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 - 구효서 장편소설
구효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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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아마도 처음 읽는 구효서 소설. 「문학이 사랑한 꽃들」에 소개된 구효서 작가가 궁금해져, 출간작들을 검색하다 보니 마침 영화 「동주」 개봉 시기였던 참이라, 작품들 중 「동주」가 특히 눈에 띠었다. 

이야기는 주인공 김경식이 글을 쓰게 된 계기를 밝히는 것 부터 시작한다. 김경식은 자기가 일본인인 줄 알고 살다가 어머니로부터 "너희 아버진 한국인이다."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렇다는 사실도 겐타로로서 살아가는 그의 생활 태도나 사고방식을 바꾸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김경식은 23 살에 한국을 알고 싶단 열망이 일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고, 지접 한국말로 이 글을 쓰고 있다고 전한다. 이제 이야기는 김경식이 절친한 친구 나츠메 시게하루가 권한 여름 방학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윤동주의 유고를 세상에서 없애려는 세력과 그것을 지키려는 세력이 있음 알게 된 것으로 이어진다. 친구 나츠메 시게하루가 돌연 행방불명 되자 겐타로는 윤동주 유고가 관련이 있을 거라 짐작하고 친구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유고도 추적하게 된다. 

겐타로가 유고를 찾아 도쿄부터 후쿠오카, 홋카이도까지 이동하는 여정 사이사이, 한 여자의 수필이 나열된다. 그녀는 텐도 요코. 다른 이름은 이타츠 푸리 카. 윤동주가 일본에 살 때 같은 건물 이웃이었다. 가까이서 동주를 지켜본 요코의 입을 통해 동주의 모습이 전해져 온다. 

소설의 마지막으로 가면서 겐타로는 동주와 연관된 텐도 요코의 존재에도 다다르게 된다. 서로 다른 세 겹의 시간대를 사는 존재들이 동주로 인해 엮이고 감화되어 간다. 요코는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 아이누 라는 걸 알게 되곤 양분된 정체성을 겪어야만 했고, 점차 자아가 확립되어 가면서 동주가 살았던 '사이의 간도'의 필요성을 느낀다. 동주의 마음과 혼을 그려내는 이타츠 푸리 카의 글이 요코의 성장을 한껏 느끼게 한다. 겐타로는 그 여름에 요코, 즉 이타프 푸리 카에 의해 한국인이면서 일본말을 쓰고 일본에 살고 있는 이질적인 숙명을 깨닫고 한국에 대한 열망을 키우게 된다. 

윤동주 평전을 보는 것 보다 이 소설 「동주」가 더 인상 깊은 건, 등장인물 김경식과 이타츠가 동주로 인해 만물의 다양성과 주체성의 필요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간도에 있는 한국 사람들 사이의 불화에 낙담하고 일본의 억압을 받으면서 동주는 저항 정신을 태우기 보다는 시인의 신분으로 '한국말'을 통해 자주성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부끄러웠다. 그런 애달픈 감정들이 요코에 의해 반복적으로 상기된다. 내가 학창시절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스물한살 청년 동주보다 더 나이를 먹고서야 그의 부끄러움에 한껏 동화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중으로 부끄럽다. 

겐타로가 나츠메를 찾아 돌아다니는 것이나 텐도 요코에게 다다르게 되는 과정등의 서사가 유기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아쉽다. 겐타로와 요코의 글이 번갈아 등장하는 편집 방식에 문제가 있는 건지. 이야기 진행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 어디에 배치되어 있었는지 잘 인지 되지 않아, 결국 동주에 대한 회고록 부분만이 단일 소설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소설의 평점이 내 생각보다 낮은 이유는, 대개 이런 단점 때문인 것 같다. 

