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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 연습 (일러스트판) Reborn Classic 1
로렌스 형제 지음, 홍종락 옮김 / 사자와어린양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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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에 이 책을 처음 읽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손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 볼 수 없는 하나님, 감각할 수 없는 하나님과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는 늘상 내 신앙의 화두였다. 간혹 나 자신에게 질문했다. "너는 하나님을 알고 있니?", 모른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선명하게 안다고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치 수건에 가린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하나님을 더욱 갈망하게 했고, 그분의 임재 아래 머물로 싶은 소망은 풍선처럼 부풀었다. 그러나 매일의 일상을 살다보면, 어느새 하나님은 내 마음에서 사라지고, 내 상황과 감정과 처지에 따라 변화무쌍한 나 자신만이 충만했다. 어떻게 하면 나에 의하여 좌지우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임재 아래 있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더랬다.

6년 전 그 때, 이 책을 읽고, 하나님의 임재 아래 사는 것이 걸출할 영성을 가져서 되는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이후로 로렌스 형제가 조언한대로 일상의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자 노력했다. 아들들과 마찰과 갈등이 있었을 때도, 바로 반응하기 보다 한 템포 늦췄다가, 하나님 앞에 머무르곤 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묻는 기도를 했다. 많은 부분, 지금의 나의 영적 생활은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연습>에 기대고 있다.


이번에 새로운 판본으로 나온 책은 디자인에서부터 로렌스 형제의 의중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두 권의 책을 선물 받고, 나는 한 여성이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디자인을 선택했고, 남편은 명화버전을 선택했다. 이 버전의 책은 남편과 함께 인도로 날라갔다. 주부인 나는 주방에서 일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할 때가 많다. 많은 생각을 거친 난 다음 이루어지는 기도는 이 주방에서 이루어질 때가 많다.

"제게 일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다르지 않습니다.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주방에서 여러 사람이 동시에 제게 각기 다른 일들을 요구하며 소리를 높여도, 무릎을 꿇고 복된 성찬을 받을 때처럼 지극히 평온하게 하나님을 소유합니다"(44p)

일상의 예배자라는 화두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생소하지 않다. 그러나 어떻게 이 일을 실현시킬 것인가는 여전히 큰 과제이다. 이런 과제에 대한 가벼운(그러나 결단코 가볍지 않은)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다. 이 책을 통해서 영성이란 어떤 초월적인 세상의 것이 아니라 내 일상과 주변에, 하나님은 내 생각보다 가까이 계시는 분임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연습할 수 있다. 그리고 경험할 수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외부적인 일들을 멈추고 영혼의 은밀한 곳으로 물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그분을 더 기쁘게 만들 예물이 있을까? 게다가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애를 파괴한다.....하나님과 함께할 때면 무심결에 우리의 자기애가 사라진다"(109p)

하나님의 임재 아래 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존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깊이 인식하는 일이지 싶다. 그 사랑 앞에, 그간 자신을 지키려고 포장하고 있었던 자기를 발견하게 되면 이기적인 자기애를 벗을 용기가 생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통과한 자기사랑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시선을 통과한 자기 사랑은 타자 또한 그런 사랑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것 같다. 여기서 자아와 타자가 연결이 되는 것 같다. 로렌스 형제의 얼굴과 행동에서 이런 성화의 빛이 은은하게 빛나지 않았을까. 내게서도 이런 분위기가 흘러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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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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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의 감옥, <새의 선물, 은희경>을 읽고

프롤로그의 제목,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문장으로 은희경의 소설, <새의 선물>은 시작한다. 소설 속의 열두 살의 아이는 진희다. 때는 1969년, 은희경의 고향이 고창이라고 하던데, 소설 속의 공간적 배경 또한 고창과 비슷한 어느 시골 마을이다. 아마도 작가의 고향 고창이 모티브인 것이 분명하지 싶다. 주인공 진희가 사는 집과 그 근처의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이 소재가 되었는데, 필시 이 소설은 은희경의 자전적 소설일 것이다.

