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하면 죽는다 - 비밀이 많은 콘텐츠를 만들 것
조나 레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윌북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총평


작법서로 시작해서 철학서로 끝나는 책.


뜻밖에 깊은 삶의 통찰을 주는 책


좋은 책은 결국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책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좋은 책이다.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미스터리이자 콘텐츠는 인생이라는 당연하면서도 역설적인 사실을 가르쳐준다.



정말 지루하면 죽을까?



<지루하면 죽는다>의 원제는 Mystery다. 미스터리가 가지는 힘에 대한 내용이다. 그런데 출판사 측에서 제목을 참 자극적으로 뽑은 것 같다. 미스터리가 죽고 사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길래 제목을 '지루하면 죽는다'고 지은 걸까?




정말 지루하면 죽을까? 인간은 지루한 걸 지독히도 싫어한다. '지루해 죽겠다'라는 말은 너무나 쉽게 입에서 튀어나온다.


예전에 어떤 실험이 있었다. 사람을 3일 동안 방에 가둬두는 실험이었다. 그에게는 어떤 자극도 주어지지 않았다. 내다볼 창문도 없고 책도 없고 TV도 없었다. 3일만 견디면 상당한 금액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 사람은 굉장히 힘들어했다고 한다.


교도소에서 가장 큰 형벌은 독방에 갇히는 것이다. 어둡고 좁고 더럽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그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 지루한 건 사람을 반쯤 죽여놓는다. 하지만 정말 죽이는 것은 아니다.



지루하면 죽는 건 사람이 아니다. 


그건 바로 콘텐츠다.


지루한 콘텐츠는 죽는다.


지루하지 않는 콘텐츠만 살아남는다.


그리고 지루하지 않은 콘텐츠의 비밀은 


미스터리다.



인간의 뇌는 미스터리를 좋아한다


인간의 뇌는 알 수 없는 것에 끌린다. 왜 모바일 게임 랜덤 가챠가 그리도 인기를 끌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왜 카지노의 슬롯 머신이나 빠칭코에 사람들이 그리도 환장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왜 매주 복권을 사는 사람들이 몇 백만명이나 되는가?


인간의 뇌는 알 수 없는 결과에 환장한다.


도파민계에는 묘한 특징이 있다. 인간의 뇌는 항상 문제 해결과 향후 예측을 시도하며 패턴을 만드는 기계지만,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은 정확한 예측이 아니라 예측 오류, 즉 예상하지 못했던 보상과 뜻밖의 사실이다.


<지루하면 죽는다> 27p


그런데 우스운 것은 '하나도' 예측할 수 없으면 싫어한다. 인간의 뇌는 단서가 있는 예측을 좋아한다. 예측할 단서가 있고 그 의미를 해석하길 즐긴다. 그리고 자신의 예상이 틀렸을 때 미친듯이 기뻐한다. 마치 추리소설을 읽을 때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범인이 아니면 뒤통수를 맞고 짜릿함을 느끼듯이.


여기서 중요한 건 뒤통수를 맞았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건 독자에게 중요하다. 창작자에게 중요한 건 독자가 '추리를 했다'는 사실이다. 독자는 충분히 추리를 즐긴 다음에 뒤통수를 맞길 바란다. 아무것도 모른 채 오리무중, 난해하고 알쏭달쏭한 내용 전개만 보다가 갑자기 범인을 보고 놀라길 바라는 추리 소설 독자는 없을 것이다. 독자는 '과정'을 함께 하며 정보를 제공받고 예측을 한다. 그것이 진짜 재미다. 반전은 그 다음 일이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탐정소설의 묘미는 체포 그 자체가 아니라 추격전이라 했다. 애드거 앨런 포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건 살인 자체가 아니라 그 살인범을 잡기 위한 수사 과정, 즉 미스터리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뭔가를 '모른다'는 점에 끌리고 그것을 즐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단서는 주어져야 한다. 독자는 기꺼이 이야기라는 숲에서 길을 찾고 싶어하지만 대책없이 헤매고 싶은 것은 아니다. 빵부스러기는 남겨 두어야 하는 것이다.




난해해서 끌리는 것들



(카니예 웨스트의 'Runaway'- 도입부 1분만이라도 들어보세요)


카니예 웨스트의 'Runaway'는 모두의 예측을 깨트리는 곡이었다. 힙합 곡임에도 피아노 소리, 그것도 건반 한 개를 치는 소리가 이어진다. 그러다가 기대하던 박자보다 이른 순간에 갑자기 드럼이 치고 들어온다.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기대하는 전개가 있다. 이쯤에서 이 박자에서 정확하게 듣기 좋은 음이 들어오길 기대한다. 이게 Pop이다. 그런데 그것을 깨트리는 음악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음악들이 전설로 남는다. 

