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문 - 2016년 제40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경욱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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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문(김경욱 외)》은 이상문학상 제 40회 수상작들을 모아 출간한 책이다. 내가 이상문학상 작품들을 읽을 생각이 들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는데. 아마 4월 쯤 서점에서 이 책을 소개 받았을 때에 받았던 어떤 인상이, 10월인 지금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한 순간 뽑아들게 만들었던 거 같다. 어쨌든 자주 읽는 부류의 소설이 아니라, 리뷰도 그냥 내 생각 닿는대로 마구 썼다(나중에 내가 읽고 기억만 하면 되지).

<천국의 문>은 혼자서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여자의 이야기다. 여자의 일생은 부모님의 이혼과 아버지의 병 때문에 자기 꿈도 이루지 못하고 빼앗긴 것처럼 여겨진다. 아빠만 없었다면 자기 일상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자문하는 여자는 아버지를 향한 양립적인 감정(애정, 증오)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한다(그리고 아마 애정은 어린시절의 추억이 아니라 여자가 갖고 있는 도덕성에 근거하는 것 같다). 얼마 안가 아버지가 죽자 아버지가 죽길 바래왔던 자신의 욕망이 실현된 것처럼 느껴져 죄의식을 느낀다. 여자가 느끼는 감정은 과학이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이 해체되고 병으로 고생하는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개인에게 어떤 상처(죄의식)를 남기는지 보여줬는데.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내 인생은 이제 끝났어" 하는 표현이  애정이라곤 전혀 없는데도 씌워진 역할 때문에 죄의식을 느껴야만 하는 상황에 표현하는 것 같아, 지옥불같았다. 여기 어떤 죄인도 없고, 여자도 아버지도 탓할 수도 없는 곳에서, 여자의 죄의식은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획득한 '불편한 사실'인 건가. 

김이설의 <빈집>도 무게감이 확실히 다가왔다. 직장을 그만두고 자기 명의의 아파트를 마련한 수정은 집 꾸미기에 열중했다. 블로그나 인테리어 잡지를 보고 쉽지 않았지만 취향의 인테리어를 고른 후 발품을 팔아 사진처럼 자기 집을 꾸몄다. 36살인 수정에게 아이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집들이에 와선 면박을 주는 친정 엄마를 보며 젊은 세대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삶과 기성 세대의 획일화된 삶이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집만 예쁘면 뭐 해. 이 집 삭막한 거 봐. 저 나이 되도록 애가 없으니까 쓸데없는 데 공을 들이잖아. 그렇다고 뭘 키우는 성격도 못 되지. 어떻게 집에 풀 한쪽이 없냐고. 그런 게 애는 무슨......" - 124 p

집들이를 할 때 마다 수정이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포기하고 아파트에 부족한 물건을 채워넣는 것이 불안해보였다. 

"무언가 계속 사들이는데도 무언가 계속 부족했다. 뭔가 계속 채우는데도 없는 것은 계속 존재했다." - 125 p

수정은 집들이를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아파트 안에서 싸구려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즐기며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러다 문득 나는 혹시 한가롭게 순간을 감상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들은 다 조작되고 만들어진 풍류인 것인가,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아기라든가)이 빠져 있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사실을 속이기 위한 수단인 것인가 하고 묻게 되었다. 무엇이 궁극적인 것인지 질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수정은 자신이 아닌 외부 사람들이 강요하는 역할과 자기 욕구 사이에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위태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읽는 나도 동화되었다. 집에 대한 집착은 컸고, 수정 조차 남편에게 '새 집에 걸맞는 모습'을 요구하는 상태가 되었다. 자기가 꾸민 공간들을 남편이 어지럽히기 시작하자 그 공간들도 보고싶지 않게 되었다. 분명 새집은 수정에게 행복한 여성으로서의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공간이어야 할 터였는데. 수정의 욕심이 지나쳤던 건가. 수정의 내 집 꾸미기가 정말 독단적 욕심이었던 건가? (수정이 보기에) 정체성을 잃은 이 공간을 재정비하기 위해 결국 아기방이 필요한 거란 말인가? 

