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의 쓸모 -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화
지그문트 바우만.미켈 H. 야콥슨.키스 테스터 지음, 노명우 옮김 / 서해문집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바우만은 선택이라는 단어를 계속 노출시키면서 현대사회의 특징을 설명하고 이게 기반을 두어 사회학의 쓸모를 피력한다.

 

사회학의 소명은 명백하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에 방향 설정을 제공하는 것이다. 사회학은 이러한 소명을, 변화를 철저하게 추적하고 그 결과뿐만 아니라 변화가 요구하는 적합한 삶의 전략들을 꼼꼼히 분석할 때 완수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방향 설정을 수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사회학적 탐구의 본질적인 습관이며, 사회학이 제공할 수 있고 제공해야 하는 서비스라고 저는 믿습니다.” (104p)

 

바우만이 말하는 사회학의 쓸모에 따른다면, 사회학은 한국에서 쓸모가 없음이 분명하다. 최소한 제도권 ''에선 그렇다. 뭐 넋두리일수 있지만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넋두리다. 충분히 논쟁해볼만하다. 내 주장은 이렇다.

 

바우만이 진단한 현대사회의 특징은 생애에 대한 기획 불가능이다. 이는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이 말한 인생설계가 불가능해진 시대와 맥을 함께한다. 고등학교나와도 먹고 사는 것이 가능했던 시대가 대학까지나와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변했다. 일자리를 구해도 일한만큼 벌지도 못하고 정년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정년을 다 채워도, ‘오래 살게 된 덕택에노후불안에 대한 공포는 심해졌다. ‘시키는 대로만 열심히 했는데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이런 전 세계의 특징이 한국에서는 심하게 드러난다. 괜히 신자유주의가 한국에 가장 잘 착륙했다고 하겠는가.

 

자기계발이 시대의 화두가 된 건 이런 배경 때문이다. ‘평범하게 사는 것도 만만치 않은 시대, TV에서는 연애도 코치해 달라는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이는 제도권 밖에서 강연을 듣는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조언을 듣고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기획하고 싶어 한다. 이들은 기존의 길에서 버티려면무엇을 해야 하는지, ‘맞서 싸우려면무엇을 해야 하는지, ‘떠나려면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래서 기획의 방향만을 추상적으로 제시하고 변화가 요구하는 적합한 삶의 전략들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가시적으로 제공하지 않는 학문은 제도권 밖에선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당장 내일부터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말은 사회학이 대중들과 소통할 때 반드시 직면하는 일종의 인데 이것이 최근 더 높아졌고 두꺼워졌다. 그만큼 선택지에 대한 대중들의 갈증을 사회학은 전혀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다. 사회학자들은 꿈꾸는 다락방에 등장하는 ‘R=VD’와 같은 공식을 동화책에서나 등장할만한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 비난하지만, 이 책이 215쇄를 찍으며 100만부 넘게 팔릴 수 있었던 시대배경은 분명한 현실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의 사회학은 묘한 상황 앞에 놓여있다. 사회학적 시대비판이 '날카로워질수록' 사람들은 더 불안하게 될 내 미래를 사회학이 해결해 줄 수 없다는 확신만을 가지게 된다. 사람들은 내일부터 자신이 겪는 불평등이 실질적으로 줄어들기를희망한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지향해야할 가치일 뿐이다. 그 전에 , 이왕이면 나부터평등한 대우를 받아야한다. 이들에게 사회학은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그저 사회학, 사람들한테 참 좋은데! 정말로 좋은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네라면서 CF 흉내만 내고 있을 것인가?

 

중요한 건 다음이다. ‘기획을 원하는 대중의 증가는 사회학의 몇 안 되는, 어찌 보면 유일한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시대진단의 효용이 말소되었음을 의미한다. 사회학은 개인이 속해있는 사회의 특성을 진단하는 걸 업으로 여기고 그것이 개인에게 유용함을 늘 강조한다. 사회학이 있어야지만개인은 자신이 어떤 사회를 살고 있는지 정말로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사람들은 시대를 잘 알고 있다. 시대가 어떤지를 설명하는 사회학의 공기를 접하지 않아도 이미 스스로가느끼고 있다. ‘금수저’. ‘헬조선이라는 단어의 등장은 나쁜 짓 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면 웬만큼은 살아간다는 능력주의의 명제가 허구였음을 어떤 이론적 개념의 도움이 없이도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그래도 참을만하다면서 불평등을 애써 외면했다. 이때는 사회학이 그 희망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불평등이 임계점을 넘겨버리면 희망 없음은 개인의 체험만으로도 이해된다. 반복되는 실패를 경험하면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은 허우적거리는 그 자체로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를 안다. 실패하지 않은 자들은 잘못되면 끝장인 세상에 대한 공포를 예방하고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면서 살아간다. 취업을 위한 9종 세트의 마지막이 성형수술이다. 이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는 사회학자불신의 기예’(art of distrust)가 없어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사회가 이상한 걸 알기에생존을 위해 움직인다. 그 과정의 하나가 제도권 밖 학문을 접하는 것이다. 학교공부만으로는 시대를 헤쳐나 갈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가능한 행동이다. 이들은 자신이 금수저가 아님에도 어떻게 살아야지 인생의 기획이 가능한지를 묻는다. 그래서 이들에게 이 사회가 문제투성이임을 말하는 건 그냥 알고 있던 내용 환기시켜 주는 정도에 불과하다. 이제 사회학의 아는 척은 시효가 만료되었다. 무기를 제공해주지 않는 사회학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p.s. 이 글은 <2015년 후기 한국사회학대회>의 전체세션 발표문 "제도권 밖에서 본 한국 사회학 : 그 곳에 사회학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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