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일
히라야마 유메아키 지음, 윤덕주 옮김 / 스튜디오본프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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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간 읽어야지 했던 게, 이제서야 읽게 된다. <악마의 레시피>, <술래의 발소리>, <남의 일>. 연달아 읽은 와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예상외로 <남의 일>.



너무나 당연한 듯, '나는 잘못이 없다' 라는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의 일에 눈을 돌리면서, 필요한 때에는 필사적으로 도움을 외친다. 모든 이야기를 합치면, 그런 '일반적인' 삶의 태도를 뭉개는 이야기가 완성된다. 


몇몇 리뷰 글과 공통적으로 느낀 건, 편집에 문제가 있다는 것. 14 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앞 작품들은 밀도 있게 전개가 되어 눈길을 사로잡지만, 뒤로 갈수록 대략 정신이 흐트러진다. 특히 「전서묘」부터는 정신 없는 문장들 때문에 장면이 효과적으로 캐치되지 않는다. 「남의 일」을 맨 앞에 배치한 것 만큼은 효과적이었다.


잔인한 묘사들이나 극단적인 상황 설정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아마 누군가에 대한 증오심을 느껴본 일이 없는 것 아닐까. 적어도 몇몇 작품은 인간 사회에 도사린 구조적인 문제, 인간의 불완전함 등을 꼬집고 있다. 「남의 일」, 「자식 해체」, 「정년 기일」, 「레저레는 무서워」은 각각 무시와 방치, 가정 불화, 빡빡한 업무, 무한 경쟁 사회의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호러 소설의 기능은 현실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를 그로테스크 하게 표현하는 것. 현실과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극한의 상황을 설정하면서, 얼마나 실감나게 신체적 공포를 떠올리게 할 수 있는가가 호러 소설의 역량이라 한다면, <남의 일>은 인상적인 수작이다. 오츠 이치의 <GOTH>는 좋지만 <남의 일>은 싫다 라고 하는 건 이상한 일일 거다. 

어떤 작품들은 설명되지도, 설명할 필요도 없는 불합리한 공포를 그린다. What if. 「새끼 고양이와 천연가스」는 느닷없이 고등학생 두 명이 부녀자에게 장난처럼 폭력을 가한다. 「쓴 바비큐」는 산 속에서 바비큐 구이를 하던 가족이 정신 이상의 살인마와 마주친다. Wrong turn 같은 영화에서 주로 마주치는 상황이다. 구태여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이, 아무튼 내장까지 얼어붙는 감각을 느끼게 하자면 무차별 폭력은 가장 흔하고 강력한 소재 중 하나다. 

일본인은 종종 융통성 없는 가식으로 사람을 대한다고 욕을 먹는데. 억눌려 있는 본심이 화법에 그대로 튀어나와 버리면 어떻게 될까. 비뚤어진 악마들이 대화로 사람을 조종하고 농락하고 패배감을 준다면 어떻게 될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 마주 했을 때 대화가 어떻게 흘러갈지를 참 잘 그려낸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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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의 일
자동차 사고로 위기에 처한 일가족. 뒤집힌 차에서 창문 너머로 구두만 보이는 행인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어쩐지 "더러워서 만지기 싫은데..." 라고 우물거리는 남자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어 간다. <SAW>를 본 것 같은 기분. 

2. 자식 해체
히키코모리가 되어 폭력을 행사하는 아들을 죽이기로 마음 먹은 노 부부의 이야기. 부부는 컬렉션을 보고 살인도구를 주문할 정도로 마음을 굳힌다. 가족끼리도 살의를 느낄 수 있다는 걸 새삼 느끼게 한다. 대체 왜 어떤 이는 TV 속 가족의 참극을 단지 '미친 짓' 이라고만 여기고 싶어하는 건지. 

3. 딱 한 입에... 
어느 날, 악명 높은 유명 요리 평론가인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노년의 괴한이 침입한다. 괴한은 평론가의 아내에게 딸을 납치했다고 하며, 잠자코 부군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할 수 있게 해야만 딸을 돌려준다고 한다. 남편이 돌아오기까지 보잘것 없는 요리가 시작된다. 말 하지 않아도 모든 상황을 이해 시키는 상황 설정이 좋다.

4. 어머니와 톱니바퀴
여자친구가 의붓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는 순간, 남자는 집에 쳐들어가 여자친구의 아버지와 사투를 벌인다. 둘은 손을 잡고 집에서 도망쳐 나오는데, 둘의 몸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한다. 사람은 누군가의 희생을 겪고도 남아서 살아가야만 하게 되지. 

