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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사냥꾼 - 실패할 시간이 없다
피터 피오트 지음, 양태언 외 옮김 / 아마존의나비 / 2015년 7월
평점 :
1. 원제는 No time to lose 인데, '바이러스 사냥꾼'이라는 멋들어진 제목으로 재 단장했다.
2. 사실 이런 연유로 해서 나는 이 책을 중복 구입하는 뻘짓을 저질렀다.
하나는 Kindle 원서 (아마존에서 클릭 한 번이면..), 하나는 이 번역서..
나중에서야 알고서 좀 난감했는데, 결국 번역서를 새 책인 상태로 지인에게 선물했다.
이미 Kindle version 으로 반쯤 읽은 상황이라..
3. No time to lose.. '실패할 시간이 없다'로 직역되지만, 원래는 '꾸물거리지 마라, 빨리빨리!'라는 뉘앙스에 더 가깝다.
읽기 시작할 때,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하고 궁금했었는데, Piot 박사의 초보 의사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좌충우돌기를
읽다보니, 이분 참... 엄청나게 바쁜 삶을 살아오셨구나 하고 실감을 하면서 그 제목이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4. 이분은 특히 에볼라 바이러스의 발견자로 유명한데, 당연히 에볼라 바이러스의 발견과 투쟁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을 거라 예상하며 읽고 있었다. 그런데, 어라?
책 진도가 1/3쯤 나갔을때 에볼라 이야기는 다 끝이 나 버린다. 응? 그럼 나머지는 무슨 얘기? 하고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는 더욱 엄청났다.
정말, 이분 슈퍼맨이다.
5. AIDS 의 임상적/역학적인 숱한 지식들을 직접 아프리카에서 부딪히고 캐 고생하시면서 거의 모조리 확립하신다.
이 분이 아니었으면 지금도 AIDS 는 무조건 동성 성관계에 의해서만 생기는 것으로 굳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아프리카는 미국/유럽과는 전혀 다른 양상 - 이성간 성관계, 산모-태아 전파, 성병과의 동반 등등-들이 다양하게 있음을 제대로 증명하신다.
게다가.. HIV 에 잘 걸리지 않는 그룹들, 그리고 HIV 에 걸리더라도 아무일 없이 잘 생존하는 long-term nonprogressor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사실을 밝혀낸다.
이렇게 방대한 AIDS 지식을 마련하는데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가 적나라하게 써있다. 직접 뛰면서 fact 로서 확립한 것. 그 누가 반박할 수 있는가?
6. 이 책은 2/3 쯤 지나면 바이러스 사냥(?)을 하는 얘기는 사실상 끝나고, WHO 등의 보건기구에서 공무원(?)으로서
bureaucracy 를 비롯한 각종 경직된 체계와 관료들과의 갈등과 싸움, 아프리카 독재자들과 부조리한 국가 체제와의 갈등
(주로 쥐어 터지는 쪽이었지만...) 등의 얘기로 채워진다.. 그런데, 이 부분들이 심하게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그래서 마지막
1/3은 좀 건성건성 읽었다.
7. 내가 종사하는 분야에서 이런 위인들을 책으로나마 본격적으로 만나보는 일은 자주 가질 필요가 있다. 정말 이 분의 일생에 걸친 고생담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면서 내 자신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8. 그런데... 일반 대중들에게 과학교양서로서 많이 팔렸을 것 같진 않다는 우려가 들긴 한다. 이 분야에 접하는 이들이 아니면 꽤 지루한 책일 수도 있거든. 심지어 나도 후반 1/3이 지루했으니..
(지금 이 리뷰를 쓰고 있는 시점인 2016년 5월 28일 현재, 단 한개의 리뷰도 올라오지 않고 있다. 심지어 그 간단한 100자평 조차도..)
그래도 동종 분야에 종사하시는 분들에게는 권하고 싶은 책이다.
9. 한걸음 물러나서 보면 어느 과학자의 캐고생담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humor 를 잃지 않고 경쾌한 분위기로 기술하고 있다.
- Piot 박사가 약관의 나이로 벨기에에서 콩고(자이레)로 갔던 당시, Piot 라는 이름으로 자기 자신은 듣보잡이었고 국대 골키퍼 Piot 가 유명인이었다고 자학 개그를 시전하신다.
나, 그 골키퍼 기억한다. 1972년 유로 준결승에서 당시 베켄바우어와 게르트 뮐러가 뛰던 서독을 만나 1-2로 깨지는데, 그때 골키퍼였다.
나름 벨기에에서는 레전드 골키퍼라고 하더라.
- 에볼라 병은 콩고의 에볼라 강에서 따온 이름이라는데.. 진실은.. 에볼라 강은 억울하다는 것!
원래 신종 전염병 이름은 발생 지역 이름을 따서 짓는 게 관례였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에볼라 창궐지역이었던 얌부쿠로 지으려고 했다가, 그 지역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줄 것이라는 우려때문에 취소했다 (마치 영화 '곡성' 때문에 곡성 분들이 곤혹해 한다는 것처럼).
그래서 두루뭉수리하게 '콩고 열'로 지으려고 했더니, 이미 '콩고-크리미아 열'이라는 병이 선점(-_-;).
그래서 동료들과 저녁에 술 한잔 걸치면서 지도를 검색하다가 얌부쿠에서 약간 떨어진 에볼라 강이 눈에 띄여서 그걸로 지었다고 한다. 듣는 에볼라 강 입장에선 무슨 날벼락인가.
- 피옷 박사가 겪은 고난 중에는 아프리카 독재 국가에서 부당하게 숱한 인권유린을 당한 얘기들이 자주 나온다. 이 조차로 웃음으로 승화시키신다.
가장 웃겼던게... 현지 경찰들에게 '파키스탄' 사람으로 오인 받아서 체포된 사건이 아니었을까?
분명히 백인인 피옷 박사 입장에서는 파키스탄인으로 오해 받았다는 게 얼마나 황당했을까?
10. 에볼라 얘기 후반부에 가면, 첫 논문 발표때 피옷의 상사가 자기 이름을 슬그머니 빼고 투고하려고 했던 걸 들키는 장면이 나온다.
평소에, 그리고 일생동안 좋은 관계로 지내던 상사인데 말이다(왜 이름을 처음에 뺐는지는 설명이 안 나옴).
이런 상황에서 아랫 사람인 피옷은 어떻게 나왔을까?
그냥 상사 면전에 들이대고 "내 이름 왜 안 넣어요? 넣으세요!" 하고 들이 받았고, 결국 성취한다.
이런 상황이 우리나라였다면?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제게 왜 그러셨어요? 말해주세요. 왜 그러셨어요?"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청출어람. 애제자 였으나 자기보다 어느 틈에 앞서나가는 상황을 보면서 격려는 커녕 찍어 누르려고 하는 좀생이들이 지금도 많겠지?
그건 서양도 마찬가지였네.
11. 피오트 박사가 의대 졸업하고 감염을 전공한다고 하니까 주위 지인들과 스승들이 도시락 싸고 다니면서 말리는 대목이 초반에 나온다.
"감염은 거의 다 정복됐는데 왜 하는 것이여?"
"감염은 돈도 못 버는데.."
하하.. 이것도 거기나 여기나 똑 같구나.
하긴 최근 공표된 미국 의사 전문 분야별 연봉 랭킹을 보니 지금도 감염내과는 바닥이더구먼...
나를 포함해서, 감염을 전공한다는 이들은 제정신이 아닌듯..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