김탁환의 <앵두의 시선>은 초반의 환상적인 분위기가 뒤에서 현실적이고 암울한 분위기로 바뀌었고.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은 평범한 행복을 얻은 남자에게 미친 정신병자 같은 이웃이 불안과 화가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였다.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은 유럽 여행지에서 마흔을 넘긴 부부가 여행하다 겪는 피로와 낯선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남자는 여행을 전부 지휘하면서 얻는 부담감과 피로 때문에, 자기에게 의존적인(음울한) 아내에게 화를 내버린다. 아내는 기차에서 내리지 않고, 문이 닫히자 기차가 남편을 두고 떠나버린다. (사고로 아이를 잃고) 상막해진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길에 오른 것일텐데, 어쨌든 거기서 여자와 남자는 '로스트(lost)'되었다. 원래도 위태로웠던 것이 여행을 계기로 해서 튕겨져 나간 건가. 아니면 상실의 체험은 어딜 가더라도 몸에 들러붙는다는 것인지. <빈집>과 <누구도 가본 적 없는>에서 가장 많은 질문들을 했다(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문학작품을 읽는 데 큰 재능이 없는지라. 작품을 관통하는 작가의 문제의식이나 문학성을 찾아내는 게 어려웠지만(이게 주로 미스테리 소설을 읽는 내게 부족한 능력인가 보다), 심사위원들의 평을 보며 이해했다. 각 등장인물들에게 깊게 몰입하는 게 즐거웠고, 
어쩔 땐 상황이나 문장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감각들을 그저 폭넓게 받아들이면서 감탄하기도 했다. 정형화하긴 어려워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이면들이 각각의 이야기와 인물들에게서 느껴진다는 걸 새삼 인식했다. 원래 다양한 가능성이 있는 거겠지 하고 납득하는 걸로 마무리지어도 되는 걸까...?


「그때의 내게는 그 정도의 일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태평한 사내였던 것이다.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렸으나 아직 데뷔를 못해 앞이 보이지 않았고,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아내에게 미뤘다는 죄책감과, 칭찬하는 페미니스트들 앞에서는 말할 수 없는 아이 보는 아빠로서의 미묘한 열등감에 매일 시달렸으며, 집 계약 갱신이 다음번에도 전세금 인상 없이 이루어질지 알 수 없다는 사실과, 나날이 줄어가는 통장 잔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큰 걱정이 없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예외 없이 막대한 불안을 강요하고 있었는데, 내 마음에는 그 불안들을 일일이 느낄 여력이 없었다.」 - 225 p (이웃의 선한 사람)

「내가 그걸 챙기라고 하지 않았어? 그는 말했다. 
그 밖에 내가 뭘 더 부탁한 게 있어? 그거 챙기라고...... 가방에 넣으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거 잊지 말라고...... 그냥 그거 하나...... 가방에 다 있잖아. 당신 칫솔, 화장품, 사탕...... 다 있는데 왜 그건 없냐...... 우리 내일 비행기 타야 돼...... 그런데 여권도 영수증도 없어...... 내가 이걸 다 설명해야 해 사람들한테...... 그런데 괜찮을 거라니...... 당신은 괜찮지 걱정이 없지 내가 다 하니까...... (중략)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쉬워 모든게......
그는 문득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서글픈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울화가 치밀어 고개를 저었다. (중략) 그런 식으로 보지 마. 너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내가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 306 p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그녀가 내리기도 전에 기차가 그냥 가버렸다...... 아이 로스트...... 노, 노, 미스드...... 로스트...... 」 - 308 p (누구도 가본 적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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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보는 고헤이지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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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엿보는 고헤이지》를 《웃는 이에몬》에 이어 한참 지나 이제야 읽는다. 《엿보는 고헤이지》는 연기가 아니라 아예 평소 모습조차도 유령같은 배우 '고헤이지'의 이야기로. 고헤이지가 고액의 역할을 제안받아 극단과 함께 떠났다가 그곳에서 참변을 당한 후에, 유령으로 나타나 복수를 한다는 이야기다. 고헤이지의 유령같은 면모는 아내 오쓰카는 물론, 친구 다쿠로, 그리고 미남 간판 배우 가센으로 하여금 정체모를 짜증을 유발시키고. 여기에 도적 운페이, 거짓말쟁이 지헤이 등이 엮이면서 피 튀기는 잔상을 일으키고 만다.  


