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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의 유골 ㅣ 캐드펠 시리즈 1
엘리스 피터스 지음, 최인석 옮김 / 북하우스 / 199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에는 수만 가지의 추리소설이 있다. 걸작에서부터 보고 있으면 입이 험해지기까지 한 삼류에 이르기까지, 가지각색의 추리들이 골라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명작들은 대부분 수십 년 이상의 시간차가 있는 '옛날' 작품들 뿐이라 추리소설을 즐기는 이들은 목이 마를대로 말랐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 중 한 사람이었고- 그런 나의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준 것은 12세기의 영국 시루즈베리 수도원의 캐드펠 수사였다.
왕이 죽었다. 그에겐 벌써 멀리 시집보낸 외동딸이 있었고, 그의 조카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그 딸이 가만 있을 리 만무하여 사촌 간에 왕위를 놓은 사투가 벌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잠시 그 한가운데에 놓였던 마을 시루즈베리. 그 곳에는 성 베드로- 성 바울 수도원이 그 지역 정신적 지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곳에 소속된 많은 수사들 중 허브밭을 담당하는 본초학자 캐드펠 수사가 장장 20권에 달하는 '캐드펠 시리즈'를 이어가는 주인공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성직자를 꿈꾼 것이 아니라 십자군 전쟁에 나가 몇 십년 간 세상의 단맛과 쓴맛을 상당히 두루두루 겪은 후에 수도원에 영혼을 맡긴 '특이한' 경우다. 그 때문인지 그는 약초에 대해 아주 해박하고 뛰어난 관찰력과 순발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를 바탕으로 그의 손 닿는 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곤 한다. 또한 그런 중에서 드러나는 캐드펠식 세상보기-라고 표현해도 될런지- 는 따뜻하고 평온하며, 희망이 함께한다고 느끼게 된다. 소설임에도 작위적인 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는 것은 단지 역사 속에 엄연히 존재했던 시기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이라거나 주인공 캐드펠이 실제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주연이되 주연이 아닌, 조연이되 조연이 아닌- 각자의 삶을 지닌 사람들이 웃고, 울고, 화내고, 행복해한다. 이런 탁월함은 아무에게나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엘리스 피터스. 작가의 이름이 역사 추리소설을 대표함은 이런 이유이리라.
20권이라는 분량이 부담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이 스무 권의 책은 그 하나하나가 각각 독립된 추리소설이다. 제목도 다 다르고, 내용도 한 권에서 말끔하게 끝나곤 한다. 그러나 기왕이면 처음부터, 이 <성녀의 유골>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출판되는 순서대로 책 속의 시간도 흘러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스무 번의 사건의 공통적 해결사인 캐드펠의 인생도 조금씩 변화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일이 살짝 드러나며 그것이 현재로 이어져서 그의 눈에 드러나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가 각별하다.
세세한 역사 배경 및 지방 및 인물 묘사, 놀라운 반전이 기다리는 결말, 소박하며 현실적인 인물들,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 시리즈를 보노라면 '고급' 추리소설이 과연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우선 첫 권을 손에 들기를. 다 읽고 기대에 못 미쳤다거나 추리소설 치고는 너무 물렁하다거나 하며 덮어두어도, 어느 날 문득 캐드펠 수사의 그림자가 어느 새 마음 한 켠에 머물러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