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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의 첫날
비르지니 그리말디 지음, 이안 옮김 / 열림원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제목 한 번 참 잘 지었다. 「남은 생의 첫날」.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이 책의 세 여 주인공들은 모두 삶의 전환점에 서 있다. 새로운 의지와 용기를 다지기 위해 그녀들은 '홀로 되기 위한 여행'의 컨셉을 가진 세계 일주 크루즈에 승선하고 그 여행은 약 100일간 지속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아름다운 나라 프랑스에도 세계 각지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싶다는 욕망은 존재하는 것인가보다. 40대 여성 마리는 남편과의 인생을 버리고 이제 자립하기 위한 시작점으로서 여행길에 올랐다. 아름다운 젊은 여주인공 카밀은 호감이 있는 직장 동료와의 사랑을 결실을 맺기에 앞서 사람과 인생경험을 넓히고 싶어 배에 올랐는데, 여행길에서 만난 많은 인연들 속에서 그녀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60대 여성 안느는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을 떠난 슬픔을 이기기 위해 크루즈에 탄다.
이 책은 여성의 심리를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저자 자신이 주인생 셋을 대표하고 있다고도 하는데, 그야말로 이 시대 여성의 마음을 솔직한 언어로 담아내고 있따. 그녀들의 섬세한 영혼이 여행길 위에서 때로는 괴로워 하기도 하고, 또 더없이 즐거워하기도 하며, 스스로의 새로운 모습에 낯설어하기도 하는 것이 생생히 드러나는 것을 보면, 독자는 실제로 자신의 여행 경험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짧은 분량 안에서 이야기는 빠르게 전개되는 와중에도 그녀들의 우정이 탄탄히 다져지고 있으며, 그녀들의 가슴이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차오르기 시작한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
여행을 떠나고 싶게 하는 많은 책들이 있지만, 이 책만큼 다양한 곳의 매력을 선보이는 책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세계일주를 하고 있는데, 유명한 관광명지는 몇몇 밖에 언급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정말 전 세계를 넘나드는 기분을 선사한다. 주인공들은 여행지에서의 바람, 냄새, 살에 닿는 바닷물의 감촉 등을 인상깊게 이야기 한다. 장소에 대한 묘사보다는 경험에 대한 묘사가 많은 것이 오히려 이 여행이 정말 즐거운 것이구나 생각하게 한다. 잠수함, 스노쿨링, 돌고래와의 수영, 섬나라 해변 등 어린시절의 꿈을 그대로 간직한 지상낙원에서의 경험들이 그녀들을 생기있게 하는 기운을 불어준다.
한편 이렇게 긍정적인 전개를 보여주는 책이 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마리에게 있어 이번 여행은 그 동안의 노고에 대해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여행길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이따금 그녀는 앞으로의 막연한 인생에 대해 고민했다. 직장을 찾아야하고, 혼자 사는 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런 것들이 마치 정말 기적이 일어난 듯이 여행길, 크루즈 위에서 해결이 된다. 인생이 모두 그렇게 쉽지만은 않겠지만, "자리에 앉아서 고민하는 것보다, 일단은 나가봐야 될지도 모르겠다." 라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안느는 그 심약한 성격으로 인해 여행 내내 괴로운 일을 많이 겪기도 하지만 마리와 카밀의 위로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나간다. 더불어 가장 극적이고 로맨틱한 순간을 맞이하는 인물이 되기도 한다. 해답은 '여행'이었다. 그것이 반드시 우리가 예상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만은 않지만, 그것이 결코 나쁘지가 않을 것 같다.
여행과 관련된 테마의 책 몇권 중에서도 이 책은 인상이 깊다. 노부부의 여행 에세이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의 주인공들은 큰 절망을 겪은 상태에서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었기에 희망과 설레임에 가득차 있었다. 반면 이 책에서는 인생의 매듭이 풀려가는 희열감이 느껴진다. 「꾸뻬 씨의 사랑 여행」은 사랑에 상처 입은 남자가 여행을 통해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주제가 사랑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많은 다른 즐거움은 강조되지 않았었다. 반면 「남은 생의 첫날」은 여행지에서의 오감을 자극하는 경험과, 감정의 소용돌이 등이 모두 한꺼번에 그려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읽는 동안 불안한 것이 있었다. 세 여주인공의 유쾌하고 놀라운 여행이 그 순간의 환상 같은 것으로 끝이 나버리지 않을까,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그들은 색도 향기도 없는 건조한 일상에 가라앉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 이런 생각을 종식한 것은 의외로 역자의 후기이다.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사랑만이 지친 영혼을 위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누구인지 잊지 않고, 잠깐 잊더라도 언제든 자신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일상에 돌아간다는 건 어쩌면, 가라앉는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여행길에 있든 일상에 있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라는 말의 의미는 짧지만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바쁘고 치열한 삶을 살아본 사람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구절이다. 여행을 떠나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게 해주는 마지막 '주문'과 같다.
여행에는 사람, 경험과 내가 있다. 그리고 돌아와서도 유지해나갈 수 있는 인연과 추억이 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은 여행인 게 틀림 없을 것 같다. 왠지 책 한권 읽은 것만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강해진다. 지나간 여행들을 생각하니, 아쉬운 더 많은 경험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