"교고쿠 나쓰히코가 그리는 인연과 관계의 이야기" 라는 수식어가 결코 틀리지 않은 듯. 등장인물들이 군더더기 없이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렇게 밀도 있는 짜임새를 나는 좋아한다. 인물 모두가 과거에 인연이 있었고 그것이 수면 위에 올라면서 이야기는 클라이맥스로 다가가는 형식이다. 또 이야기 전개 속에서 나타나는 수수께끼들이 다음 장에서 다른 이의 시선을 통해 해결되기도 한다. 그래서 '글'이지만 '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독백을 하는 인물과 장면이 계속해서 변하고 대사와 무대요소들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극'과 가장 다른 특이점은 인물의 감정과 심리에 대한 묘사가 거의 삼 분의 이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는 것. 분명 이 작품을 진짜 '극'으로 올린다고 한다면 많은 각색이 이뤄져야 할 것 같다. 심리 묘사는 《백귀야행 음》이나 《백귀야행 양》에서 사용된교고쿠 특유의 묘사법이 그대로 이용되고 있다. "아무개는 ~~한다." "그러나 ~~ 해봤자 ~~할 뿐이다." "그래서 아무개는~~한다." 정형화된 이 삼단논법(?)에 질리기도 할 법하지만, 그 모든 독백과 같은 심리묘사들이 없었다면 이만큰 전율을 주는 이야기도 성립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납득해버린다. 대사와 상황 설명만으로는 멋진 스토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쓰카가 얼뜨기 같은 남편 고헤이지를 미워하면서도 그와 같이 살고 있는 건 심술 부리고 싶어하는 츤데리 같이 묘한 성격 때문인 것으로 마무리 된다. 오쓰카의 샛서방 다쿠로로 따지자면 여자 꽁무니나 좇으면서도 자기 감정에 솔직해지지 못하고 베짱 없는 사내라 가장 단편적인 인물이다. 사이코패스 같이 이유 없이 사람을 베는 도도로키 운페이나, 그에게 부모를 살해 당하고도 알지 못한 채 유랑 배우가 되었던 다마가와 가센은 중심인물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고조시키는 입체적인 인물들이다. 거짓말쟁이 지헤이나, 등장하진 않은 채 이름만 언급되는 흑막 마타이치 등도 '교고쿠 월드'를 구축하는 재미난 요소이다. 

반면 가장 이입이 어려운 인물은 유령 고헤이지였다. 처음 등장할 때 부터 헛방 장지문 뒤에 앉아 뒤꿈치나 만지작 거리면서 존재 자체가 엷어지고 싶어하는 이 옅은 남자의 심리는, 글로 설명해도 와닿지 않는 부분이 많다. 오히려 후반부에 고헤이지가 지헤이에게 과거사를 토로하는 때가 되어서야 조금씩 그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고헤이지가 다쿠로의 칼에 찔리고도 지헤이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한 후 지헤이에게 진심으로 "오쓰카를 좋아한다" 고 고백하는 장면이나, 집을 습격한 다쿠로 앞에 진짜로 '부활해' 서서는 오쓰카를 지키는 장면 등에서 그를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요컨대 고헤이지도 오쓰카도 '요령'이 없는 거다.

《웃는 이에몬》이나 《엿보는 고헤이지》를 말할 때 꼭 '활극'이라고들 말한다. 어느 장이든 긴장감 넘치고, 결국엔 피가 튀기고, 엄청난 비밀들이 밝혀지곤 한다. 단지 유령 연습을 하고 있던 고헤이지를 목격한 범죄자가 겁에 질려 자기 죄를 스스로 실토하는가 하면. 가센이 고헤이지를 밀어 물 속에 빠뜨리고. 그걸 다시 건져낸 다쿠로가 살인마 운페이와 손 잡고 고헤이지를 베어죽이기도 하고. 해골같은 모습으로 고헤이지가 오쓰카에게 돌아오는 장면 등. 모두 쓰키오카 요시토시의 그림을 상상시키는 푸르고 붉은 분위기들이다. 가센이 에도로 돌아와 운페이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할 때 횃나무 저쪽에서 이미 죽은 고헤이지의 해골 유령이 나타나는 장면에선 문자 그대로 소름이 돋았다. 왜. 다 분위기의 힘인 듯 하다. 그리고 이 분위기는 다른 작품에서도 쉽게 볼 수 없겠지.  괴담은 넘치고 넘칠텐데, 작가가 다시 이런 이야길 쓰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쉬울 뿐. 