"나의 분방한 남성 편력은 물론 사랑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언제라도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나의 열정은 삶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으며 당장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것들만 지니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해 왔다. 삶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 삶에 성실하다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아이러니도 아니다"(12p)

삽십대 중반이 된 진희의 서술이다. 중重한 것이라고는 없는 삶이기에 어느 곳에나 쉽게 자신을 내동댕이칠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성실함을 입증한다는 말은 아이러니라는 장치를 통해 진실처럼 매우 설득적으로 다가온다. 매우 비틀어진 논리임에도 불구하고, 순간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조국혁신당의 조국대표가 이미 멸문지화를 당하여 더이상 무서울 것이 없는 상태로 정치에 뛰어들었다는 것, 더이상 떨어질 나락에 없기에 혼신을 던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이런 맥락과 통할 것 같은 착각 말이다. 그러나 생애를 던진 성실함에서는 비슷할지 모르겠으나, 냉정과 열정, 냉소와 열화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새의 선물>을 읽으면서 줄곧 나는 나의 청소년시절 친구를 떠올렸다. 나는 늘 그녀를 닥달했고, 나의 닥달에도 그녀는 별 반응이 없었다. 나는 애닳아했고 그녀는 태연했다. 삶을 다 알아버린 애늙은이처럼 구는 친구, 그녀는 자기 삶에 대하여 그닥 흥미를 갖지 못했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고, 어떻게든 그녀를 고쳐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화가 났다. 도대체 그 나이에 인생에 대해 뭘 얼마나 안다고 그리도 삶에 대하여 관조적일까. 한번도 삶에 뛰어들지 않고삶의 주위를 겉도는 그녀의 자세가 못마땅했다. <새의 선물>의 주인공 진희도 그랬다.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내 삶은 삶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거리를 유지하는 긴장으로써 지탱돼왔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거리 밖에서 지켜보기를 원한다(12p)"

진희는 12살의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엄마는 우울증으로 자살을 하고, 아빠로부터는 버려져서(12살 당시에는 그렇게 느끼고도 남았다) 할머니 집에서 살아간다. 이 상처로부터 자신을 떼어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는 삶으로부터 떨어져서 살아간다. 그렇게 자신을 관찰하듯 그녀는 타인의 삶도 거리를 두고 관찰함으로 그들의 삶을 엿본다. 엿보는 눈에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구분되듯, 보여지는 삶과 감춰둔 삶이 달랐다. 이 둘 사이에는 거짓과 위선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본다.

보여지는 것과 감춰진 것 사이의 위선과 거짓은 어디에서 근원하는 것일까. 작가는 이를 세상이 만들어놓은, 한 개인을 고유한 존재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규범과 관습 때문임을 지적하고자 했던 것 같다. 주체적 인간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일이 1969년 그 당시에는 더욱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여자란 모름지기 뒤웅박팔자여야 하고, 순결은 어떤 사연이 있건간에 지켜져야 하는 것이며, 선생이 어떤 인물이든지 간에, 학생은 공손해야 하는, 등등의 규범. 작가는 소설 속, 각각의 인물 모두의 위선과 거짓을 보란듯이 까발린다.

12살, 가장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부터 버림받은 진희는 그렇게 자신과 세상을 이해했고,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의 비루함을 감추었고, 상처를 덮었다. 그러나 대신 진희는 12살의 감옥에 갇혔다. 그 감옥에서 그녀는 자유롭지 못했다. 얼마전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었다. <새의 선물>과 나레이션의 방식이 유사하다. 많은 인간군상들이 출현하고, 그들의 이면에 깃든 거짓과 위선의 더러움의 진술. '죽음의 집'이란 시베리아 유형지를 말한다. 자유를 뺏긴 곳에서의 인간의 삶. 감옥. <죽음의 집의 기록>은 감옥이 실제적인 공간인 반면 <새의 선물>에서의 감옥은 상처가 만들어놓은 심리적 감옥이라 하겠다.

