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새삼 불러보는 로자 룩셈부르크
나는 지배받지 않는다
마리아 자이데만 지음, 주정립 옮김 / 푸른나무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로자 룩셈부르크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이다. 90년대 초반 급작스런 사회주의 몰락에 따른 정신적 충격과 긴장 속에서 사회주의가 몰락하게 된 정치적 원인을 분석하고 있던 필자는 레닌주의 당이론에 대한 세련되고 날카로운 비판자로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처음 대면했다. 베른슈타인과의(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의무) 마르크스 수정주의 논쟁(룩셈부르크의 사회개혁이냐 사회혁명이냐), 레닌과의 당이론 논쟁, 스파르타쿠스단,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암살. 이러한 것들이 필자에게 남아있는 로자에 대한 인상이다.
한 혁명가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그의 사상과 열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인가를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때론 화려한 이론 뒤에 숨어있는 어두운 이야기들. 강철같게만 보이는 한 혁명가의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 등. 로자 룩셈부르크의 전기인 ‘나는 지배받지 않는다’는 이제껏 필자가 주목하지 못했던 이러한 점들을 보여준다.

당시의 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핸디캡이라는 핸디캡은 다 가지고 살았던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는 미움받는 유대인이였으며, 가정에서 뜨개질이나 하고 애들이나 키우는 것이 여성의 본분 그리고 천성으로 받아들여지던 시기에 정열적인 정치활동을 했으며, 15세 연하인 클라라 체트킨의 아들 코스챠 체트킨과 열애했으며, 다리를 절뚝거리는 불구였으며, 왕권신수설을 굳게 신봉하는 빌헬름 2세 치하에서 코뮤니스트였고, 조국 폴란드는 강대국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 학대받고 있었다.
프로이센 군인들에겐 늙은 갈보라고 불리었던 로자 룩셈부르크, 혁명이라는 악의 유혹을 퍼뜨리는 갈리시아의 유대인을 추방해야된다고 떠들어대던 독일의 우익 보수언론들의 마녀 사냥식 지탄. 로자의 첫 애인이었고 그녀와 더불어 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의 대표자이자 창설자인 레오 요기헤스에게서 받아야 했던 봉건적인 남성 우월주의의 억압. “당신은 고압적이고 노골적으로 지시해대고 있어요. 아돌프하고 이러저러해라. 라브로브를 찾아갈 때는 이러저러하게 처신해라, 이것을 준수해라, 저것을 준수해라, 이것들 모두를 생각하면 불쾌감과 피곤, 허탈, 불안이라는 지울 수 없는 인상만 얻게 되는군요.”
또한 로자는 자유로운 학문적 연구와 활동을 위해서 스위스 쮜리히로 가야만 했다. 1893년 유학시절 쮜리히에서 열린 사회주의 인터내셔날 제3차 총회에서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의 대표자라는 로자의 자격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심지어 폴란드 사회주의당은 그녀와 레오 요기헤스, 율리한 마르흐레브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이 짜르정권의 비밀경찰 조직이라는 전혀 근거 없는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나 로자는 자신의 대표권을 주장하기 위해 열정적인 연설을 하여 각국 사회주의 지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권위에 맞서야 했던 로자. 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그녀는 플레하노프의 권위에 단지 순종하여 따르는 것만으로 혁명의 열정을 식히지 않았고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의 독립을 지키기에 힘썼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러시아 볼셰비키의 지부로 행동해서는 안될 것입니다.”(레오 요기헤스가 감옥에서 스파르타쿠스 단원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그러나 그녀와 레오 요기헤스는 플레하노프의 비신사적인 비난을 들어야 했을 뿐 아니라 그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는 로자와 레오를 무너뜨리기 위해 편협되고 옹졸한 평가절하와 비난이 담겨졌다.
자신의 신체적 핸디캡을 감추기 위해 옷입기에도 신경을 써야했던 그녀는 한마디로 당대의 사회모순을 온몸에 떠안아 그것을 넘어서며 살아가야만 했다. 그녀가 고등학교 졸업 후 남긴 고백은 이러한 그녀의 실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내 이상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 그런 사회질서이다. 그것을 추구하면서, 그리고 이러한 이상의 이름으로 나는 언젠가 증오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베른슈타인, 레닌과의 화려한 논쟁의 이면에는 그녀가 겪어야 했던 삶의 아픔들과 고통이 있었다. 부르주아의 탄압보다 더 힘들게 했던 소위 동지에게서 받은 억압과 오해. 남성우월주의와 봉건적 권위주의 성향이 강한 다소의 마르크스주의자들. 권력욕과 명예욕에 불타던 혁명가들. 화려한 이론의 뒷 이야기들은 자주 더러운 것들이며, 그것에 의해 그녀는 가장 힘들어하고 고뇌했는지도 모른다.
망명차 머무르던 핀란드의 쿠오칼라에서 역시 망명생활을 하던 레닌과의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만남. 그녀는 자주 레닌과 만남을 가졌고, 특히 당조직 문제에 있어서 그녀는 이미 레닌과는 무척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녀는 자기 논문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조직문제」에서 레닌의 당이론을 메마른 야경꾼 정신이라 비난했다. 그녀는 러시아 혁명이후 진행될 볼세비키당의 관료화 독재화를 예견하며 다음과 같은 경고를 했다. “진정으로 혁명적인 노동운동이 범하는 오류는 가장 우수한 중앙위원회의 완벽성보다도 역사적으로 훨씬 더 풍요롭고 귀중한 것이다.”
쿠오칼라에서 벌써 레닌과 로자는 분열하고 있었으며, 러시아 혁명과 함께 하기 위한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봉기 역시 실패함으로써 쿠오칼라에서 시작된 레닌과 로자의 분열은 회복할 기회를 완전히 잃게된다. 그리고 실패자인 로자의 사상은 한 동안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녀의 사상이 필자에게 다시 다가오는 것은 승리자 볼셰비키의 패배가 당시 패배자인 로자의 사상을 새롭게 조명해주는 문을 열어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어쩌면 역사는 승리자의 담론을 서술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로자의 사회주의든 레닌의 사회주의든 모두 패배해버린 오늘날의 역사적 국면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삶과 사상을 다시 생각해본다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하고 질문해본다.

