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걸작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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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부와 명예를 욕망했던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 1799~1850) 20대의 나이에 출판업과 인쇄업 사업에 손댔다가 큰 빚을 지게 되고, 그 빚을 해결하기 위해 하루 수십 잔의 커피를 마셔가며 글 쓰는 기계처럼 살았던 인물이다. 그 와중에 탄생시켰던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 두 편의 단편, 『영생의 묘약』(1830)과 『미지의 걸작』(1831)을 ‘녹색광선’이 에머럴드 빛 하드커버 안에 보석처럼 담았다. 2019년 오늘, 190년이 지난 발자크의 두 편의 정수(精髓)를 우리가 다시 읽어봐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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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생의 묘약』은 17세기 이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전설적인 인물, 돈 후안(Don Juan)의 미스터리하고 기괴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부친 바르톨로메오가 임종 직전에 돈 후안에게 넘겨준 묘약은 세상의 진리를 밝혀준 ‘선악과’가 되었고, 돈 후안은 거침없는 삶을 게임처럼 살아보게 된다. 어김없는 세월의 위력 앞에 죽음으로 굴복하기 직전, 돈 후안은 아들 펠리페에게 신비의 수정병 액체를 자신의 온몸에 발라줄 것을 유언하며 사망하지만, 심약한 아들의 실수로 얼굴과 한쪽 팔만의 영생을 얻고 만다. 그가 게임처럼 데리고 있었던 여인 ‘도나 엘비라’의 이름을 외칠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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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걸작』은 그야말로 19세기 미학의 ‘향연’이다. 16세기에 실존했던 화가 ‘포르뷔스’와 이제 막 화가의 삶을 시작한 청년 ‘푸생’, 그리고 미지의 인물 ‘프렌호퍼’ 세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 발자크는 자신이 담을 수 있는 모든 미학적 담론을 갤러리처럼 곳곳에 전시한다프렌호퍼는 끊임없이 “살아 있는 여인”을 화폭에 담아야 한다며 광기인지 천재의 한탄인지 모를 모호한 외침을 질러댄다. 푸생의 아름다운 연인, 뜨거운 피가 돌며 살아있는 여인 질레트를 보게 된 프렌호퍼는 마침내 가려 두었던 그의 작품을 꺼내 보여주게 되지만, 화폭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여인 질레트의 울음소리만 남겨진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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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환상특급(Twilight Zone)’ 시리즈에 어울릴 법한 이 두 이야기는 무려 190여 전에 태어났다. 그 아득한 시간과 대륙을 넘어서는 공간 사이에서 달라지지 않은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생각한다. 욕망을 향한 성공과 실패가 겹쳐 울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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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묘약』은 죽음을 이기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그린다. 이야기 속에는 절반의 성공으로 인한 완벽한 실패의 모습이 담겨 있다. 『미지의 걸작』에는 예술의 ‘자연의 모방(mimesis)’을 이기고 싶은 예술가의 욕망을 그린다. 이야기 속에는 완벽한 성공으로 인한 절반의 실패의 모습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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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을 살아가는 우리도 “영생의 묘약”을 꿈꾼다. 신기술의 시대가 가져올 미래 앞에 선 우리의 욕망과 닮아 있다. 사람의 인지와 몸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인체에 장비, 기기를 착용시키거나 수술로 장착하게 하는 인간 증강(Human Augmentation)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시험관 아기들은 이미 중년이다. 인문 대학 강의실마다 포스트휴먼 (Post-Human) 이야기가 들린다. 우리는 여전히 죽음을 이기고 싶은 돈 후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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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걸작』이 발표되기 5년 전인 1826프랑스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Joseph Nicephore Niepce)가 세계 최초로 사진을 촬영하는 데 성공한다. 사진의 등장은 당대 지식인들에게 큰 두려움이자 미지의 희망이었다. 프랑스 화가 드라로쉬블라맹크, 시인 보들레르 등은 사진은 예술의 영역으로 넘어와서는 안된다며 반기를 들었다들라클루아와 앵그르는 사진에 대한 온건한 입장을 취했으며, 신고전주의 화풍을 이끌었던 장 레옹 제롬은 “사진은 예술이다. 사진은 진리를 만나게 해 준다”며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현대 미술의 기수, 폴 세잔은 “재현하는 것으로는 사진과 경쟁할 수 없다. 우리는 표현해야 한다. 