「"그러니까. 저런 답답한 사람은 밖에 나와 있어도 눈에 보이는 만큼 부아만 치민다는 뜻이지. 무슨 말을 해도 대답하지도 않고, 무엇을 해도 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멀거니 앉아 있기만 하니까."」 - 19 p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제수씨, 당신도 아시다시피 저기 있는 고헤이지는 유령 연기만은 일품이라오. 괴담 연극에는 빼놓을 수 없는 친구란 말이지요. 이 연기만은 당해낼 수 없다고, 녀석의 스승인 선대 마쓰스케도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더이다."」 21 p 

「다쿠로는 그날을 위해 고헤이지와 사귀고 있는 셈이다. 붙임성도 없고 주변머리도 없으며, 장점도 없고 돈도 없는 고헤이지 같은 사내와 사귀어도 동전 한 닢만큼의 이득도 없다. 재미도 없고 웃기지도 않는다. 아니, 그렇기는커녕 재미가 없어진다. 불쾌해진다.」 - 57 

「비겁하다. 고작해야 유랑 배우,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아닐 텐데. 성인군자인 척한다고 해서 모양새가 나는 신분도 아닐 텐데. 성을 좀 내 보면 어떠냐, 울면 어떠냐. 자신의 잘못은 안중에도 없이 네가 나쁘다, 네가 밉다고 고함치고 소리치고, 그래야 비로소 남녀는 부부가 되는 것이라고-.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 78 p

「"잘 들어라, 잘 들어, 잘 들어, 도로쿠. 네 사특한 마음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룰 수 없다. 분수를 알아야지. 오아키 같은 처녀는 설령 천지가 뒤바뀐다고 해도 너 같은 천치를 좋아하게 되지 않아.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해도 평생 너를 싫어하고, 경멸하고, 사갈 같은 취급이나 하는 것이 고작일 게다. 그렇다면 하룻밤이라도 마음을 이루고-."
죽여 버리려무나.」 - 138 p 

「이번 일은 전부, 아니, 이 공연 자체가 그 범인인지 뭔지를 빠뜨리기 위한 덫이다. 다쿠로이ㅡ 생각에 의뢰를 한 것은 스가야이리라. 그림을 그린 것은 도쿠지로가 말한 사기꾼이다. 고헤이지는, 아니, 이 다마가와 극단 자체가 장기말이었던 셈이다. 자세히는 모를 테지만 어디선가 그것을 감지하고, 이 세상 물정 모르는 다테오야마는 영문도 잘 모른 채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리라. 분하다. 다쿠로는 그런 잔재주를 몹시 싫어한다.」 - 174 p 

「그때 처음으로 가센은 다쿠로가 고헤이지를 때린 이유를 이해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가센이 품은 살의의 정체다. 가센은 그때, 무슨 말을 해도 여전히 공허한 얼뜨기의 눈을,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무것도 연기하지 않는 형평없는 유타를, 어찌 된 셈인지 격렬하게 미워하게 되었던 것이다. 질투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질투보다 훨씬 거무죽죽한 감정이었다. 공포-였을까.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공격을 하는 작은 짐승 같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중략) 아니. 고헤이지에게 아버지를 겹쳐 보고 있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 300 p 

「또 누구 하나 가센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극단의 다테오야마가 고용된 유령 유타를 질투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그것도 그 시체를 환시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시체는 나오지 않았다.」 - 306 p 

「다시 죽임을 당하기라도 하지 않는 한 고헤이지는 살아 있으리라. 왜냐하면 아사카 늪에서 사라졌을 고헤이지의 목숨은-지헤이가 구했으니까.」 - 355 p

「말하자면 지나가던 이에 불과한 지헤이가 왜 이렇게 진지해진 것일까. 아마 부아가 치밀었기 때문이리라. 겨우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고헤이지가, 이대로 그냥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일을 아무래도 참을 수가 없었다.」 - 358 p 