<새의 선물> 첫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주자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버렸네"(자크 프레베르 <새의 선물>전문)
이 문장은 12살, 진희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삶이라는 씨앗을 상처라는 포장지에 싸매서 깊이 깊이 감추고 발아하지 못한 채, 감옥 속에 갇혀버린 인생. 상처란 충분히 이렇듯 한 존재를 감옥에 갇히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진희는 12살의 어린 눈으로 어른들의 위선들을 드러내며 인생을 대단하게 깨달은 것 같지만 기실은 자유를 맛보지 못한 삶이다.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으면서, 자유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필연적 요소라 여겨졌다. 자유가 제한된 감옥에서 인간은 교정되거나 교화되지 않는다. 도리어 자유가 거세된 곳에서 인간은 더욱 몰락하게 되는 것을 소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면서, 자유란 인간의 격格을 유지하도록 신이 인간에게 주신 장치가 아닐까, 싶었다.

"건조한 성격으로 살아왔지만 사실 나는 다혈질인지도 모른다. 집착없이 살아오긴 했지만 사실은 집착으로써 얻지 못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 대문에 짐짓 한 걸음 비껴서 걸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받지 않으려고 주변적인 고통을 견뎌왔으며 사랑하지 않으려고 내게 오는 사랑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정열을 다 바쳤는지도 모를 일이다(431p)"
작가도 알았다. 보여지는 나와 관찰하는 나가 가진 거리가 이런 삶을 만들어왔다는 것을..그래서 후회했는가? 아니다.
"하지만 상관없다(431p)"고 말한다.
왜냐하면 "90년대가 되었어도(<새의 선물>은 1995년에 발표됨) 세상은 내가 열두 살이었던 60년대와 똑같이 흘러간다.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고 수미쌍관으로 처음과 끝은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이 문장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 어쩌면 세상은 거대한 감옥 속에 갇혀 있다는 걸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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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_하나님의 흔적 1 - 40인의 일상 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흔적
신재철 지음 / 세움북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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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딱 맘 속에 기획하고 있었던 컨텐츠였다. 아들과 간혹 이곳 저곳 나들이를 다니면서 그 장소에서 만났던 이들에 대한 리포트,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취재해서 책으로 내고 싶다는 생각을 아주 오래 전에 했더랬다. 내가 변방 중에서도 변방의 존재였기 때문에, 생활 속에 묻혀 전혀 이름나지 않은 그런 사람들을 취재하고 싶었고, 그렇지만 자신만의 색깔과 가치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 하고 그걸 글로 써내고 싶었다. 1번 타자 ###, 2번 타자 ###, 3번타자 ###,,,이런 계획이 있었는데, 앗, 이제 나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니다, 나는 여성들만 찾아서 만나볼까, ㅋ

이 책은 <만화방 이야기>의 저자이신 신재철 목사님이 40인의 그리스도인을 만나서 인터뷰한 기록이다. 그러나 인터뷰이 분들은 BTS같은 지명도를 가진 분들은 아니다. 이분들 중에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분들도 있는데, 그분들께, "저 오늘 만나러 갈께요, 시간 좀 내주세요"라고 부탁드리면, 단번에 거절하지 못하고, 환영해주실 분들이 있다. 그만큼 나와 동떨어진 하늘 높이 계신 분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보적인 자기다움으로 살아가는 이야기, 그 삶의 여정 안에 하나님의 흔적을 남기며 걸어가신 이야기들이 잔뜩 실려 있다.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아는 분부터 읽으면 된다. "책을 쓰다가 인생을 다시 쓴 사람, 김기현"목사님, 로고스 서원, 글쓰기 학교에서 1년간 사부님과 함께 했기 때문에, 너무나 친근하고 반가웠다. <글쓰는 그리스도인>이란 책과 더불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책 때문에 지금 나와 몇 분이 함께 하고 있는 <다북다복> 읽기 공동체가 꾸려졌다. <다북다복> 공동체는 김기현 목사님의 <말육거>를 근간으로 읽어가는 읽기 공동체이다. 그래서 목사님께 빚지고 있는 바가 매우 큰데, 내가 글쓰기 학교에서 목사님게 느꼈던 바는 무척 겸손하신 분이라는 것, 후배의 삶에 빛을 비춰주고자 진심을 다하신다는 것이다.