화가의 머릿속에서 재구성한 자연을 그리는 것”이라며 사진을 넘어서는 예술을 찾으려 했다. 사진의 등장으로 더 이상 사실적인 묘사를 ‘재현’하는 일에 흥미를 잃은 (의미가 상실된) 일부 화가들이 인상주의 화풍을 이끌기 시작했던 것은 발자크가 사망한 후 20여 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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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걸작』을 읽은 폴 세잔은 “내가 바로 프렌호프다!”라 할 만하다. ‘모더니티(Modernity)’라는 말을 처음 한 것으로 알려진 발자크는 인상주의 화풍이 당도하기도 전에, 추상표현주의가 미술시장을 장악하기도 훨씬 전에 이미 텍스트로 먼저 ‘추상미술’을 빚어낸 셈이다. 플라톤의 이데아(Idea)로부터 발원한 이성주의와 본질주의가 르네상스를 거쳐 인본주의로 주조되어 “자연의 모방과 재현”이 전부라고 믿었던 시대에 발자크는 앞으로 수많은 ‘프렌호퍼’들이 당도할 것을 예언한 것이다. 웬만한 닮은꼴, 그럴듯한 표현에는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고 이면의 본질을 찾고 싶어 하는 욕망은 마침내 사랑하는 나의 “완벽한 여인”의 본질을 탐구하겠다며 메스로 배를 갈라 오장육부를 꺼내어 분석하는 극단의 모더니스트를 예언하고 있다. 커다란 캔버스에 단 하나의 점을 찍은 작품이 수억 원에 팔리는 예술세계가 올 것을 그는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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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만간 그는 그의 그림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겠죠.” 푸생이 소리쳤다. (본문 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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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년 전 사진의 등장으로 갑론을박하던 지식인들의 모습은 2018년 대한민국 서울에서도 재현되었다4차 산업혁명시대 예술과 기술의 미래’ 토론회에서는 인공지능(AI)이 인간 수준의 예술품을 만드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인공지능 환경에서 예술의 본질에 대한 질문들이 오고 갔다. AI는 예술에 대한 도전인가 아니면 과거 사진이 그러했듯 예술 영역의 확장 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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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생의 묘약』이 죽음을 이기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미지의 걸작』은 ‘자연의 모방(mimesis)’을 이기고 싶은 예술가의 욕망을 그렸구나 하며 책을 덮을 무렵, 나에게 다른 ‘미지의 걸작’이 손을 흔든다. 여인이다.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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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편의 이야기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내들의 이야기다. 남성들의,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세계가 담겨 있다. 돈 후안을 마지막까지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던 어린 아내 도나 엘비라, 그리고 젊은 푸생의 아름다운 연인 질레트가 이야기 속 유일한 여인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여인들이 모든 이야기의 결말이라는 것. 죽어 있는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영생을 얻은 머리’가 성직자의 머리를 물어뜯으며 외쳤던 말은 “도나 엘비라를 기억하라!”였으며이제야 벌거벗은 연인이 푸생을 향해 외쳤던 말은 “나를 죽여줘!() 이미 난 당신을 증오하고 있는 것 같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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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여인들이 부활하고 있다. 아니 이제야 ‘발견’되고 있는 시대. 발자크는, 이 영험한 사내는 이미 그 두려움을 몸서리치게 예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이야기의 결말은 여인들이라고. 여인들이 바로 『미지의 걸작』이니 조심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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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러니 2019년 오늘, 당신이 초록광선의 『미지의 걸작』을 읽어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게 않겠는지… 아주 맑은 수평선 너머로 해가   가끔 보인다는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녹색 빛을 응시하는 새끼 고양이의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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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9-02-06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잘 읽었어요. 미지의 걸작 담아갑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냥이 넘 귀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