곡의 흐름 뿐 아니라 가사도 마찬가지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이야, 싶은데 끌리는 노래. 비틀즈의 후기 곡들이 그렇다. 

(콘플레이크 위에 앉아 밴이 오길 기다린다고?)


당시 마약을 먹고 지은 곡들이라 가사가 정말 말도 안되는 내용들이 많은데 어째서인지 그 가사가 끌린다. 오히려 신선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충분히 신나고 멜로디를 따라갈 수 있는 곡이다. 


파격적이고 난해하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는 정도의 곡. 


뇌의 반응이 가장 활발해 지는 것은 '난해한' 지점이라고 한다. 


바흐의 푸가를 들을 때, 의미를 해석할 수 없는 시를 읽을 때,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음악을 볼 때, 뭘 그린 건지 확실히 알 수 없는 그림을 볼 때. 어떻게 한 건지 알 수 없는 마술을 볼 때. 패턴을 알 수 없는 암호를 볼 때. <블레어 위치>처럼 기존의 장르 문법을 깬 파격적인 영화를 볼 때. 자동차 광고 임에도 카피 문구에 '고물(Lemons)'이라고 써놓은 폭스바겐 광고처럼.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햄릿처럼. 묘한 표정의 모나리자를 볼 때처럼. 


이것이 아름다운 예술 작품의 역설이다. 그들은 이해하기 쉽거나 매끄럽지 않다. 우리를 깊이 건드리는 것은 쉬운 콘텐츠가 아니다. 구두점이 없는 시, 전례가 없는 음악, 원칙을 깨는 동화, 기존의 장르적 클리셰를 거부하거나, 영리하게 비꼬아 활용하는 영화에 주목한다.


<지루하면 죽는다>, 146p



이해 할 수 없어서 다시 보게 되는 것들



컨텐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한번 보고 마는 것, 자꾸만 보게 되는 것.


자꾸만 보게 되는 것들은 쉬운데 중독성이 있어서 이기도 하지만(상어가족 노래처럼) 이해할 수 없어서 자꾸 보게 되는 것들도 있다.


쉽게 예를 들어보겠다.



<인셉션>. 엔딩의 의미를 확실히 몰라서 자꾸 보게 된다. 마지막에 팽이가 돌고 있는가, 돌다가 멈췄는가? 알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보게 되고 또 볼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



<매트릭스>. 의미심장한 대사들, 설정들, 상징들, 심지어 영웅의 서사까지.(네오는 죽었는가 살았는가? 우리는 레저렉션이 나오기 전까지 알 수 없었다.) 볼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감명을 받는다. 단지 영상적인 밈으로써뿐 아니라 정신적인 여정까지 계속해서 소비된다. 


<반지의 제왕>. 세계의 창조부터 시작하는 그 위대한 서사는 때로 따라가기 벅차고 다 기억할 수도 없다. 흔히 아는 영화 3부작만 해도 볼 때마다 감명을 받고 또 그 안의 설정이나 세계관을 음미하고 탐구하게 된다. 그러니 자꾸 보게 된다. 영화도 드라마도 게임도 계속 나오고 팬 아트로 창작되고 소비된다.


<듄>. 복잡한 세계관과 설정, 주인공의 난해한 인생역정까지. 


폴이 예언을 실행했기 때문에 예언이 실현되었다. 하지만 실행하지 않았다면 예언은 예언으로 남았을 뿐이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게 옳은 일이었을까? (마녀의 예언을 듣고 실행한 <맥베스>와 비슷하다. <해리포터>의 볼드모트 또한 예언과 관련되어 있다.)


드라마가 되고 영화가 되고 여러가지로 변주되는 대작들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세월이 지나도 계속해서 소비되고 재창작되는 이유는 한 번에 쉽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저자는 '한계 없는 게임'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고전, 예술작품, 시들은 한계 없는 게임이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자꾸만 들여다보고 해석하고 변주한다.


선명한 것이 분명 더 쉽다. 하지만 우리가 <화이트 앨범>과 J.D. 샐린저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계속 다시 듣고 읽는 이유는 신탁처럼 해석해야 하는 메시지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에서 오는 쾌감 때문이다. 작품 속의 진리는 살아있고 계속 바뀌고 있다. 우리처럼.


예술은 거울이다.


<지루하면 죽는다> 214p



한계 없는 게임



학생들에게 고전을 가르치는 이유는 

미지의 무언가를 맞닥뜨리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예요.


<지루하면 죽는다> 241p



한계가 있는 게임은 무엇일까?


그것은 승자와 패자가 있는 게임이다. 마치 드라마 <오징어 게임>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한계가 없는 게임은 승자도 패자도 없고 오로지 플레이어만 존재하는 게임이다. 마치 어린 시절에 골목에서 하던 게임처럼. 이기고 지는 게 아니라 게임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계가 있는 게임은 정답을 찾아야만 하는 수능의 언어영역이고 한계가 없는 게임은 그저 좋아서 작품을 읽고 해석하려고 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다.