"한국인 저자에게 진심입니다라고 하신 강인구" 대표님, 한국인 저자에게 진심이라시니, 너무나 감사하다. 사실 어쩔 수 없이 번역된 책을 읽다보면, 언어가 주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인지 나이를 먹을수록 한국 저자의 책을 읽고 싶던 차에, 한국인 저자 발굴에 진심인 출판사 대표님의 고백이 너무나 반가웠다. 게다가 여성작가 발굴에도 관심이 있으시니 역시나 혜안이 있으시구나 싶다. 여성성이 조금씩 빛을 내는 시기인 것 같다. 나만 해도, 남성 작가들에게 약간은 지친 마음이 들곤 한다. 남성들이 가진 좋은 점들이 많지만, 때로 지나치게 가르치려 든다거나, 고자세의 글들을 대할 때면, 읽기를 집어치우고 싶다. 반면에 여성들은 논리가 충분하면서도 수평적인 입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자기 고백적이고 공감적인 글을 내놓기 때문에 독자에게 훨씬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다. 바야흐로 여성작가의 발굴이 시대적 요구라고 나 또한 생각하고 있다.

네 파드로 이루어져 있다. 소명과 꿈, 그리고 삶과 도전이 각 파트의 키워드라 하겠다. 비록 이렇게 챕터가 구분되어 있지만, 네 파트의 공통된 점은 다양함이다. 사람도 다양하고 부르심도 한결같지 않고, 삶의 현장과 직업(비록 목사라고 할지라도)까지 천차만별이다. 특히 목회자의 사역의 모습과 현장은 더욱 그러했다. 아무래도 본캐가 목사님인 분들 인터뷰가 많았는데, 학자나 저자 등의 익숙한 직업군도 있었지만, 사역의 현장은 너무나 다양했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석 구석 자신의 사람들을 보내고 계신다는 싸인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버스 교회 이야기, 강원식, 권명진" 편이었다. 일단 버스를 교회로 리모델링 했다는 것 자체가 신선했다. 이런 발상을 했다는 것도 신기했고, 버스 교회를 시작한 이유 또한 감명 깊었다. 찾아가는 예배를 위한 교회 정체성, 인터뷰이가 고백한대로, "성도가 늘어나고 성전을 짓고, 이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곳을 찾아가는 것, 정말로 갈급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그냥 전달해 드리고 오는 것이 저희 버스 교회의 마지막 목표예요."(176p)라고 고백한 것처럼, 기동성과 유동성을 겸비한 버스교회가 그야말로 찾아가는 복음서비스(?)를 하는 데 부족함이 없겠다 싶다.

"대리운전하는 목사입니다, 박종배"편은 이미 책으로 읽은 바가 있다. 그래서 익숙한 분이었다. 그래서 새로울 바가 없을 거라 여겼는데,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으며, 다시금 개척 목회자의 어려움이 실감났다.
"재정이 바닥을 치니까 참 난감했습니다. 날씨로 비유하면 추운 겨울에 반팔만 입고 서 있는 느낌. 흔히들 개척 교회를 영적 최전선이라고 합니다. 전쟁터에서 총알이 떨어지면 그다음 할 수 있는 것이 육박전이죠. 육박전은 체력에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무기를 든 사람에게 밀릴 수밖에 없죠. 마찬가지로 재정이 바닥을 치니까 너무 힘들고, 거기에 따른 정신적 피폐함 때문에 많이 힘들었습니다."(167p)
목사님은 대리운전과 택배 등의 일을 하며 이중직으로서의 목회자의 삶을 살아내셨고, 교회가 아닌 평신도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도리어 목회나 설교의 힌트를 실감나게 얻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평신도의 삶에 훨씬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고 공감할 수 있었다는 감사를 전한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앞으로 선교나 전도의 패러다임도 삶 속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보여주는 '작은 화면'이라는 것, 그저 문장이 아니라 이중직의 목사 노릇을 하면서 느낀 것이기에 그저 문자로만 다가오지 않고, 가슴으로 전달이 된다.

