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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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일어난 큰 "여자행원 공금횡령사건"의 배경에는 항상 남자가 있다고 한다. 이 속설의 배경엔 어떤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 저자 가쿠다 미쓰요는 상상력을 발휘해 횡령 사건과 관련된 스토리를 짜고 각양각색의 등장인물을 창조해냈다. 섬세하고 일상적인 언어로 인물의 의식 흐름을 매우 부드럽게 진행시킴으로써, 평범한 사람이 범죄자가 되는 과정을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어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종이달> 속 
등장인물들의 인생은 낭비벽 또는 근검절약이라는 성향 때문에 다양한 모습으로 꼬여가기 시작한다. 교보문고에서는 이 책을 "80년대 말부터 일본 경기의 흐름을 따라 이동하는 이 소설은 큰 규모의 현금을 손에 쥐게 된 고령자들과 자식 세대에 벌어지는 갈등을 그리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그것보단 남녀관계가 금전적 관계에 갇혀버려 열정을 잃고 순간적 쾌락만을 좇게 되는 상황이 더 중점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야기는 주인공 리카와 그 주변 인물들의 내면을 번갈아 가며 묘사하는데, 특히 죄의식과 행복감 속에서 번민하는 리카의 감정이 잘 묘사된다.

시간제 은행원으로 근무하던 은행에서 주인공 우메자와 리카는 1억원을 횡령하고 태국으로 도주한다. 낯선 땅에서 리카는 평범한 주부에서 범죄자가 되기 까지를 회상하며 암담한 기분이 된다. 횡령 사건을 일으키기 훨씬 전. 리카는 남편의 경제력에 의존하다가 취직을 하면서 미래에 대한 소소한 행복을 그려보지만 마사후미의 태도는 미지근하다. 부부관계에 소홀하고 경제력 우위를 선점하고 싶어하는 마사후미를 보며 리카는 점점 위화감을 느껴가는데. 이윽고 마사후미가 장기 해외 출장을 떠나자, 리카는 취직 후 만난 내연남 고타에게 거액을 투자하며 자존감을 되찾으려 하고, 큰 돈을 들여 둘이 함께 보내는 시간을 오랫동안 꿈꿔 온 '로맨스'라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남녀의 즐거운 시절을 뜻하는 '종이달'은 바로 리카가 고타로 인해 느끼는 꿈과 같은 시간들을 상징한다.

고타와의 연애를 위해 리카가 고객에게서 횡령한 돈은 1억엔이 되도록 늘어난다. 처음엔 잠깐 쓰고 빌리려고 했건만 씀씀이는 커져갔다. 무감각히 돈을 쓰다가, 횡령액을 계산해볼 때는 공포에 휩싸이곤 한다. 리카의 모습에서 보여지는 건 '돈'이 보여주는 일시적 마력에 정신을 홀린 여자이다. 리카에게 빚지는 걸 무안해 하던 내연남마저 '돈의 재미'에 맛들려 화려한 생활을 당연히 여기기 시작하는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종이달>을 계속 읽다보면, 남녀의 대화가 의도적인 것 처럼 대부분 '돈 얘기'에만 집중되었단 걸 느끼게 된다.  그런 텅 빈 일상 속에서 리카를 비롯한 인물들이 느끼는 외로움과 허무함은 극적으로 도드라져 보인다. 리카의 전 남자친구였던 가즈키는 숨막히게 바가지를 긁는 아내 마키코의 "아내한테 돈 벌어오란 소릴 잘도 하네" 하는 말에 귀를 닫아 버린다. 가장 기가 찬 부분은 가즈키가 내연녀 무스미에게 아침상을 차려주며 "어제 얻어먹은 답례"라고 하는 부분인데, 비약하자면 이 장면은 '기브 앤 테이크'가 일상 깊숙히 내면화되어 있음을 보여준다(이 얼마나 째째한 대화인지). 

이 책을 '경제 관념이 없는 어린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라고 하는 건 너무 단순한 평가는 아닐는지. 등장인물 모두가 '돈'에 지배받을 수 밖에 없게 된 상황은 그들 각각이 갖고 있는 심리적인 '결핍'상태가 원인이라는 걸 들여다 보게 된다. 부부관계가 결여되어 있어 리카는 자기 것도 아닌 돈으로 고타와의 일상을 샀다. 부유했던 어린 시절에 누린 만큼 딸에게 해주지 못해 바가지를 긁는 가즈키의 부인이라든지. 이혼해 헤어진 딸을 만날 때마다 환심을 사려고 거액을 쓰는 엄마 주조 아키라든지. 해결해야 할 공허함을 메꾸는 것이 '돈'이 되어버린 것 또한 안타까운 현실로 보여진다. 
이들에게 필요했던 건 경제관념 이전에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해결하고자 하는 태도와, 주변의 적극적인 관심이다. 횡령 사건 처럼 남의 일 같은 범죄는 결국 무관심이 판치는 환경 어디에서나 쉽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고, 가쿠다는 말 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본문 중>

「"당신이 말하는 해준다느니 해줄 수 없다느니 하는 게 물리적인 것이라면 당신도 일을 하는 게 어때?" 라고 말하자, 마키코는 울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아내한테 돈 벌어오란 소릴 잘도 하네, 그런 말을 되풀이 하면서. 마키코를 울린 후 가즈키는 마키코의 이야기를 듣지 않기로 했다.」

「걸핏하면 마사후미는 리카가 한 달에 버는 돈이 얼마나 적은지 언급했다. 외국 여행은 물론 가계에도 대출금 상환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넌지시 둘러서 말한다.」

「리카가 선술집에서 한턱 낸 다음에 굳이 시내 고급 초밥집에 데리고 간 것과 같다. 그는 리카에게 깨닫게 하고 싶은 것이다. 업무 내용도, 경제력도, 자기가 리카보다 훨씬 위라는 것을.」

「어제 얻어먹은 답례라며 가즈키가 아침 식사를 만들었다. 요리를 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무의식중에 자기가 하는 일을 인정받은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50만, 70만, 카드 결제 때문에 '빌렸던' 금액은 100만, 200만으로 점점 늘어났다. 무엇을 사고, 무엇에 사용했다는 명확한 기억이 없어도 있으면 있는대로 돈은 줄어갔다.」

「"하지만 나는 무엇을 사달라든가 해달라는 말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그러네." 리카는 당황하며 말했다.」

「내가 너한테 지금까지 얼마나 썼지? 빌려준 돈, 물건을 산 돈, 먹은 돈, 교통비, 맨션 월세, 차 구입비, 유지비, 주식 자금, 그만큼 돈을 받아놓고, 오늘 만나고 싶다는 단 한 번의 부탁도 거절하는 거지. 리카는 처음으로 고타에게 분노를 느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자유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무엇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걸까? 지금 내가 맛보고 있는 이 엄청나게 큰 자유는 스스로는 벌 수 없을 만큼의 큰돈을 쓰고 난 뒤에 얻는 것일까, 아니면 돌아갈 곳도 예금통장도 모두 놓아버린 지금이어서 느낄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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