「"고헤이지가 유령이 되어 너에게 나오는 것은 질투를 해서가 아니라, 네가 죽였기 때문이 아니냐."
 - 395 p 

「"내가 너를 유혹한 것은 이, 여기 있는, 내가 참으로 싫어하는." 
오쓰카는 손을 뒤로 돌려 남은 모기장을 움켜쥐었다. 힘껏. 끌어내린다. 모기장이 떨어지고. 
한 치 반의 틈이 나타났다. 소문이 자자한 형편없는 배우, 막을 열 수도 없는 서툰 연기의 연극-. 막은 연 것은-.
"너와 잔 것은 이-고헤이지에게 심술을 부리기 위해서다."」 - 398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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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슈퍼히어로를 깨워라 - 잠자는 행복을 깨우는 긍정심리학의 힘
앤디 코프.앤디 휘태커 지음, 이경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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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자기계발서들이 출간되고, 행복론에 대한 열기도 점차 옅어져가는 기색이다. 최근의 책들은 오래 전 작심삼일의 규칙들을 제시하는 책들과 달리 마음을 다스리고 안정을 찾자는 식의 이야길 하고 있다. 철학적인 논조를 띠며 명상을 추천한다. 《내 안의 슈퍼히어로를 깨워라》 역시 "현재를 즐겨라" 라는 사상을 동양의 것으로 칭하면서 자기계발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에 그치지 않고 진화심리학과 융합시켜 더 나은 현재를 즐기기 위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은 '분주한 삶' 속에서 삶이 사소하지 않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반대로 분주함이 실은 사소하고 무의미한 것들이 과다하다는 걸 포장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앤디는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할지라도 현실에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모두가 리더가 될 수는 없고 모두가 상류층이 될 수는 없다. 각자의 위치와 직업, 역할이 어차피 분배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특정한 위치에 있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루저가 되어야만 하는가? 반대로, 자기계발은 루저가 되지 않기 위해서만 행해지는 일이란 말인가?




물질도 마찬가지이다. 앤디는 많은 사람들이 물질 만능 주의로 인해 머스터베이션(계속해서 소유하고 싶어하는 욕구) 증상에 허덕인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가질 수 있는 양에도 한계가 있고, 나보다 더 가진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아마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이루어낼 수 있는 가장 큰 성공은 지금 그들이 있는 그 자리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성공을 얻기 위해선 자기 일에서 만족을 찾고 묵묵히 전념할 수 있는 태도가 중요할 것이다.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에 앤디는 말할 수 있게 된다.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라는 평범한 진리의 중요성에 대해서. 




사람들은 대개의 자기계발서가 제시하는 지침들을 따라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앤디는 자기계발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 내면 속에 있는 가장 생산적인 상태의 모습을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기 쉽다. 진화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서 경계와 부정심이 필요했고, 그 유전적인 각인은 현대인들에게도 남아있고, 긍정적 태도를 습관화 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우리는 어떤 조건을 이루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끝도 없는 레이스를 달리느라 자신을 혹사하고 현실을 만끽하지 못한다. 우리는 남들의 평가와 기대심리 등에 따라 자신을 엄하게 규제해 버린다. 하지만 삶은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과 같다. 세상은 우리가 바라보는 방식에 의해 결정이 된다. 앤디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현재의 상황과 위치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이라 말한다. 



