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혼자가 되다
이자벨 오티시에르 지음, 서준환 옮김 / 자음과모음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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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자벨 오티시에의 <갑자기 혼자가 되다>. 읽어보고 싶어서 오랫동안 쟁여만 놓고 있다가 드디어 읽게 된 책. TTS 기능으로 들으면서 읽느라 집중력이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다 듣고 난 후에는 나도 모르게 큰 울림을 받아버렸다.

프랑스인인 루이즈는 약혼남 뤼도비크와 함께 빙하가 있는 대서양 한가운데를 항해하는 결혼 전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뤼도비크의 자만으로 인해 항해 중 실수로 둘은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다. 이 무인도는, 영국령 자연보호구역으로 누구도 이 곳을 지날거란 희망이 있지 않았다. 둘은 이제 살기 위해서 자연과 투쟁을 벌여야 한다. 펭귄과 강치를 사냥해 연명하고, 남겨진 선박 잔해들로 구명정을 만들어보고. 그러다가 어느 날 눈에 띤 큰 선박을 발견하고 뤼도비크는 구명정의 오일을 태워 배를 뒤쫓으려 하는데 루이즈는 구명정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다 뤼도비크와 몸싸움까지 벌인다. 뤼도비크는 구명정을 이용해 배를 뒤쫓지면 배는 허무하게 뤼도비크를 발견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이후 이들에게선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이 끊어지고 만다. 루이즈에겐 뤼도비크를 향한 원망이 들끓기 시작한다.

책의 전반부는 루이즈가 무인도에서 살아 남는 투쟁을 보여주고, 후반부는 루이즈의 이야기를 취재하려는 기자와 루이즈를 언론으로 이용해 먹으려는 가족들의 갈등 등이 주 내용을 이룬다. 루이즈는 일반적으로 무인도에서 표류하던 '여성 로빈슨 크루소'에게서 기대되는 것관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녀는 무용담 처럼 자기 이야길 늘어놓길 좋아하지도 않지만 무인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극도로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어딘가 절제된 피곤함과 슬픔을 가진 듯 하지만 뤼도비크의 이야기를 할 때면 극도로 침울해한다.

제목이 <갑자기 혼자가 되다> 것에서 결국 뤼도비크는 생존하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혼자가 되다> 라는 제목엔 약간의 오류가 있다. 무인도에서 일어난 실제 일은 이렇다. 배를 눈앞에서 놓친 후. 둘은 여러번의 태풍을 겪으며 모진 추위와 불결함을 견뎌냈다. 루이즈는 뤼도비크가 심신적으로 병들어 감을 알 수 있었다. 뤼도비크는 모든 일에 밍기적해지기 시작했다. 루이즈는 이 무인도 한켠을 벗어나 걸으면 어딘가 과학기지 같은 것이라도 있을 거라 생각하고 떠나야 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뤼도비크는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제 루이즈에게 뤼도비크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불결하고 역겨운 짐덩이일 뿐이다. 루이즈는 그녀가 더이상 뤼도비크를 사랑하지 않는단 걸 안다. 루이즈는 뤼도비크에게 일주일 후 돌아오겠단 메모를 남기고 떠나버린다. 그러니까 루이즈는 '갑자기 혼자가 된' 것이 아니라 '혼자가 되길 선택'한 것이다.

결국 루이즈는 걷고 걸어 텅빈 과학기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식량과 난방을 얻었다. 혼자가 되길 선택한 루이즈가 안식을 조금 느낀 후. 죄책감이 몰려들었다. 뤼도비크를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떠나온 죄책감. 결국 이 죄책감은 이 소설 전반을 꿰뚫는 한 소재가 된다. 이 죄책감이 루이즈가 기자와의 인터뷰를 할 때 늘 어딘가 석연치 않은 모습을 보인 이유다. 루이즈는 과학기지에서 뤼도비크가 혼자 남아 죽어버렸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죄책감을 떨치는 일종의 방법이었다. 루이즈는 용기를 내서 다시 뤼도비크가 있는 곳으로 걷고 걸어갔다. 엉망진창인 기지 '40'에서 루이즈는 노인의 형상이 된 뤼도비크가 간신히 살아있는 걸 발견한다. 루이즈는 뤼도비크에게 미음을 먹이고. 곧 같이 이곳을 떠나자고 생각하며 잠에 들지만. 루이즈가 잠 든 동안, 뤼도비크는 죽어버리고 만다. 루이즈는 깨어나서 뤼도비크의 시체를 발견하고 억장이 무너지도록 운다. 그것은 그녀에게 더 큰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뤼도비크가 루이즈가 올 때까지 참고 참다가 이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단 생각 때문에.

