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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현대지성 클래식 31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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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행복#최대다수의최대행복#도덕#미덕#존스튜어트밀#현대지성#철학

현대 지성의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는 밀의 공리주의 논문, 밀의 연보, 해제, 작품 해설의 순서로 서술되어 있다.
공리주의는 논문이다 보니 꽤나 어렵다. 게다가 19세기 초 영국 지성인들의 글쓰기는 웅변이나 논변이 주종이어서, 반박을 예상하여 양보구문이나 후회 구문을 많이 집어 넣음으로 인해, 문장이 길고 복잡했던 것이 특징이란다. 읽는 내내 필기를 하고 정리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밀의 연보와 해제, 작품 해설이 없었다면 논문을 읽은 후 정리한 내용의 연결고리를 찾는데 꽤나 고생했을 것 같다.
현대지성에서는 존 스튜어트 밀의 연보와 해제를 통해, 밀이라는 인물을 소개한다. 그리고 그가 가진 철학사상의 배경에 대해서도. 밀은 열려있는 철학가이자, 비판적인 철학가이다. 그는 스승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를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비판하면서 그 사상을 발전시켰다.

밀의 공리주의는 행복주의 혹은 질적 쾌락주의로 이해하면 된다고 한다. ‘공리주의’라는 단어를 들으면 공공의 이익이 떠오르기 마련인데, 이 잘못된 개념이 밀의 ‘공리주의’를 이해하는데 장애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작품 해설에서 이를 딱 짚어 설명했기에 잘못된 개념을 깨뜨릴 수 있었다. 공리주의의 공리는 utility, 즉 효용이다. 이 효용에 대해 밀은 도덕원리로부터 시작해서 쾌락과 행복, 행복과 만족, 고상한 쾌락과 저급한 쾌락, 양심, 욕망, 사회적 감정과 이기적 감정, 정의의 개념을 촘촘하게 논증하고 설명하면서 행복에 대해 말하고 있다. 꽤나 복잡하고 어려운 개념이므로 한번 읽기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논문이기도 하다. 역자 이종인은 여러 번 읽어야 함을 강조한다. 한차례 읽었다면, 해제와 작품해설을 참고삼아, 또 다시 읽기를 권유하는 책이라니!
그럼에도 해제와 작품해설을 통해 서구의 철학적 흐름과 공리주의가 나왔던 철학적, 시대적 배경에 대한 해설이 있어서였을까? 자꾸만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비롯한 칸트의 철학에도 호기심이 인다. 궁금증이 일어난다. 그리고 다시 책의 맨 앞장으로 책장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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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저자, 장자크 상페 그림, 박종대 역자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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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 표지 빛깔에 매료됐다. 5월에서 6월로 넘어가는 시기에 흔히 볼수 있는 자연에의 빛깔이다. 20대 중반부터였을까. 이 빛깔이 무척이나 좋았다. 그래서였을까, 반갑게 맞이한 책이다.
책 표지도 인상적이다. 체스판 위에 말의 형상으로 있는 주인공 ‘장’의 모습. ‘장’은 ‘승부’에서 고독한 싸움을 했다. 그는 한치의 실수도 범하지 않으며 상대가 두는 수를 꼼꼼하게 따지면서 이성적으로 상대했다. 그런데 ‘장’과 ‘젊은이’의 체스를 지켜보는 구경꾼들의 관점이 흥미롭다. 아니 ‘장’마저도 구경꾼들과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장’을 응원하는 이가 없으며, ‘장’이 패배할 거라고 생각한다. 체스를 지켜보는 구경꾼들은 도전하는 젊은이에게 매료되었고, ‘장’이 패배하기를 소원했다.
내용을 읽어내려가다, ‘왜그런거지?’라는 의문이 생겼다. ‘장’에게 도전했다 패배를 경험했던 이들의 시기심인가? 그런데 도대체 왜 도전하는 젊은이에게 매료되어 그의 어이없는 수에도 다른 의도가 있을거라며, 고수는 다르다고 생각한 걸까?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장’과 ‘젊은이’의 외모부터, 체스를 두는 방식에 대해 비교한다. 매우 대조적이다. ‘장’은 일흔정도의 노인이며, 왜소하고, 외모에서는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드런난다. 세월의 흔적에는 ‘장고’ 즉 신중함도 함께 한다. 반면 젊은이는 어떤가? 외모도 매력적이지만, 진취적이고 과감하다. 그에게 망설임은 없다. 자신감만이 있다.
구경꾼들은 젊은이와 자신들을 동일시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현실에서는 그렇게 될수도 할수도 없지만 말이다. 이 대목이 그것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자신감에 넘치는 손길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구경꾼들은 눈가가 촉촉해지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다. 자신들은 그렇게 두고 싶지만 감히 두지 못하는 수를 이 젊은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실행에 옮기고 있지 않은가!......저 친구가 지금 목숨을 건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젊은이처럼 두고 싶다. 저렇게 당당하고, 승리의 자신감에 넘치고 나폴레옹처럼 영웅적으로 싸우고 싶다. 장처럼 소심하게 망설이듯이 질질 끌며 두고 싶지는 않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 자신이 실전에서는 장과 똑같이 두기 때문이다. > p34
이 대목을 읽은 후, 구경꾼들은 젊음을 동경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주인공 ‘장’마저도.
젊음은 진취적, 도전적이다. 패배하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 패배의 순간에도 깨닫고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선택의 매순간, 승리를 경험하기도 하고 패배하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인생의 ‘자산’이 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선택을 두려워하고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한다. 패배를 허용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매우 고독해진다. 그리고 지나간 ‘젊음’을 동경한다. 그렇게 ‘늙음’을 느낀다.
구경꾼들에게 도전하는 젊은이는 ‘젊음’으로 표상된다. 그리고 ‘장’ 은 ‘늙음’으로 표상된다. 구경꾸들는 ‘젊음’의 진취성과 패기를 동경하며, ‘늙음’의 완숙함과 신중함을 무시하며 시기했다.
그래서였을거다. 패배한 젊은이가 매우 무례하게 킹을 쓰러뜨리고 패배를 인정하고 자리를 뜬 순간, 구경꾼들은 창피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지나간 젊음을 동경한다고 그때로 돌아가지도 않을뿐더러, 늙음이 갖고 있는 완숙함과 신중함을 무시하였던 자신들의 모습에 그들 스스로도 창피하였을 것이다. 그들 스스로 자신의 현재의 삶을, 다가올 미래의 삶을 부정한거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챔피언 ‘장’ 본인도 그랬다.
<이번 승리는 그의 삶에서 가장 역겨운 승리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 승리를 피하려고 체스를 두는 내내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욕보였고, 그로써 천하의 그 한심한 풋내기에게 항복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p64
챔피언 ‘장’은 실제로 패배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 현재를 부정하면서 생긴 싸움의 과정이었기에.
그리고 그는 체스를 영원히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승부의 정신적 요소를 별로 요구하지 않는 마냥 즐겁기만 한 놀이를 하기로.
이제 그에게 젊음에 대한 동경도, 늙음에 대한 부정도 없다. 바로 현재의 삶에 대한 ‘수용’만 있을뿐. 역겨운 패배를 인정하고, 역겨운 패배과정에서 보인 자신의 모습을 처절히 깨달았기에. 승부를 가르려 하기보다는 인생의 마지막을 놀이의 장으로 만들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가지고 싶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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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 안에는 아이가 산대 길벗스쿨 그림책 18
헨리 블랙쇼 지음, 서남희 옮김 / 길벗스쿨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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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어른들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그거 알아? 어른들은 누구나 자기 안에 아이를 품고 있어.’