“양쪽 끝에서 타들어가는 양초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그녀의 말과 그녀의 운명적인 삶. 로자 룩셈부르크가 걸었던 삶과 혁명활동, 그리고 그녀가 맞이해야 했던 죽음을 보면 몽테뉴가 테르모필레 전투에 남긴 글귀가 떠오른다.
페르시아 아하수에로 왕이 부친 다리우스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정벌하고자 나섰다. 25만 명의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 바다와 절벽으로 배수진을 치고 싸웠던 7000의 그리스 연합군은 예상외로 잘 맞서 싸웠다. 배신자의 안내로 페르시아군은 절벽으로 올라오게 되었고, 스파르타인 레오니다스는 군대를 대부분 해산시키고 직속부대인 300 명의 스파르타인과 소수의 군인들만 데리고 최후의 결전을 할 작은 언덕으로 올라갔고, 그곳에서 최후의 일인까지 싸웠고, 전멸했다. 헤로토투스에 의하면 그들은 칼을 놓친 후에는 손과 이로 싸웠다고 한다. 그들은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고향으로 보냈으며 그것이 그들의 묘비명으로 남게 되었다: “낯선 이여, 우리는 스파르타인들이 기대했던 대로 행동했고 이제 여기에 묻혔노라고 그들에게 전해주오.” 이들의 죽음은 그리스인들의 자부심과 애국심을 불러 일으켰고 이것은 그 이후 살라미스 전투와 플래테 전투에서 거둔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페르시아를 물리친 그리스는 30 년 안에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테르모필레(300 인이 전원 전사한 유황온천이 있는 절벽)전투를 떠올리며 몽테뉴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승리에 필적하는 성공적인 패배가 있다.”

인간다움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에요. 그것은 확고하고 명쾌하며 명랑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래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명랑하다는 것을요. 흐느끼는 것은 약하다는 표시예요. 인간답다는 것은, 꼭 그래야 한다면 자신의 전 삶을 운명의 거대한 저울에 기꺼이 던져버리는 것을 의미해요.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화창한 날을 맞을 때마다, 아름다운 구름을 볼 때마다 그것들을 즐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로자가 1916년 12월 그녀의 옥살이를 돕던 마틸데 부름에게 보낸 편지)

로자 룩셈부르크여!
내 이상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 그런 사회질서이라면,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이 조건이 되는 그러한 미래사회에 있다면, 그리하여 꼭 그래야 하기에 내 자신의 전 삶을 운명의 거대한 저울에 기꺼이 던져버려야 한다면, 나도 당신처럼 이러한 이상의 이름으로 증오하는 법을 배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증오하지 않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 것인지?

로자가 활동하였고, 필자가 유학하였던 독일 베를린시에는 해마다 로자가 서거한 날이면 유대인이자 폴란드인인 그녀의 죽음을 기념하는 사람들이 있다. 20세기말을 사는 독일인들에게 로자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길래 그들은 그녀를 추모하는 것일까 하고 질문해 보았다. 승리에 필적하는 패배를 거둔 자에 대한 무관심과 우리의 편향된 역사인식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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