5. 새끼 고양이와 천연가스
혼자 사는 시즈에의 집 현관을 통해 동네의 침입꾼들이 들이닥친다. 처음엔 무턱대로 길에 버려진 고양일 기르라고 떠넘기는 동네 주민이었다. 이윽고 얼굴에 화상이 있는 남자 고등학생과, '천연가스' 라고 쓰여진 티셔츠를 입은 남학생이 들어온다. 이 집은 일본식 가옥인 걸까. 대체 왜 문을 단속하지 않는 거야. 

6. 정년 기일
오늘로 정년을 맞이한 이노야마. 정년 퇴임식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 자신을 보는 옛 동료와 부하직원들의 눈이 서늘하여, 퇴근길이 만만치 않다. 사회의 주역에서 퇴역이 되어야 하는 이들에게 둘러쳐질 앙갚음의 장치들이 더욱 더 호러다. 하지만 그런 차가운 사회를 구축해 온 것도 자기 자신들이란 걸...

7. 포비아 소환
조직의 말단인 '나'는 보스에게 노인과 고등학생 같은 소녀와 트리오로 현장을 덮치란 명령을 받는다. 노인과 소녀의 '특수 능력'을 검증하란 것이다. 노인은 조직의 일 몇을 처리해주도 돈을 받아 챙겨 달라이 라마에게 가 '특수능력'을 제거해 달라고 할 것이라 한다. 이야기는 뻔한 이야기이지만, 과연 내 '포비아'는 뭘까 궁금해지게 하는 이야기다. 

8. 전서묘
동물을 기를 수 없는 공동 주택에 사는 치사코. 몰래 기르는 고양이 사치가 밖에서 '잘린 손가락'을 물고 들어온다. 치사코는 이내 손가락과 연관된 사건에 휘말리고, 적들에게 주택의 위치도 발각된다. 뚜렷하게 이해되지는 않는 이야기. 

9. 쓴 바비큐
없는 살림에 바비큐 장치와 텐트를 구매해 산으로 캠핑을 간 도루의 가족. 캠핑에 너무나도 들뜬 아내와 아들을 기쁘게 해주겠다는 마음과 비싼 캠핑 장치를 낭비할 수 없다는 도루의 오기가 가족을 불행으로 밀어넣는다. 

10. 레저레는 무서워
자신을 왕따 시키는 레저레가 무서워 특정일에 자살하겠다는 편지가 학교에 익명으로 날아든다. 선생들은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겠다며 레저레와 왕따를 찾기 위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중간 중간 찌라시 정보가 학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며 문제 의식을 드러낸다.

11. 크레이지 하니
행성 개척 업무에 참여 중이던 사형수 둘. 행성 내에서 발생한 살인 참극으로 인해 내부인간 2500이 차례차례 죽어나가고 있다. 역시나 '복수심'으로 인해 도움의 요청을 묵살하는 인간 심리가 그려져 있다. 코다 쿠미 이미지를 의식하고 썼는지, 배경에 나오는 노래는 코다 쿠미의 '큐티 하니'.... 

12. 다윈과 베트남 수박
킴벌리는 사장에게 강요되어 새로운 운반 업무를 맡게 된다. 그의 이름은 어째서인지 운전수 '마시아스'로 소개된다. 운반차에 같이 탄 남자 니콜라는 목적지에 가는 길 내내 변태나 호모들의 세계에 대한 우스꽝스런 일화들을 얘기한다. 타인의 변태 심리를 웃으며 즐거워하던 킴벌리는 '임무 완료' 후 다시는 니콜라의 얘기에 웃을 수 없게 된다. 이야긴 좋았지만, 제목이 의아. 

13. 인간 실격
자살하기 위해 다리 난간에 선 시오리를 낯선 남자 호바가 저지한다. 저지의 이유는 "내가 먼저 죽으러 왔으니 꺼지란 것." 이내 둘은 서로 자기가 죽어야 할 정당성에 대해 토론 배틀을 벌인다. 삶을 쉽게 포기하려는 사람에게 화가 닥치는 걸 보게 되는데, 단지 화를 입히는 자가 맘에 안 든다. 

14. 호랑이 발바닥은 소음기
결코 순탄치 않은 하류 인생을 살아가는 세 친구의 이야기. 피냄새, 찌질한 냄새, 질척한 냄새가 나는 이야기가 토막 토막 시간의 간격을 두고 나온다. 역시 제목에서 이렇다 할 의미가 안 느껴진다. 이 작품을 마지막에 배치한 것이 책의 임팩트를 확 죽여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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