현재 상태에서 더 나아지는 방법은 되고 싶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10 년 뒤에 자신이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지 생각하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히어로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이 책에선 여느 자기계발서와 다른 '재미'가 느껴졌다. 이유는 저자 앤디가 우리 자신이나 우리들의 삶이 결코 남들보다 낫지 못하며 때론 한심하기 그지 없다는 것을 여과없이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자기가 얼마나 '실천 불가능한 지침'들을 꾸준히 실천해 성공을 이루었는지 자랑만 해대는 자기계발서에는 질력이 난다. 앤디는 차라리 널리고 흔해진 조언들에 자기 이야기를 곁들여 하고 싶은 얘길 하는 책을 내는 방법을 택했다. 자기비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블랙 조크의 명랑함을 간직한 앤디의 말솜씨가 책을 진솔하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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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벌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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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안자이 도모야는 신작 출간을 기념하여, 공들여 구입한 산장에서 자축을 하고 있다. 여자친구인 작가 유메코와 함께 와인을 마시다 잠들고 일어난 그의 귀에 노랑벌이 날개짓하는 섬뜩한 소리가 들려온다. 고작 말벌 따위에 위협을 느끼고 필사적으로 대항하는 주인공. 사실 이건 과거에 말벌에 물렸을 때 의사로부터 한 번 더 물리면 지나친 알러지 반응(아나필락시스) 때문에 쇼크사 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어딜 가든 다섯 마리 정도씩 무리지은 큰 말벌들이 그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한다. 많이 알아서 병이지. 이 남잔 말벌에 대한 지식을 쌓았기 때문에 그 공포를 안다. 남자는 눈 내리는 고립된 산장 속에서 말벌에게 땀이 비져 나오는 공포를 느끼며 생명을 건 사투를 벌인다. 고작 말벌과....  

역시 명저자 기시 유스케의 작품은 소재 선택과 공간 구성이 남다르단 생각이 들었다. 의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고작 말벌 따위가 주인공에겐 살상 무기와 같은 존재가 되도록 상황을 상정한 후 곤충 호러 장르에서 볼 수 있는 공포감을 재현하려 한다. 눈 덮이고 통신 수단이 전부 해체된 밀폐된 산장은 주인공의 숨을 조이는 공간적 기능을 한다. 또 알러지 반응을 억제하는 '에피펜' 해독 주사 하나를 최후의 보루로 믿고 중무장한 채 말벌과 대적하는 모습은 마치 좀비 영화 같은 구도를 보여주는 듯 하다. 자신이 쓴 문학작품들의 줄거리에서 힌트를 얻어 말벌과 대적할 방법을 찾아나가는 전개는 스릴러 소설의 묘미도 보여주는데, 이에 그치지 않고 미스테리 요소까지 갖추고 있다. 대체 전날 밤까지 와인을 함께 마시던 여자친구 유메코는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그리고 주인공은 기시 유스케 본인의 분신인 것은  아닐까?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문학성은 물론 오락성까지 총망라된 느낌.

하지만 이런 경외감도 100 쪽째 읽고나서는 조금씩 사그라든다. 아무리 그래도 책 전반에 걸쳐 주인공 남자와 말벌만이 심리전을 벌이는 건 너무 단조롭다(중간에 등장하는 편집자는 존재감조차 희미하니 무시하고). 주인공이 <말벌 핸드북>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화염기로 불을 뿜거나 스키복으로 몸을 치장하는 등 스펙타클한 상황이 그나마 긴장감과 치밀함을 유지시켜 주는 느낌이다. 결말에 가서는 미스테리 소설에서의 '반칙'이  등장한다(아니 잠깐, 이 책이 미스테리 소설이었나?). 이 김빠지는 이야기는 뭐란 말이지. 우리는 알고 있다. "말이 되는 소릴 해야 할 의무에서 해방시켜주면 작가는 뭐든지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아이러니하게도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 본인의 독백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본격 저자가 셀프디스 하는 소설...). 

「《말벌》은 도저히 걸작이라고 하긴 힘들었다. 아니, 누가 보더라도 완전한 실패작이다. 등장인물의 리얼리티는 손톱만큼도 없고, 미스터리도 실소가 새어 나올 정도였다.(216 p)」

본문에서 주인공이 출간한 작품들이 담고 있는 '자연의 섭리, 약육강식'의 메세지에 대해선 구태여 깊이 생각하지 않으련다. 그게 진실이라는 걸 적나라하게 입증해보이려는 결말도 아니었으니까. 단지 주인공의 살생 욕구를 일어나게 한 작은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고나 할까. 

소설가로 등단하고 싶어하는 신진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엉성함이나 미숙함이 있을지라도 진실한 열정이 느껴질 때가 있다. 인기 작가가 되면 한 작품 낼 때마다 스스로의 압박감을 느끼며 내거나, 혹은 대충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내거나. 그 둘 중 하나가 되는 것일까나. 《말벌》의 단조로움은 무엇으로 커버 쳐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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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F가 된다 S & M (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 1
모리 히로시 지음, 박춘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모리 히로시 작품들이 개정되어서 새 번역, 새 디자인으로 속속 출간되고 있다. 2015년, 《모든것이 F가 된다》가 애니화되면서 그 여세를 몰아 책까지 새로 나오는 듯 하다. 이전에 모리 히로시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지만, 이렇게 기세 좋게 컨텐츠가 쏟아져 나오면 한 번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자고로, "애니화" 되는 작품에는 이유가 있는 법. 


