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르샤흐 - 잉크 얼룩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다
데이미언 설스 지음, 김정아 옮김 / 갈마바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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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한글판 제목은 로르샤흐이지만, 원본의 제목은 ‘THE INKBLOTS’이다. Inkblot의 뜻은 무엇인가? 잉크 얼룩이라는 뜻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로르샤흐의 필생의 업적, 알파이자 오메가, 그리고 로르샤흐 일생 이후에도 심리학, 정신 의학, 인류학, 미술 등에서 엄청나게 영향을 끼친 일명 잉크얼룩 테스트를 뜻하는 고유 명사이다. 처음 읽을 떄에는 그저 로르샤흐의 위인 전기일줄로만 알았다. 표지에 그의 사진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지, 책 제목에는 로르샤흐라는 단어가 떡하니, 거의 3cm 정도 박혀있지. 하지만 이 책의 절반도 지나지 않아서 이 책은 단순한 로르샤흐의 전기가 아님을 깨달았다. 이 책은 로르샤흐가 만든 잉크얼룩 테스트의 태동기, 그리고 로르샤흐가 37세로 요절했기 때문에 벌어진, 잉크얼룩 테스트의 변천사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는 책이다.

로르샤흐의 생애, 그에게 영향을 끼친 두 스승, 오이겐 블로일러와 칼 융이라는 정신의학의 선구자 밑에서 그는 뛰어난 정신과 의사로 변모해간다. 또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접하고, 의대를 졸업하고 수많은 환자를 만나고 치료하면서 그렇게 그는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간다. 그리고 그가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남다른 재능 중 하나인 그림과 결합하여 정신의학의 만남이 만들어낸 불후의 테스트, 잉크얼룩 테스트가 탄생한다.

잉크얼룩 테스트는 잉크얼룩으로 그린 하나의 그림을 보게 한 뒤 형태 또는 연상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게 한다. 그 내용을 분석하여 정신병이 있는지, 어떤 병인지를 진단하는 테스트로 출발하였다.

하지만 이제 막 테스트가 태동하여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할 즈음, 가장 어처구니없으면서 가장 큰 소용돌이를 예고햐는 암시가 되는 사건이 벌어졌으니, 다름아닌 로르샤흐의 죽음이다. 나는 그 당시 의학으로는 로르샤흐의 사망원인인 맹장염(충수염)은 빨리 발견해서 적절한 외과 수술이 시행되었다면 그의 인생은 더 길게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로르샤흐의 친척 중 한 명은 같은 병명이었지만 빠른 조치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겨우 잉크얼룩 테스트가 태동해서 막 이론을 정립하고 데이터를 쌓아 나가던 시기에 갑자기 창시자가 사망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격변의 시기를 거치던 테스트는 엄청난 혼돈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어간다. 그의 죽음이 혼란을 가져다준 계기가 된 것인가 아니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의 밀알이 되어,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정신의학, 심리학적으로 유명한 검사를 넘어서 일반명사화될 정도로 유명해진 시발점이 된 것인가는 나에게는 아직도 정말 헛갈리는 의문으로 남는다.

로르샤흐 사후 미국으로 건너간 테스트를 두고 사무엘 J. 벡과 브루노 클리퍼 두명의 학자가 서로 테스트를 두고 학문적으로 논쟁을 펼치게 된다. 그렇게 미국에서 치열한 토론과 논쟁을 거쳐가던 중, 다름아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또 다른 변혁을 맞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징병제를 실시하였고, 온갖 성격과 상상도 못한 정신병을 가진 입영 장정을 구분해내기 위한 심리적인 검사를 개발하기 위해서 관련 심리학 및 정신의학자들이 온갖 노력을 다하던 때이기도 했다. 이 때 검사의 효율성을 위해 잉크얼룩 테스트는 선택지가 주어지는 변형된 테스트로 발전(?)을 하게 된다. 또한 전쟁 후에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의 주요 인물들의 성격을 로르샤흐 테스트를 통해 알아내려는 시도도 함꼐 진행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폭발적으로 사용된 테스트지만, 70년대 이후에는 온갖 심리적, 정신적 테스트가 개발되면서 심리학적, 정신의학적 테스트로는 좀 밀려난 면이 없지 않다. 대한민국 남자들이 군에서 진행하는 심리 검사는 로르샤흐의 잉크얼룩 테스트가 아니라 MMPI 등 다른 심리학적 검사이다. 특히 군과 같이 많은 사람이 단시간에 집결해 있을 떄 정신이상자를 가려내기 위한 검사로서 잉크얼룩 검사는 효율적인 검사는 아니다. 평가자가 전문적으로 여러 측면을 고려하여 등급을 평가하고 진단을 내려야 하기 떄문이다. 오죽하면 제2차세계대전 떄 미국 정신의학자는 로르샤흐의 잉크얼룩 테스트에 선택지를 추가하면서까지 변형을 해서 도입하려고 했을까.

그리고 로르샤흐의 테스트는 심리학, 정신의학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다. 인류학에서는 로르샤흐테스트를 통해서 각 민족의 성격이 어떤 지에 대해 탐구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가 1930년대 이후로는 잠잠해진다. 하지만 로르샤흐 테스트가 엄청나게 영향을 끼친 영역이 있으니 다름아닌 미술, 그 중에서 그림의 영역이다. 예전에 로르샤흐가 그림을 통해서 검사 방법을 만들어낸 것이 이제는 화가에게 영감을 주는 관계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단순히 로르샤흐의 전기를 넘어서 심리학적, 정신의학적 테스트의 역사 중 일부분, 특히 잉크얼룩 테스트 역사를 기록한 서사적인 역사서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과 흐름을 이 한권의 책으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는 것으로 기나긴 120년의 한편의 역사이자 드라마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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