우리 아이들은 엄마인 나의 모습에서 ‘어떤 아이’를 발견했을까? 나는 어떤 아이를 품고 있을까? 어른이기때문에 어른인 척 하기 위해서 숨기기에 급급했던 ‘내 안의 아이’ 말이다. 아마 아이들도 작가의 안내대로 엄마 안에, 아빠 안에 있는 ‘아이’를 찾고 있을거다.

사실, ‘어른들 안에는 아이가 있대’라는 제목을 접했을때는 상처받고, 치유되지 않은 어릴적 아이의 모습만을 생각했었다. 나는 그런 ‘어린 아이’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작가 헨리 블랙쇼는 숨기기에 급급했던 ‘어른들 안에 아이’를 다양하게 찾아내었다. 유쾌한 아이, 자신의 욕망과 욕구에 충실한 아이,약하고 겁많은 아이를 찾아내었다. 사실 이 부분들을 읽을 때는 혼자 깔깔깔 웃었다. 어른이 된 이후에는 그런 모습을 감추곤 했었던 듯하다. 그럴싸한 이유를 들이대면서 포장했었다. 또 헨리 블랙쇼는 못된 아이도 찾아내었다. 못된 어른들 안에는 못된 아이가 있다는 문장은 뼈를 때린다. 순간 반성하게 된다. 못된 아이의 모습으로 상대를 대했던 나의 모습은 없었는지, 못된 아이의 모습으로 아이들을 대한 적은 없었는지 말이다. 웃사람이라는 이유로, 어른이라는 이유로 평가하고 단죄하려고만 했었던 적은 없었는지 말이다.

헨리 블랙쇼는 또 다시 안내한다. 어른이 될수록 안에 있는 아이가 더 자주 튀어나온다고 말이다. 성장이 덜 된, 미성숙한 어린 아이의 모습은 어떤 형태든 ‘어른답지 못한’ 모습으로 튀어나오기 마련이라고. 그 미성숙은 평생을 따라다닌다고 말이다. 그 아이가 따라다며 힘들게 하기고 하고 슬프게 하기도 하고, 짜증나게 하기도 한다고. 그러니 자신 안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을 외면하지 말라고 말이다. 오히려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을 아껴주고, 그 어린 아이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주라고 말이다. 그래야만 그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을 반갑게 만들어 준다고.

이 책의 영어 원제는 ‘THE INNER CHILD’ 다. 직역하면 ‘내면아이’. 언제가 부모교육에서 들었던 단어 <내면아이>. 사람의 삶에는 항상 위기와 도전이 놓이게 마련이다. 그럴 때 내가 돌보지 못했던 내 안의 어린아이의 모습이 불쑥 튀어나온다고 했다. 그 어린아이의 모습을 잘 살피지 못한다면, 그때의 감정과 마음에 내 스스로가 귀기울지 못한다면, 자신 앞에 놓인 위기와 도전 앞에서, 무릎을 꿇기 마련이라고.

내 안에 있는 아이는 몇살에 머물러 있을까? 그 아이는 성장하고 있는걸까?
<내면아이>를 돌보면, 그 아이는 성장하고 성숙한다고 했다. 자신의 발목을 잡는 아이의 모습이 아니라 <진짜 어른>의 모습으로 발돋움 할 수 있게.

나를 위해서도, 내가 돌보고 키우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도 나 스스로 직접 풀어야 할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한 숙제가 내 앞에 놓여 있다.

<어른들 안에는 아이가 산대>를 읽고, 어른들은 미성숙해서 항상 자신을 힘들게 했던 자신만의 숙제를 찾아 해결하기를, 그리고 아이들은 자신안에 있는 아이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살피면서 성숙하게 성장하기를 소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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