건축학과 교수 사이카와 소헤이, 33세. 그는 연구 이외의 것들에 흥미가 없고, 골초이며 모닝커피가 요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제자 니시노소노 모에(만 19살)는 소헤이의 은사였던 니시노소노 교수의 딸이며, 부모님은 모에가 어릴 적 비행기 사고로 타계하고 만다. 이후 모에를 사이카와 교수가 위로해왔고, 모에는 주변 사람들이 대놓고 의심할 정도로 묘한 사이가 되지만, 사이카와는 모에의 천진난만한 구애를 못본 척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사이카와, 모에라는 이름 때문에 일명 S&M 시리즈라 불리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SM 도 아니고, SN 이건만 스스로 S&M이라 지어놓고 부르기 민망해 싫다라고 하는 팬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ㅎㅎㅎ). 

이야기는 모에가 부친과 친분이 있었다는 마가타 시키 박사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마가타 여사는 프로그래밍 분야의 천재로, 신에 가까운 능력을 지녔지만 15살 때 양친을 살해한 일로 어느 섬의 연구소 방에 갇혀 지내고 있다. 이후 사이카와 교수와 모에, 사이카와의 대학원생 제자들은 마가타 여사가 있는 섬으로 세미나(여행)를 떠나는데. 사이카와와 모에 둘이서 연구소 방문한 때에 연구소에서 마가타 여사의 시체가 나타난다. 절대로 안에서는 열 수 없는 마가타 여사 방의 문이 열리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죽은 마가타의 시체가 로봇에 실려 나온다. 방 안에는 범죄자인 여사만이 살고 있었고, 누구도 침입한 흔적이 없다. 때마침 마가타 시키의 동생, 미키를 연구소로 데려온 소장 또한 옥상의 헬기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사이카와는 연구소 내부에 숨겨진 증거들을 모아 진범 찾기에 나선다. 

《모든 것이 F가 된다》라는 제목은, 연구소 내 컴퓨터에 마가타 시키가 써 놓은 메세지에 등장하는 문장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사지가 절단되어 죽은 시체. 밀실. 메세지. 이런 것들이 '추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소설 속의 단서들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과 관련된 것들이 많으며, VR(가상현실)까지 등장하는데, 1994년도에 일어난 사건임을 감안하면 대단히 진보된 지식을 사용해 추리 소설을 써낸 것에 감탄하게 된다. 애초에 사이카와 제자의 논문 주제가 '가상현실이 미래 건축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사건과 추리를 넘어서서, 학문적인 요소들도 엿보게 되는 건 역시 저자가 대학 교수이기 때문에 생기는 묘미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대학 시스템과 교수로서의 입장을 그리고 있는 것에 더 흥미를 느꼈다. 겉모습은 수염 텁수룩하고 '교수'와는 동떨어진 이미지의 사이카와는 분명히 매력적인 존재였다. 지나치게 천재적이어서 오히려 거짓성이 느껴지는 모에나 마가타 여사보다 훨씬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사이카와가 직접 범인 색출에 나서는 계기가 가장 인상적이다. 대학교수가 되고나서 외부 세력의 압력에 치이고 연구자로서의 순수한 열정만을 믿을 수 없게 된 그. 살인사건의 관계자가 된 순간에도,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묵인해달라'는 부탁을 받자 '자유로운 방랑자'로서의 욕구가 치밀어오른다. 결국 본인이 범인을 찾겠다고 마음 먹는 데는 사이카와가 평소 마가타 여사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던 것도 한 몫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모리 히로시는 이후 S&M 시리즈에서 독자적인 세계관을 탄탄히 개척해 나간다고 하는데, 사이카와는 분명 '탐정사전'에 이름을 올릴만한 캐릭터가 되겠구나 생각하게 했다. 