이렇게 전반부에는 참혹하면서 냉담한 클라이맥스들이 있다. 사실 책의 후반부에 가선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알 수 없었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 에서도 무인도에서 탈출한 후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매우 짧은데. 이 소설은 전반부와 후반부의 분량이 거의 비슷하다. 후반부의 이야기는 앞서 말했든 루이즈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모습과, 죄책감을 이겨내고 정상 생활에 복귀 하려는 루이즈의 처절한 모습을 적나라 하게 보여준다.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인 루이즈는 유명인사가 될 참이다. 그녀는 주변의 호의로 호사로운 호텔에서 객실 서비스를 누리기도 한다. 무인도에서의 혹독한 생활을 한 후 호텔에서 느끼는 이러한 호화로움에 루이즈는 취해보기도 하지만, 곧 죄책감이 그녀를 괴롭힌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려는 기자를 비롯한 모두에게 거짓말을 했다. 바로 뤼도비크가 죽은 걸 확인 한 후에 과학기지를 찾아 떠났다고 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뤼도비크를 혼자 내버려둔채 떠났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서 모두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기자는 이 이야기에서 묘한 어색함을 느꼈지만, 가능한 이야기라 생각했다. 뤼도비크의 시체는 프랑스로 송환되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뤼도비크의 부모는 루이즈를 장례식에 초대한다. 루이즈의 죄책감은 이 장례식장에서 거의 폭발하게 된다. 그 날, 루이즈는 기자에게 모든 것을 밝히며,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이제 루이즈는 거짓말로 죄책감을 묻어둘 수가 없다.

이후 기자는 이것조차 이용해서 책 홍보에 쓰려하지만. 최종장에서 결국 루이즈가 자신의 이야길 스스로 집필하기 시작했단 걸 알 수 있다. 그녀는 소설가 조지 오웰이 소설을 쓰러 들렀던 곳에 머물면서 일상생활로 복귀하려는 노력을 한다. 무인도에서의 삶은 8개월이었다. 그녀는 조지오웰의 소설 <1984>를 읽으며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다. 그건 자신이 계속해서 과거를 반추하며 내가 왜 뤼도비크를 떠나야했는지 정당화하려 했단 점이다. 루이즈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무인도에서의 혹독한 현실을 그녀가 생존을 위해 혼자 길을 떠나는 것이 매우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위로하려 했다. 하지만 루이즈는 과거를 지우려는 노력을 하려 한다 해서 과거가 변하는 것은 아니란 걸 깨닫는다. "아픔에 이름을 붙여 똑바로 바라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쾌유의 징후이고, 쥐라에 온 이후부터 실제로 그렇다고 느껴온 것 처럼 성숙해가는 증거일 수 있다." 루이즈는 자신이 뤼도비크를 떠났다는 걸 스스로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치유를 얻을 수 있었다. 아무리 자신을 추궁하고 정당화 하려해도 결국 뤼도비크가 홀로 남겨졌었단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어떠면 이유보다는 결과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더 큰 법인지 모른다.

그렇게 루이즈가 깨달음을 얻고, 책을 쓰기 위한 에너지와 의지를 얻은 그 날은. 제이슨 호가 비글 해협으로 들어선지 정확히 1년이 된 날이었다. 루이즈는 구조 후 4개월이 지나서, 회복하게 되었다. 소설 마지막에.... 1년 전 두 남녀가 행복감에 도취되어 있었고, 앞으로 행복한 앞남만이 기약되어 있다고 확신했었다고 마무리 한 점이 개인적으로 매우 서글펐다. 그런 희망과 행복에 차 있었는데,1년후의 결과와 갖는 간극이 너무 커서 압도되는 느낌이다.

누군가 무인도에서 살아남았다고 하면. 소설 속 기자가 그랬던 것 처럼 '어떻게' 무인도에서 생존할 수 있었는지, 구조선을 발견했을 때의 심정은 어땠는지 등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릴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어떻게' 살았는지 보다, '왜' 살았는지와 구조된 이후의 개인의 심경 변화 묘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난 이런 부분이 참 좋았다. '대단한 이야기'의 뒤에는 개개인의 말못할 사정과 참혹한 심정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한 점.

