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 트리플 31
장아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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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틀 시간은 지난 지 오래건만 창밖은 여전히 어슴푸레합니다. 여명은 두터운 먹구름의 윤곽으로나 확인할 수 있을 뿐이고 키 큰 나무들이 가지를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걸 보니 요란한 폭풍우라도 한차례 몰아칠 기세입니다. 밤을 새운 듯 퀭한 눈을 한 여자는 탁자에 앉아 띄엄띄엄 건성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인형에서 바늘을 빼냅니다. 그건 안에 새빨간 솜을 채운 검은 고양이 인형인데, 세 개째 꼬리를 막 붙인 참입니다. 창밖의 세상을 무심하게 일별한 여자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 입술을 떼고 내내 흥얼거리던 멜로디에 느릿하게 가사를 싣습니다.
찐짠 찌가찌가찐짠 찐짠찐짠 하더라.
단편 셋과 에세이 하나를 엮는 트리플 시리즈로 나온 장아미 작가님의 <고양이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를 읽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침대맡 협탁 위에 놓인 고양이 표지의 책을 보았을 때 제 머릿속엔 저런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어딘가 쓸쓸하고 외롭지만 한숨 한 번이면 그럭저럭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핏 보면 폭신하고 귀여운 인형인데 깊이 들여다보면 뜨겁고 매혹적인 빨강으로 가득합니다.
일 년에 한 번 겨우 만나는 친구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나지만, 안도감이 잦아들기도 전에 찾아오는 건 그와의 이별입니다. 흥겹고 시끌벅적한 생일잔치는 주인공만 덩그라니 남겨둔 채 끝이 나기 마련입니다.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위로하던 연인들은 세상의 편견에 치명상을 입습니다.
세 편의 작품은 이렇게 상반된 심상들로 독자의 마음을 뒤흔듭니다. 아름다운 문장들은 우리를 따뜻하게 포옹하지만 이내 감췄던 손톱으로 등을 긁고 파헤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세상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지만 동시에 어느 하나 때문에 세상이 뒤집히지도 않습니다.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노쇠한 신이 생을 다한 자리에는 어린 신이 태어날 것이며, 기다림이 이어지는 한 작별은 언제까지고 미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책에 수록된 심완선님의 해설이 너무 좋아서 (특히 <능금>의 감상은 이 해설까지 읽어야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망설여졌지만, 부족하나마 제 나름의 감상을 남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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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수거함 생각학교 클클문고
장아미 지음 / 생각학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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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아미 작가님의 전작 <별과 새와 소년에 대해>의 저자소개글에서 “있으라고 쓰는 것만으로도 그 자리에 존재하도록 만드는 마법을 믿는다.”라는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작품의 환상적인 분위기와 나란히 어울렸기에 더욱 그랬다.
현실의 커튼 뒤에 숨어 있던 환상 세계로 통하는 창문을 열어 형형색색의 단어들이 바람을 타고 들어오게 하는 작가님의 마법은 <마음 수거함>에서도 성공적이다.
자신의 실수로 인한 위기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소녀, 꾹꾹 덮으려 했지만 결국 밝혀지고 마는 상처들, 다툼과 오해를 딛고 의지가 되는 동료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한 소녀의 성장. 훌륭한 재료들의 완벽한 레시피다.
재미있다고 느꼈던 것은 ‘사용 설명서’의 효과였다. 정체 불명의 나무 상자에 딸려 있는 사용 설명서는 마음 수거함의 사용 방법을 가르쳐 주고,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경고함으로써 앞으로 벌어질 사건에 대한 복선이 된다. 그리고 그에 앞서 이 단순해 보이는 상자, 그러니까 마음 수거함이 실제로 작동하는 마법의 물건이라는 믿음을 심어 준다. 의심을 잘라내는 데 이보다 좋은 장치가 또 있을까.
여러 가지 마음에 각자의 색이 있다는 설정이 특히 좋았는데, 비록 그게 작가님이 최초로 고안해 낸 설정은 아닐지라도, <마음 수거함>의 내용에 더할 나위 없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 살면서 겪는 일로 생겨나는 다양한 색의 마음들을 비워 내지 않고 자기 안에 꼭꼭 쌓아두기만 한다면, 모든 색이 뒤섞여 결국은 검정색이 되고 말 것이니까.
아름다운 색들로 칠해진 삶을 이어가려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내보내야 한다. 사건은 다가오고 질문은 계속 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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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 한정 도서부 위픽
연여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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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도서관들이 문을 닫고 관련 예산이 삭감된다는 소식이 이어진다. 일찍이 “나는 늘 천국이 있다면 그곳은 일종의 도서관일 거라 상상했다”라던 보르헤스의 말 대로라면, 우리는 천국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선지 모든 페이지, 모든 문장마다 도서관을 향한 애정이 묻어나는 연여름 작가님의 <2학기 한정 도서부>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사서 교사의 계획적인 강요에 가까운 권유에 따라 학교 도서관에서 봉사활동을 하게 된 중3 도하는 한적한 도서관에서 마음이 편해지는 아웃사이더다. 연여름 작가님은 이 길지 않은 단편에 몇 개의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겹쳐 두었다. 그 중 한 줄기가 바로 이런 성격의 도하가 이전 학교에서 겪었던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걸음을 내딛는 성장 스토리다. 도하는 어쩌다 혼을 보는 재능을 갖게 되었고, 무슨 일이 있었길래 유급과 전학을 하게 된 걸까.