성전신학이 팽배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성전에만 하나님이 임재하신다고 여겼다. 얼마나 확고부동한 신학이었는가. 그러나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역사의 질곡을 겪으면서 하나님은 성전에만 국한된 분이 아니라 온 세계에 편만히 거하시는 분임을 이스라엘은 경험한다. 성전이 없는 곳에서 예배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임재를 맛볼 수 있었다는 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회당 문화가 생겼다고 한다. 한 곳, 이스라엘 성전에서만 예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이방의 땅에서 열 명 정도만 모일 수 있다면, 회당이 만들어졌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다. 성전에만 제한되었던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되신 것이다. 참 아이러니하지만.
교회가 위기이고, 신앙의 위기 시대를 맞이했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제한해 버린 하나님의 위기일 것이다. 하나님은 제한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기에, 이 시대에 하나님은 그분의 방식대로 인간의 유전을 깨뜨리시면서 신앙공동체를 만들어가시는 것 같다. 이 책에서 시종일관 엮어주는 다양성은 바로 이를 입증하는 것은 아닌지...그래서 반가운 책이다.

마지막으로 스토리39, "디자인으로 예배합니다, 전은호"편에서 목소리 높이는 "예술에 투자해 주세요"의 외침. MZ세대를 위하여 필연적인 일이지 싶다. "요즘 MZ 세대에게 비주얼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스피치, 스피킹으로 다 되는 시대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아직까지 교회는 전통적인 설교라는 방식에만 의존하고 있어요."(281p)
청년을 집안에 둘이나 두고 있는 엄마로서 깊이 공감한다. 지금이야말로 상상력이 필요한 시대다. 먹을 것이 없고 사는 것이 곤궁할 때는 그저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신앙을 갖기가 용이했다. 이 때는 상상력의 시대는 아니었지 싶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상상력이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욱 예술이 필요하다. 아름다움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때, 그것이 가장 깊은 영성이라던가. 내가 알고 있는 인식의 세계를 넘어선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예술에서 나오는 것이지 싶고, 그것을 실현해 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 이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누려야 할 특혜이면서 의무이지 싶다.

#스토리_하나님의 흔적 독후기가
#저자, 신재철
#세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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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톡 - 크리스천 청년들에게 주는 100가지 삶의 영감
남경호 지음 / 세움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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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인 아들이 둘이다. <영감톡>을 읽게 된 이유가 이 녀석들 때문이다. "크리스천 청년들에게 주는 100가지 삶의 영감"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 <영감톡>

자주 대화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나의 일방적인 썰이 아니었는가, 싶은 반성의 되곤 한다. 이 녀석들이 궁금하고 가려운 것들이 무엇인지 나는 인식하고 있는가, 이 녀석들의 삶에 대한 질문을 나는 알아채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해본다. 이런 질문들 뒤엔 항상 이 녀석들이 살아갈 세상과 내가 살아갈 세상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 내제되어 있다. '꼰대'가 되지 않으면서도 <영감톡>처럼 영감을 줄 수 있는 대화가 될 수는 없을까, 고민이 되는 건 어쩌면 나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이런 고민에 대한 답을 한 번 얻어보고자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총 5개의 파트로 나눠져 있다. 학업과 취업 준비, 교회생활과 신앙고민, 일상생활과 위로, 연애와 결혼, 인간관계와 인생조언이라는 다섯 개의 파트에 각각 20개씩의 주제와 대답을 수록했다. 총 100가지의 주제이다. 그래서 읽어갈 때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 가장 가려운 부분을 먼저 읽어보면 된다. 내가 비록 청년은 아니지만 그래도 두 청년과 함께 생활하는 부모로서, 그 녀석들의 나눴던 대화들을 단서 삼아 우리 아이들이 가장 궁금해할 것이 어떤 곳들을질문일까를 생각하며 그 부분은 더욱 집중해서 읽었다.