그리고 그 '후일담'은 개인적으로 내가 처한 상황과 맞물리는 부분이 있어, 괜히 감화되며 읽을 수 있었다. 모든 선택엔 결과와 책임이 따른다는 흔한 말을. 더 와닿게 한 소설이다. 영화화 된다면 꼭 보고 싶은 작품이다.

<책 본문 인용>

아래엔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읽는 데에 주의를 요합니다.

어떤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자기들의 몸통을 움켜잡고 놓아주지 않는 느낌, 쓰라린 열기 같은 게 불덩이처럼 목구멍에서부터 거슬러 올라오는 느낌, 어떻게 해도 억제할 수 없는 전율이 두 사람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지나간다. 텅 빈 내포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두 사람은 용기를 잃지 말자고 서로 다독이며 이 혹독한 환경을 이겨내고자 가까스로 견뎌왔다. 그는 자기 기분이야 어떻든 루이즈의 사기가 꺾이지 않도록 농담도 이어가고자 노력했고 루이즈가 어떤 의식을 제안하면 그게 좀 우스꽝스럽더라도 가리지 않고 동참했다. 그런데 그 결과가 겨우 이거란 말인가? 그

그냥 다 지긋지긋하다. 그저 너무 춥고 너무 혹독하다 싶을 뿐이다.

뤼도비크는 자기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왜 그런지는 스스로도 모른다. 그는 이 폭풍이 지나가고 나서도 자기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어떨지 속으로 자문해본다. 섬에서 빠져나가는 건? 두 사람은 정녕 그럴 수 있으리라고 믿고 싶었다.

하늘은 지상을 짓누르려는 것처럼 무겁게 내려와 있다. 이제부터는 이 새하얀 페이지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한다. 그러면서 다시 뛰어오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피로가 몰려온다. 억누를 길 없는 낙심에 휘둘린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 맞설 만한 기력도 희망도 없다.

뤼도비크는 육체적으로도 병든 게 확실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정신이 망가졌다는 점이다. 그가 병들기 시작한 것은 크루즈 선 사건 이후부터다. 산산조각이 나고 만 쾌속정의 꿈은 뤼도비크를 이 지경으로 주저앉힌 치명타였다. 더 이상은 버텨낼 힘이 없어진 것이다. ‘뤼도비크는 이제 금치산자나 마찬가지다.’ 루이즈는 차마 그의 상태를 이렇게까지 규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이미 그녀 안에서 확고해졌다. 루이즈로서는 이곳에서 벗어나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탐험 기지를 찾아내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두 사람은 너무 심약해서 그쪽으로 가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그 길을 함께 떠나기에는 뤼도비크의 병이 너무 깊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는 살아남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거라는 게 훤히 내다보인다. 자기라도 살아야 한다. 그러니 떠나자. 그게 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도 끝도 없는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뤼도비크를 여기 놔두고 혼자 떠나? 그렇다면 그를 죽음으로 내모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가 이토록 병들어 있는데. 설령 자기들 사이에 사랑이 식었다 해도 실오라기 같은 최소한의 연민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인가? 자기가 그 정도로 무시무시한 에고이즘의 괴물이었다는 말인가?

루이즈의 얼굴 위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뤼도비크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돌아누워 자기를 감싸 안은 후 귓가에 대고 딱 한마디만 속닥거려주면 좋겠다. 애무도 필요 없다. 그저 딱 한마디만. 내가 여기 엄연히 버티고 있지 않느냐고, 나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투덜거리는 어투라도 좋으니 제발 그런 의미를 담아 딱 한마디만. 다른 사람들도 이따금 그렇듯이 그녀는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해본다. 자신의 의지만이 숙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

루이즈는 다시 돌아누워 뤼도비크에게 바싹 달라붙는다. 돌연 속에서 욕지기가 올라온다. 그의 몸에서 역겨운 냄새가 난다. 그에게서 부랑자의 냄새가, 쓰레기통에서나 풍길 법한 악취가, 땀 냄새와 독한 지린내가, 오랫동안 씻지 않은 몸과 한 번도 갈아입지 않은 옷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 그 냄새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지냈다는 게 더 놀랍다

그러자 넋두리를 늘어놓듯 묵은 반감이 되살아난다. 모든 건 자기에게만 맡겨두고 뤼도비크는 실제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 이제는 자기도 더 이상 두 사람 역할을 떠안을 여력이 없다. 보잘것없는 식사를 나눠 먹는 것도 지쳤다. 더 이상 이런 몰락의 체취를 감당할 자신도 없다. 냄새는 거짓말을 안 하는 법이다. 가장 본능적인 감각이기 때문이다.

