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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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江健三郎)


오에 겐자부로 소설 「익사」는 오에가 자신의 페르소나 조코 코기토(長江古義人)를 등장시켜 아버지의 죽음의 의미를 찾아가는 소설이다. 코기토가 열살 때 그의 아버지 조토 선생은 배를 타고 물가에 나가 익사하여 자살하고 만다. 그 진정한 의미를 갖고 있을 아버지의 "붉은 가죽 트렁크"는 코기토의 어머니로 인해 철저히 봉인되어 있었고, 어머니가 영면한 뒤에야 오에는 그 트렁크를 열어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평생의 역작, 언젠가는 쓰기로 마음 먹고 있었던 소설 「익사 소설」을 집필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 이 소설의 시작이다. 코기토는 자신의 소설 「손수 나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날」을 공연하는 연극단과 산속 집에 모여 「익사 소설」의 집필과 조토 작품의 해석, 연극화 등의 작업을 함께 하기로 한다. 

그러나 트렁크에는 기대했던 증거나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에 코기토는 낙담하여 소설 집필을 단념하고, 그 여파로 인해 장애인 아들인 아카리에게 "넌 바보로구나!"라고 심한 소리를 해버려 사이가 크게 엇나가고 만다. 이제 이야기는 트렁크 없이 아버지의 죽음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 그리고 아들 아카리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행된다. 

 


 

 

(親子)

 

이 책에서의 핵심은 '아버지의 죽음의 의미'를 오에 자신이 이해하는 것이었다. 열살 소년 때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오에가, 이제는 칠십대가 되어, 오십대 중반의 아들을 두고 떠날 채비를 해야 할 노인이 되었다. 삼대를 걸쳐 조명되는 개인 역사와 일본 사회의 모습. 이 역시 「만엔 원년의 풋볼」과 나름대로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돌이켜 보면 사소설이 멋대로 뽐내고 보여줄 수 있는 솔직한 고백들이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주인공 조코 코기토와 아들 아카리의 냉전 시기에 아카리가 보여주는 언동 등이 유머스럽게 그려지고 있어 흐뭇함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특히 거의 막바지에 가서는 당황스러운 감정이 생겨나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막바지의 분위기는 다음과 같다. 오에는 이 작품에서 작중 등장인물에게 본인의 소설이 특정 시기를 기점으로 줄곧 사소설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지적 받으면서도 거기에 대해 그러한 형식으로 자신을 한계지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합리화시키고 있다. 


"나는 왜 이런 꽉 막힌 골목으로 들어와 있는가, 하고...... 그랬지만 곧바로, 이런 방식의 글쓰기가 아니면 글쓰기 자체를 지속할 수 없었다고, 즉 나 자신의 세계를 좁게 한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깨달았네." (p.345)


이어서는 세금과 생활비의 문제로 뭐라도 작품을 출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고백하고 있으니 나는 사소설 형태의 결과물 「익사」를 손에 들고 뭐라 할 수 없는 난감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소설다운 소설로서 독자에게 받여들여지고 있는 것인가 하고.


또한 조코가 소세키의 「마음」 속 대사를 인용하여 "기억해주세요." 라는 문구를 자기 소설 홍보문구로 사용한 것에 대해 한 청년 독자가 "당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면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나!" 하고 항의했다는 내용이 있다. 오에가 「익사」에 그대로 실은 이 내용이 읽고 있는 나마저 혼란스럽게 만든다. 「익사」라는 지극히 사소설다운 소설을 읽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마구 헤매게 되고 만다. 그러다 소설을 쓰는 것이 반드시 인류 공동의 작업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 체험을 예술로 극화 시키는 것에도 있다고 할 수 있었지 하고 생각한다. 개인 체험을 귀추하는 과정에서 일본 사회를 비추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킨 것도 이 소설이 단순한 사소설에 그치게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여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답은 이 책이 오에 겐자부로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사용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작중 조코가 소지하고 있는 멕시코 작가 시케이로스의 판화는 어떤 것이었을까)

 

소설가라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자기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읽어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읽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사소설'의 의미에 사로잡혀 계속 의구심을 품고 있었지만. 이번 오에의 소설도 그렇다. 다 읽고난 후에는 읽었다고, 다 읽어냈다고 성취감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소설이었다. 대체 어떤 힘이 그런 기분을 자아내게 하는 걸까. 나는 그것이 오에의 지위 때문에 무의식중에 생기는 의식이 아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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