"때로는 보이지 않을 때 더욱 잘 보인다", 80번째 제목이다. 나에게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 부분이다.

"연인 사이에도 시각이라는 저울을 사용하여 서로에 대한 사랑의 무게를 재고, 그 사랑이 얼마나 묵직한지를 끊임없이 확인하고자 하죠. 그러나 사랑을 눈으로만 보면, 착시 현상에 영향 받기 쉬워요"

저자는 이런 사랑의 착시 현상을 언급하면서 눈에 보이는 사랑과 보이지 않는 사랑을 잘 비교해준다. 일명 빛 사랑법과 소금 사랑법. 빛 사랑은 그 빛이 실낱같을지라도 일단 눈에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가 분명 있다고 말한다. 반면 소금 사랑법은 눈에 바로 보이지는 않지만 은은하게 느껴지는 사랑법이라고 한다. 소금은 자신의 몸을 완전히 녹여 짠맛을 내야 하기에 눈으로 가늠하기(203p) 불가능하다고 조언하면서. 소금 사랑법이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상당히 답답하고 두렵겠지만, 저자는 이 소금 사랑법이 더 성숙한 사랑임을 말씀을 통해서 더욱 강조한다.

청년들에겐 이런 조언이 너무 막막하다 느낄 수 있겠다. 하지만 결혼 생활을 통해서 부부가 어떻게 결혼을 통해서 사랑을 지켜가는지를 경험한 크리스천들이라면 아마도 저자의 조언을 매우 적절하다 느낄 것이다. 결혼생활이란 어떤 측면에서 자기부인의 신앙고백이 가장 선명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소금이 물에 녹는다는 것은 자기 부인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길을 가는 당신을 위하여"라는 제목을 단 영감톡 또한 매우 유용한 조언이 있다.

나도 청년 때 그랬던 것 같다.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 앞에서 기도도 해보고, 어떤 응답이 있기 전에는 선택을 하지 않아야겠다는 걸 믿음이라고 여겼었던 것 같다. 이것은 기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란 걸 나중에야 깨달았는데, 인생을 살아가다가 실패하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싶다. 크건 작건 간에 성공을 간절히 바라는 우리의 마음이 필연적이듯, 실패의 경험도 필연적이다. 그래서 실패를 피하려는 마음은 그닥 현명하지 않다. 그러나 또 한편 아이러니인 것은 내가 실패라고 생각해서 그것이 꼭 실패인 것만은 아닐 때고 있다. 저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매우 제한적이라고는 명시한다. 그래서 한 길을 선택하면 다른 길은 하나님의 길이 아니라고 판단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는 걸, 성경의 사례를 통해서 시원하게 알려준다.

선교여행의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다투고 헤어졌는데, 그렇다면,바울이 선택이 옳은 것인가, 바나바의 선택이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울이나 바나바나 공히 그들의 사역은 실패하지 않았다. 비록 의견이 엇갈리고 충돌이 있었지만 말이다.


저자는 이렇게 조언한다.