S&M에서 셜록과 왓슨의 관계가 보인다. 교수인 사이카와는 어른의 시선에서 멀리 내다보고 모에를 깨우친다. 모에는 천재적인 발상으로 사이카와에게 영감을 준다. 단 사이카와와 모에의 러브라인이 간간히 묘사될 때마다 왜 이렇게 불편한 마음이 들었는지. 처음엔 사제간의 러브라인이 내게 도덕적인 부담감을 안기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천진하게 웃으며 사이카와에게 호감을 드러내다가도 저 혼자 사이카와에게 삐져 눈물 짜는 모에의 하는 짓이 한심했던 거였다. 모에의 열렬한 구애에 둔감한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애매한 태도를 고수하는 사이카와에게도 꽤나 짜증난다. 나는 이런 '정해지지 않은 애매한 관계성'이란 걸 정말 싫어해서. 아마 이 상태가 이후 시리즈에서도 계속되는 거라면 정말 답답해서 머리털 쥐어짜게 되지 않을까. 

구시대적인 트릭과 결여된 스토리성에 지쳐 본격 추리소설이 지루하게 느껴졌는데, S&M 시리즈는 그런 부분들을 만족시켜줄 좋은 작품이었다. 그 '독특한 세계관'이란 게 뭔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게 만든다. 다음은 《차가운 밀실과 박사들》. 



본문 중>
「"모르겠어. 모르는 것 투성이야. 그렇다고 이런 때 마지막 카드를 내놓기에는 속이 쓰리고......" 
"뭐죠? 마지막 카드라는 게?"
"그건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지."」  - 164 p 

「"어라? 너도 초등학생 땐 항상 인형 같은 옷을 입고 다녔잖아."
"교수님!" 모에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그런 걸 기억하고 계셨어요? 실례예요!"
"뭐가?" 사이카와는 놀랐다. 왜 모에가 부루퉁해졌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왜 기분이 상한 건데?"
모에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사이카와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171 

「나는 어떠한가, 사이카와는 생각했다. 대학이라는 자유롭고 비생산적인 환경에 몸을 담은 지 벌써 십 수년이 지났다. 나는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중략)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중략) 싫은 것이야 예나 지금이나 많이 있지만,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줄어들고 있다. (중략) 20대 때는 무턱대고 공부를 했다. 연구에만 시간을 쏟았다. 눈앞에 있는 자신만의 문제에 흥분하고, 혼자서 느끼는 그 정복감이 최고의 것인 줄 알았다. 순수한 학문은 끝이 없다. 도달의 기쁨을 맛볼 길 없는 허무함이야말로 귀중한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다.
그렇지만 사이카와는 자신의 변화를 알고 있었다. 자신은 더 이상 자유로운 방랑자가 아니었다. 언어는 제한되고 행동도 제약을 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모든 게 다 살기 위한 일이다, 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었다.」  - 206 p

「"추억은 전부 기억할 수 있지만, 기억은 전부 추억할 수 없다는 거야."」 - 258 p

「자신의 무관심함에자기도 경악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잘 모른다. 분석해 본 적은 없지만 아마 무언가에 대한 방어를 위해 형성된 메소드였을 것이다. 어렸을 적 그는 겁이 많아서 항상 무서워 떨었다고 한다. 몇 겁이나 겹쳐 놓은 충격 완화 장치로서, 그는 두껍고 표정 없는 얼굴을 만들어냈다. 흥미미있는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무언가를 피하고 있었다. 연구에만 몰두해 온 것도 틀림없이 무언가를가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 - 351 p 

「사이카와 교수, 당신은 머리 회전은 늦지만 지향성은 탁월해요. 판단력이 약하지만 객관성은 발군이에요. 아직 당신 안에는 몇 사람인가 들어 있지요? 여러 사이카와 교수가 있을 거에요. 당신 머리 회전이 느린 까닭은 그 인격들간의 세력이 균등하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그 독립성이 뛰어난 객관성을 만들어 내고 있지요. 균등한 세력이 예민한 지향성을 낳는 거예요. 당신은 몇 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요. 기적적으로, 그것들이 섞여 있지 않아요. 아니, 진정한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또 다른 당신이 만들어낸 거죠......" 」 - 445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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