루이즈는 계속 생각을 이어간다. 결정적인 순간일수록 인간은 혼자다. 삶과 죽음 앞에서, 지엄한 결단 앞에서 타인은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자기는 뤼도비크를 잊어야 한다. 오로지 살아남아야 한다. 이거야말로 가장 절대적인 그녀의 권리다.

루이즈는 잠시 망설이다 이렇게 덧붙인다.

‘몸조심하고 있어. 사랑해.’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거짓이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심지어 하찮아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가 가엾게 여겨지는 건 사실이다. 자기가 떠났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뤼도비크는 엄청난 충격에 빠져 허우적거리겠지. 사랑한다는 말은 그를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베푼 온정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그녀에게 뤼도비크는 더 이상 안중에도 없다. 단지 이런 문제에만 골몰할 뿐이다

가장 먼저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크게 부릅뜨고 있는 두 눈과 느리게 여닫히는 눈꺼풀이다. 그건 더 이상 뤼도비크가 아니다

지금 루이즈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정체 모를 노인이다. 살이 쪽 빠진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다. 미소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다. 물론 말도 없다. 그저 눈만 끔뻑거릴 뿐이다

그런데도 루이즈는 뤼도비크의 부릅뜬 두 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세 알아차린다. 뤼도비크는 이제 여기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그 어떤 힘을 통해서도 복구할 수 없는 세포 다발로만 남게 되었을 뿐. 그 세포 다발마저도 나중에는 분해되고 으스러져 형체도 없이 소멸하고 말겠지. 처음에는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뤼도비크는 자기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기와 다시 마주할 순간만을 애타게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결국 자기가 이곳에 돌아온 것을 보고서야 이제 더는 바랄 게 없다는 듯 순순히 죽음에 투항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를 마지막으로 다시 본 후에야 그동안 힘겹게 막아온 최후의 빗장에서 스스로 물러난 것일지도 모른다. 문득 그녀에게 그런 생각이 스친다. 그렇다면 너무 가혹한 이야기 아닌가! 그래, 그가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루이즈는 모포 아래 묻혀 있는 그의 어깨에 손을 짚고 가볍게 흔들어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도 느끼지 못한 사이에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이 목을 타고 흘러내려 옷섶까지 적신다.

뤼도비크는 자기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기와 다시 마주할 순간만을 애타게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결국 자기가 이곳에 돌아온 것을 보고서야 이제 더는 바랄 게 없다는 듯 순순히 죽음에 투항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를 마지막으로 다시 본 후에야 그동안 힘겹게 막아온 최후의 빗장에서 스스로 물러난 것일지도 모른다. 문득 그녀에게 그런 생각이 스친다. 그렇다면 너무 가혹한 이야기 아닌가! 그래, 그가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루이즈는 모포 아래 묻혀 있는 그의 어깨에 손을 짚고 가볍게 흔들어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도 느끼지 못한 사이에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이 목을 타고 흘러내려 옷섶까지 적신다.

루이즈는 혼자 남게 된 슬픔에, 더 일찍 돌아오지 못한 가책으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막막해서, 끝없이 터져 나오려는 오열을 멈출 수 없다. 꽤 긴 시간이 흐르자 이제는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몸에 남은 수분이 모조리 눈물로, 한없는 슬픔의 물줄기가 되어 빠져나가고 만 것 같다. 눈물이 메마른 눈자위는 퉁퉁 부어오르고 머리에는 둔중한 두통이 내려앉는다.

아직 부릅뜨고 있는 뤼도비크의 눈은 벌써 불투명해지고 있다.

이윽고 루이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제 미처 풀어 헤칠 여유도 없었던 배낭을 챙겨 든다. 그러고는 곧바로 이 공간을 떠난다.