"크리스천 청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길은 하나가 아니에요. 살아가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해야만 하는 일로, 의도치 않게 중요한 일로, 그러다가 급한 일로, 어느 때는 평범한 일상에 머무는 삶으로 옮겨 가야 할 때가 있을 거예요. 반드시 가야만 하는 한 가지 길을 정해두지 마세요....삶의 선택에 변화가 올지라도, 심지어 그 모양새가 전혀 다르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여전히 똑같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241p)"

이런 조언을 읽으며, 청년들이 유연한 사고를 하면서 자신의 선택에 자신감을 갖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 두 아들들은 외모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휘트니스 센터에 다니면서 몸매를 관리하고, 턱선이 날렵한지 뭉툭한지 살피고, 패피까지는 아니더라고 자기의 패션이 호일지, 불호일지를 체크하며, 집을 나서곤 한다. 아무래도 보이는 것이 넘쳐나는 때에 피치 못할 운명처럼 외모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저자 또한 자신의 외모로 곤혹을 겪은 에피소드를 언급하며,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 깊이 뿌리내린 거목같은 태도를 가지라고 조언한다. 자신을 외모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오해는 전적으로 당신들의 몫입니다."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지라고 말이다. 이렇게 담대할 수 있는 마음은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에서 나오는 것임을 언급하면서.

단지 외모 뿐만 아니라, '미움 받을 용기'라고 했던가, 타인이 가진 불호와 미움에 좌지우지 되지 않는 마음은 내 삶의 뿌리에 어디에 내려졌는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있음이다.





71번, 스킨십과 혼전순결에 관한 톡 또한 청년들에게 이슈 중의 이슈일 것이다. 요즘처럼 연애라는 말 안에 이미 육체적인 관계를 내포하고 있고, 모솔이라는 말이 청년들에게 치욕스런 말이 되어버린 시대, 이런 시대를 살아가면서 크리스천 청년들은 많이 혼란스럽고 어디에 기준을 둬야할 지 혼란스러울 것이다. 저자는 이성 교제를 하면서 상대방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을 제시한다. 육체적으로만 바라보는냐, 즉 성적 대상으로만 보느냐, 아니면 전인격적으로 상대를 바라보느냐의 시각. 그러니까 결혼식 이전에 순결을 지켜야 한다, 말아야 한다는 이런 구태의연한 조언이 아니라, 상대를 예수님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이다. 예수님은 한번도 우리를 도구화하신 적이 없으시고 우리의 전 존재를 위해서 죽음도 불사하신 분이시다. 그러니 우리 또한 어떤 존재도 수단이나 도구로 볼 수 없는 것이다. 결혼을 한 사이라고 할지라도 만약 상대방을 성적 도구로만 상대한다면 이것은 죄다. 그래서 혼전순결의 시간적 경계를 정해주는 유치한 조언을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상대하신 그 모습을 우리에게 투영시킨다. 명답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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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뎐 - 미달자 야곱에 관한 신밀한 탐색과 탐구
다니엘 오 지음 / 세움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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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한 야곱 읽기, <야곱-뎐>을 읽고

성경은 한편 내러티브라고 들었다. 이야기라는 말이다. 성경 안에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편집되어 있다. 그 어떤 삶도 그리 단순한 삶은 없다. 희노애락오욕의 서사들은 그저 나 하나의 단독자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과 나라들과 얽히고 섥혀있다. 그러나 성경의 내러티브는 그리 친절하지 않다. 그 속에 수많은 사정들과 우여곡절이 있을 것 같은데, 이런 것들은 마치 오롯이 독자의 상상의 몫인 것 같은 부담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내 맘대로 무작정 상상할 수도 없다. 이미 수천 년전에 쓰여진 서사를 현대인의 상상으로 풀어내기에는 시간과 공간이 주는 격차가 너무나 크다. 상상이 필요하나 그 상상이 만들어내는 오역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은 공부해야 하는 책이라고 한다. 성경이 쓰여진 시대의 1차 독자의 눈에서 그 글들이 어떻게 해석되고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파헤치고 생각해보는 것은 성경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노력해야 한 부분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결단코 쉽지 않다.