"일본 민족이 순수혈통이라고 우긴 것도 그렇고, 대만과 조선의 병탄을 합리화 하기 위해 나중에 혼혈론을 옹색하게 내세운 것도 그래. 이랬다저랬다 맘대로 피를 바꾸는 것이 너와 일본의 과학이라는 거야. (중략) 하나인 것처럼 말해 저항을 무력화하고 결국은 영속적인 차별과 지배를 완성하자는 것일 테지." (198쪽)

"동주와 나는, 잃었든 버렸든 고향을 떠나왔고, 교토의 한 아파트에 살았으며, 무엇보다 가모오하시 교진을 친구며 스승으로 여겼다. (중략) 어쨌거나 내 기억은 서른이 되고 마흔이 넘으면서 정리되고 견고해진 것일 뿐. 열다섯의 못난 요코는 여전히 종작없기만 했다." (209쪽) 

"특정한 조직이나 사건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안의 나약함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 인해 본의 아니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완강해져 해방의 이름으로 강권하고 서로를 무자비하게 해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264쪽)

"아이누적인 것, 조선적인 것으로 차별(차이)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땅은 이미 그들의 영토도 뭣도 아니다. 그것이 없어지는 순간 존재는 상실된다. 차별되는 것, 그 중 으뜸 되는 것을 동주는 말이라 여겼음에 틀림없다." (269쪽) 

"들판의 모든 꽃이 사쿠라가 돼버리면 세상에 꽃이란 것 자체가 없어지는 거란다. 일본은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문명을 사칭하여 남의 나라를 강압적으로 침략하고 지배하고 있어. 망하는 길이지. 동주는 동주의 꽃을 피우려 했을 뿐이야. 다르면서 서로 의지하고 교통하는 생존의 이치를 아는 시인이라면 남을 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를 지키다 꽃처럼 고요히 죽어갈 뿐이지. 앞으로 미친 세상은 마땅히 이래저래 바뀌겠지만 동주와 같은 시인은 시인으로 영원하다." (298쪽)

"동주는 백석의 필사본이 반가웠고 명준이 존경스러웠다. 그런 마음 한편으로 자괴감이 쌓여가고 있었다. 언제든 시를 찾아 읽을 수 있는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시가 나태하고 빈곤해진 건 아닐까. 서굴러 학교로 가 이틀 만에 두 권의 시잡을 필사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참회하듯 벼리듯 한 자 한 자 눌러 적었다." (349쪽) 

"시인의 죽음을 몰고 온 그 번역이라는 것은, 일반적 의미의 번역이 아니었다. 시인의 생명을 빼앗는 선고였고 무자비한 집행이었다."(393쪽) 

"동쥐 죽음은 저항인의 저항적 죽음이 아니라, 시인의 시적 죽음이었다. 그의 망설임과 부끄러움은 연약한 이의 성정이 아니라, 세상의 온갖 가차 없는 것들에 대한 반성이었으며 고요한 자기 응시였다. 굳이 저항이었다고 한다도 그것은 국가나 민족 차원의 것이었다기보다는 더 근본적으로, 모든 여자없는 것들에 대한 의도적 머뭇거림이었으며 성찰적 저항이었다." (397쪽)

“그는 시와 함께 죽었다. 그랬으므로 죽음 이후의 시, 강제 번역된 시는 시가 아니며 더구나 그의 시일 수 없다. 그가 영원한 시인으로 우리 곁에 살아남으려면 시와 함께 죽기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원본 없는 강제 번역 원고는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398쪽)

"나는 줄곧 이타츠 푸리 카를 떠올렸다. 그럴 때마다 울컥울컥 맹렬했다. 한국어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궁금증이 일었다. 나는 또 내내 윤동주를 떠올렸다. 그럴 때마다 혹독한 갈증에 시달렸다. '사이의 섬'에 닿고자 하는 열망이 나를 충동했다.(중략) 온전한 나란, 내가 ㅋ개달아 알게 된 나여야 했다. 일본과 한국, 일본어와 한국어 사이에 놓여 있는 나. 내 영토란 '사이의 섬'일 수밖에 없다고 자각하는 나. 비단 일본과 한국 사이뿐아니라 모든 세계의 경계에서 균형감을 유지하려는 나여야 했다." (4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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