이 성장 스토리에 흥미를 배가시키는 건 사물함에서 발견된 수수께끼의 포스트잇 메모를 둘러싼 미스터리 요소다. 알쏭달쏭한 내용의 메모를 학생들 사물함에 넣은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왜 그런 일을 한 걸까. 손글씨의 주인을 찾으려는 도하의 계책은 재미있고, 메모에 얽힌 사연은 감동적이며, 사연의 주인공을 돕는 장면은 짜릿하다.

고민 많고 변화하는 모습의 도하와 달리 싱거울 정도로 엉뚱한 캐릭터의 수정, 그리고 끝내 베일을 완전히 벗지 않는 사서 교사. 세 명의 합이 세발자전거처럼 안정적으로 이야기를 끌고간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이들은 비포장도로를 신나게 달려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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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 새와 소년에 대해
장아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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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인과 함께 볼 영화를 고르던 중이었다. 그분께서는 세상 모두가 무너진 재난 상황에서 아파트 하나만 멀쩡히 남았다는 설정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셨고, 그 영화는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어떤 이야기에 대해 ‘말도 안 돼’라고 느끼는 순간 그 이야기는 전혀 다른 감상을 낳게 되거나 감상 자체가 불가능해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이야기 안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말도 안 돼’라고 반발하는지, 투덜거리면서도 온전히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이야기의 전개 방향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 책장을 넘기는 독자의 마음가짐까지도.

장아미 작가님의 장편소설 <별과 새와 소년에 대해>는 소원을 비는 과정에서 벌어진 실수로 인해 새로 변해버린 친구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소녀들의 이야기이다.

김이삭 작가님이 발문에 언급한 대로 서양식 판타지와 달리 현실에 곧바로 맞닿아 있는 동양식 판타지의 특징 혹은 정서 때문일까. 초현실적인 상황에도 뒷걸음치지 않고 손전등을 비추며 귀를 기울이는 등장인물들 때문일까. 독자들은 <별과 새와 소년에 대해>에 등장하는 성주, 조왕, 업 등의 토속 신앙에서부터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새, 도시의 넋으로 태어난 소녀, 달그림자 긷기 의식 같은 요소들을 페이지 밖에서 낯설고 신기하게 구경한다기보다는 세 소녀와 함께 손을 잡고 새를 찾아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징검다리를 건너게 된다.

고택을 허물고 다시 지으면서 나무며 기와를 그대로 가져다 쓴 집에 사는 덕분에 자연히 가택신들과 함께 살고 있는 희미, 내키지 않았던 신도시로의 이사 후 탐조(探鳥)에 빠져든 민진, 그리고 옛날 옛적 호랑이를 부리던 산신처럼 고양이들과 어울리는 수수께끼의 인물 새별.

서로 다른 성격과 전사(前史)를 지닌 캐릭터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같은 목표를 향해 보폭을 맞추어 앞으로 나아가는 최고의 성장 스토리. 거기에 세심하게 선택된 어휘들이 그려내는 환상적인 장면들은 제아무리 상상력이 부족한 독자라도 생생하게 볼 수 있을 정도여서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

독서를 마치고 김이삭 작가님의 발문까지 정독한 다음, 소설의 제목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별과 새와 소년에 대해. 소설 속에서 새와 소년이 지목하는 대상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별은? 세 소녀 중 하나인 새별을 가리키는 건 아닐 테다. 균형이 맞지 않으니.

자신을 비추는 빛을 반사해서 반짝이는 ‘별’은 어쩌면 다양한 소원과 삶과 죽음이 함께 하는 현실의 모습을 비추는 ‘환상’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환상과 현실은 매우 비슷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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