<야곱-뎐>은 마치 이런 수고를 발 벗고 나서서 해주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책이다. 야곱이라는 인물 하나를 서술하는데 근 7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이라는 건 이 책의 저자나 야곱이라는 한 인생의 서사를 풀어내는데 얼마나 치열하고 세밀한 추적과 사유를 했는지를 알려주는 방증이다. 물론 창세기에서 야곱의 이야기가 차지하는 분량은 작지 않다. 그렇더라도 그저 몇 장에 불과한 야곱의 이야기를 이토록 긴 분량의 책으로 서술했다는 것은 저자가 성경의 행간을 얼마나 꼼꼼히 읽었는지 그 수고의 흔적을 느끼고도 남음이 있다. 저자는 야곱의 삶의 행적을 통해 세 가지 유익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첫째, 영적 '하자'를 판별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준이 된다는 것, 둘째, 구속사에 대한 더욱 풍성한 성경적 지식과 감동을 얻는다는 것, 셋째, 실생활에 적용하기에 유용하다는 점등을 부러 짚어주면서 이 책이 호용을 설명한다. 읽으면서 충분히 그럴만하다 싶었다.

요즘 엔도 슈샤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을 읽고 있다.
이 소설의 화자, 세바스티앙 로드리고가 배교자 지치지로의 밀고로 천주교를 탄압하는 일본 관리에게 잡히게 된다. 신도들의 순교를 목격한다. 고국 포루투칼에서 전해 듣기만 하던 순교의 소식을 눈 앞에서 지켜보면서 로드리고는 깊은 갈등을 경험한다.

"그가 혼란에 빠진 것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건(애꾸눈 신도가 순교)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뜰 안의 정적과 매미소리와 파리의 날개소리였다. 한 인간이 무참히 죽었는데도 바깥 세상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전과 다름없이 계속 움직이고 이었다. 이런 바보스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순교란 말인가? ...........그분은 외면하고 있다. 그것이,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침묵>중에서.

한 생명이 죽었는데, 세상은 너무나 여전하고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 로드리고는 분명 그분의 침묵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다. 나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난을 당할 때,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을 경험할 때, 우리는 간절히 하나님을 구한다. 매달린다. 응답은 고사하고 세상이 너무나 평화롭고 일상적일 때, 나의 삶이 마치 유린 당한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할 때 그분의 침묵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 침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수많은 응답을 주시기도 하면서 왜 결정적일 때 하나님은 침묵하실까. 그 침묵은 과연 무관심일까, 사랑일까.

야곱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저자는 하나님의 침묵을 하나님의 개입하시는 싯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지체하시는 하나님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온갖 악명과 무지한 실수로 뒤범벅이 되어, 부족에게도 사회에서도 매장 당하고 버림 받은 야곱이었을 때, 그렇게 부서진 후에야 사람이 도저히 되살릴 수 없다고 선언할 상태가 되어서야(<야곱뎐, 105P) 비로소 하나님이 개입하신다고 한다.

"야곱의 삶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어떠한 방식으로 소통하고 동행하며, 그들 인생에 어떻게 개입하시는지 자상하게 설명하는 메뉴얼이다. 그런데 그 메뉴얼에는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개입하신 내용만 담기지 않았다. 때로는 침묵하고 개입하지 않으심으로 분명한 메세지를 주시기도 한다(107P)"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무관심이나 유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안전망 안에서 실수를 허용하시는 하나님임을,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분임을 설명한다. 실수나 잘못된 선택에 즉각 개입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지체하시는 하나님을 얘기한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의 강점과 좋은 점만을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약점과 허물까지도 사용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속이는 자였던 야곱이 자신도 속임을 받는 자가 되어 험한 세월을 지내고, 자손들을 통하여 받은 괴로움까지, 야곱은 쓴뿌리의 열매를 먹고 마시는 자였지만, 끝내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세우셨다. 저자는 아곱의 여정, 야곱의 삶의 순간 순간에 직면한 사건들을세심한 자료와 해석으로 하나씩 하나씩 풀어간다. 그리고 야곱의 삶이 구속사와 어떤 연결이 있는지까지 면밀하게 써내려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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