뤼도비크를 잃고 나서부터 루이즈에게는 당시 ‘40’에서 겪은 일이 생생한 기억의 한 장면으로 계속 남아 있다. 그 무렵에는 이 사내가 다시는 그립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살아남는 문제가 절박했으니까. 자기 자신의 생존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생존하는 일은 그녀의 모든 기력을 다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보니 그게 설령 뤼도비크라 할지라도 다른 누군가에 대한 감정이나 애착을 남겨둘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안전한 곳에 와 있다. 몸도 마음도 회복 중이다. 이 예전 사진을 오래도록 내려다보고 있으니 무서운 욕망에 몸이 떨려온다. 다시 이것들을 되찾고 싶다는 욕망. 그의 푸른 눈, 두툼한 입술, 자기를 으스러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억세게 끌어안던 팔, 그리고 늘 욕정에 굶주려 있는 듯한 그의 성기. 어마어마한 허기가 그녀를 휘감고는 앞가슴에서 출발하여 아랫배를 거쳐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어온다. 이제는 그래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는 서글픔이 밀려든다. 뤼도비크를 다시 안고 싶다 해도 자기에게 남겨질 것은 그의 풍성한 육신이 아니라 유골에 지나지 않겠지

그녀가 여전히 암시조차 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대목은 처음으로 과학 기지를 향해 떠났다 돌아온 순간이다. 뤼도비크가 죽고 나서 떠났다는 말을 하는 동안 루이즈는 두 손을 예사롭지 않게 배배 꼬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피에르 이브는 그 상황의 전후에 뭔가 심상치 않은 우여곡절이 숨어 있으리라는 것을 감지해냈다. 그리하여 연인의 죽음으로 마음의 고통이 극에 달한 그 순간, 자기라면 어떻게 했을지 그 입장에 스스로를 이입해보았다. 정황상 모든 게 수긍할 만하다

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했다고, 어떤 일이 있어도 정의롭게 살겠다는 어렸을 때의 꿈과 인간적인 도리마저도 저버렸다고 사실대로 털어놓는 게 옳겠지

그 순간 루이즈는 아직도 자기에게 평안이 찾아오려면 멀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들이 뤼도비크를 떠올리며 추모할 때마다 기분이 참담해진다. 친구들이 추모의 말을 하다말고 머뭇거릴 만큼 그녀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린다.

피에르 이브의 머릿속에는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처음부터 루이즈에게 뭔가 숨기는 구석이 있는 것 같더니 그 실상이 바로 이거로구나. 그러니까 그녀는 모든 사회적 규범과 기본 원칙, 심지어 연인에 대한 감정마저도 저버릴 수밖에 없었을 만큼 원초적인 생존 욕구와 대면해야 했던 셈이다

‘과거를 조작할 수 있는 자는 미래도 조작할 수 있다. 현재를 조작할 수 있는 자는 과거도 조작해낼 수 있다.’

그녀가 지난 시간에 대해 다시 적은 방식은 분명 조건이 유리했지만 도리어 자신의 죄책감만 한껏 부풀리는 쪽으로 흐르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오웰처럼 자기도 도망치고 말았다. 자기 아픔에 이름을 붙여 똑바로 바라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쾌유의 징후이고 쥐라에 온 이후부터 실제로 그렇다고 느껴온 것처럼 성숙해가는 증거일 수 있다.

루이즈는 이제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뉘우친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오세아니아 원주민들처럼 자기 과거가 함부로 침해당하도록 놔둘 수 없다.

앞으로 언젠가 스트롬니스 섬에서 그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날이 올까? 하지만 본능에 따른 선택을 놓고 이제 와서 다시금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 아닐까? 그 문제에 대해 스스로 내사하고 엄격히 추궁해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또다시 자기를 모진 가책 속에 가두는 결과만 낳게 될지도. 어렸을 때 자기는 여주인공이 되기를 꿈꿨다. 하지만 현실은 늘 몽상을 조롱하는 법이다. 그러다 보니 환영을 먹고 자랐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때의 그 ‘꼬맹이’가 아니다.

더는 쥐라에서의 도피 생활이 필요치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차라리 서둘러 이곳을 떠나자. 완쾌한 환자가 몇 분이라도 병상에 더 누워 있어야 한다면 그것만큼 지겨운 일도 없는 법이다. 다시 생활전선으로 돌아가서 직장과 친구, 사랑을 되찾아보자.

오늘은 제이슨 호가 비글 해협으로 들어선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다. 그 배에는 이 여행의 행복감에 도취된 두 명의 젊은 남녀가 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근방의 섬으로 향해가며 자기들에게 계속 행복한 앞날만 기약되어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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