉뚱한 상상력에 매료되어 읽다보면 슬픔으로 뒤덮인 마음 한 구석이 어느새 따뜻한 노랑빛이 스며든다.

<초록은 어디에나>는 자음과 모음 트리플 시리즈의 스무번 째 책이자, 2019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활동을 시작한 임선우 작가의 두번째 소설집이다.

전작 <유령의 마음으로>도 호평이 가득하던데, 이 두편의 소설집으로 매니아층 독자들을 끌어모을 매력이 충분하신 것 같았다.?


/////


세 편의 이야기는 결코 일상적일 수 없는 독특한 상상력으로 '만남'에 대한 우리의 관습화된 현실을 뛰어넘어, 잠겨있는 우리의 생각을 딸깍하고 열어주고 이상하게도 그 속에서 피어난 따스함이 우리를 마주하게 한다.


1. 초록 고래가 있는 방
낙타는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물 냄새도 맡을 수 있는 동물이잖아요. 먼 곳에 있는 물의 존재를 알고 있으니, 막막해 보이는 사막을 계속해서 걸어나갈 수 있는 거고요. 그런데 몇 킬로미터 내에도 물이 없을 때, 물의 그림자조차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을 때 낙타가 무엇을 하는지 아세요? (……) 똑같이 걷는 겁니다. 한 걸음씩. p43

도연은 누수로 인해 윗집을 찾아가지만 사람이 아닌 낙타가 문을 연다. 숨기고 싶은 정체지만 어쩔 수 없이 난처한 낙타의 모습으로 나타난 유미는 남편과 사별후 우울감에 자살을 시도하려다 낙타로 변했다고 한다. 한편 도연은 극본과 연출까지 했던 '초록고래' 란 영화의 참패로 술독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 둘은 누수 공사를 위해 서로의 집을 바꿔 지내며 각자의 비밀스런 사정을 알게 되면서 이해하고 위로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2. 사려 깊은 밤, 푸른 돌
평소보다 강하게 목구멍이 조여왔고, 몇 번의 구역질 끝에 나는 손바닥 위로 돌 한 덩이를 토해냈다. 갓 태어난 슬픔은 언제나 그렇듯 차갑고도 새파랬다. p52

슬프면 눈물대신 푸른 돌을 토해내는 선영은 시들어가는 홍콩야자나무를 밖에 내놓았다가 도둑 맞는다. 확인해보니 이웃집 여자 희조였다. 전직 수영선수였던 희조에겐 도벽이 있었다. 선영은 복수하기 위해 그간 모아둔 슬픔의 푸른 돌을 넣은 선인장을 선물한다. 하지만 선영의 푸른 돌을 받은 이후 희조는 희안하게 훔치고픈 마음은 사라짐을 느낀다. 서로의 슬픔을 공유하게 된 두 사람을 통해 가시화된 물질로 서로의 감정이 교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3. 오키나와에 눈이 내렸어
정말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나는 영하 언니와 나를 발견했다.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둘은 멈춰 서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중 그들이 이틀 전의 나와 영하 언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내 머리를 묶어줄 때 영하 언니는 저렇게 웃고 있었구나. 그 얼굴을 이제야 보다가, 나는 지금이야말로 오키나와에서 눈이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우리들의 짧은 기적. p133-134

주영과 영하는 어느 건물의 1층 편의점과 4층 헬스장의 직원으로 만나, 매일 밤 짧은 10분 동안은 서로에게 안부를 물어준 사이이다. 어느날 영하는 오사카로 금괴를 배달하러 가자고 주영에게 제안하여 둘은 오사카로 간다. 그곳은 주영에게는 축구선수 유망주였던 시절의 향수와 죽은 친구와의 기억이 있던 곳이었고, 연극배우였던 영하에게도 '나'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연기를 할 수 없었던 지난 시절의 자신과 만나게 된다. 비록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채, 상처와 단념을 품고 돌아올 뻔하지만, 영하 언니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지금이 기적이라 생각하며 편안해진다.


/////


초록은 따뜻한 슬픔의 색.
차고 단단한 파랑의 슬픔에
노란빛이 한 줄기 섞인 푸르름.
p137

슬픔이라는게 늘 차갑게만 느껴지는 인식을 세 편의 소설로 그곳에 살짝의 온기를 불어넣어 초록이라 표현해준 임선우 작가의 비현실적 상황도 자연스럽게 와닿는 따뜻하고 사랑스런 느낌이 가득한 소설이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통해, 서로의 슬픔을 무심하게 다독임으로 낙타의 등이 말랑말랑 해지고, 슬픔을 전염시키던 푸른 돌도 녹아내리고, 오키나와에 눈이 내리는 기적같은 일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 같다.

존재를 벗어나는 기적같은 만남,
저마다의 초록을 품은 따뜻한 슬픔의 모습들.
초록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