한계 없는 게임은 우리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바로 '경외감'이다. 우리를 압도한다. 


'이걸 어떻게 하지?' 싶은 것들이다.

(전율과 눈물을 불러오는 장인의 정성들)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모르겠는 시, 설명할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마술 트릭, 어떻게 그렸는지 알 수 없는 그림, 어떻게 지었는지 알 수 없는 교회 건축물, 세 번째로 다시 보는데 눈물이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영화. 이보다 더 명백한 미스터리가 있을까.


<지루하면 죽는다> 243p


이보다 더 명백한 미스터리가 있다. 

그건 바로 삶이다. 

삶이야말로 모호함, 난해함, 미스터리, 한계 없는 게임의 결정체다. 

예술이란? 사람이란? 삶이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 우리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는 그것들. 정답이 없는 그것들. 전 세계의 사람들이 매일 매달리는 미스터리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생은 한계 있는 게임으로 보인다. 실패 아니면 성공, 부자 아니면 가난, 가진 자 아니면 못 가진자. 이런 식으로 세상에 대한 인식을 쪼그라트리고 나와 타인을, 인간의 삶 자체를 극단적으로 평가한다. 미스터리가 자리잡을 곳이 없다. 우리는 인생에는 성공 아니면 실패만 존재할 것처럼 달려간다.


그러나 인생은 그런 이분법적 사고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모호하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인생은 한계가 없는 게임이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우리는 스스로를 불행에 밀어넣는다. 



저자는 미스터리와 더불어 살아가라고 말한다. 타인에게 미스터리가 있음을, 삶에 미스터리가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건강한 마음을 가지게 해준다고.



예술은 우리에게 미스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다. 긴장감 넘치는 반전과 다층적인 세상, 불투명한 등장인물과 모호한 대사를 통해 예측 오류를 즐거이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훈련한다. 확실한 증거를 찾는 일보다 의구심을 갖는 게 더 쓸모 있으며, 알아차림의 상태에 머무는 마음챙김이 더 즐겁다고 일깨운다. 우리는 기쁨의 근원이 과정에 있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알아가려는 시도에 있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사고 방식이 필요한 이유는 삶에서 미스터리를 피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미지의 영역은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완벽한 진실을 원하지만 사실 그런 건 없다. 가장 그럴 듯한 이론은 부정당하고 사실은 변조되며, 결국 우리는 거의 모든 것에서 오류를 범한다. 이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루하면 죽는다> 294p


우리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무섭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은 분명 두려운 일이다.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고 피하는 것은 '불확실'이다.


현실이 항상 유동적이며 우리가 아는 것은 이 세상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은 사람을 겸허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겁에 질리게 한다. 이것이 '마음놓침'이다.


미스터리를 좋아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미스터리를 거부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런 식으로 겁에 질려 마음을 놓치는 바람에 우리는 수많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음을 놓치면 사람은 절대적인 것에 매달리게 된다. 삶을 한계 있는 게임으로 만든다.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본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아요. 

훨씬 미스터리하죠.


<지루하면 죽는다> 286p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겁에 질리지 않고 우리 삶의 미스터리에 대처해 나갈 수 있을까?


저자는 '재미를 느끼는 것'이 열쇠라 말한다. 마음챙김을 실현하는 방법은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라고.


무언가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이유는 잘 모르기 때문이에요. 아직 미스터리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뭔가에 완전히 몰입했을 때, 그 느낌을 잊지 말고 항상 이런 느낌이라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환기해야 해요. 우리에게 살아있는 기분과 재미를 느끼게 하고 에너지를 불어넣는 것은 모르는 것들이거든요.


<지루하면 죽는다> 287p, 엘런 랭어(마음챙김 연구자)


모르는 것이 우리를 겁에 질리게 하고 또한 동시에 힘이 나게 하고 살아가게 한다는 것은 행복한 아이러니다. 


단서가 주어지지 않는 추리는 우리를 절망하게 하기에 힌트가 필요하다. 우리네 인생이란 미스터리에는 힌트가 있는가? 차분히 생각해 보면 있을 것이다. 재미, 취향, 가치관, 새로움, 흥미, 목표, 꿈, 의미 등등...그렇기에 즐겁게 예측해 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우리가 인생을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으로 확정지어버린다면 인생은 지루해진다. 성공과 실패 사이에 모호하고 난해한 그 결들을 즐기고 탐구할 줄 안다면 우리의 인생은 훨씬 재미난 것, 흥미로운 것이 될 것이다. 한계가 없는 게임이 될 것이다. 더 살 맛이 나고 살아갈 용기가 날 것이다.


그렇다면 지루하면 죽는다는 것이 맞는 말인 셈이다. 


인생을 지루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자. 그것이야 말로 우리를 죽이는 일이 될 테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