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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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의 감옥, <새의 선물, 은희경>을 읽고

프롤로그의 제목,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문장으로 은희경의 소설, <새의 선물>은 시작한다. 소설 속의 열두 살의 아이는 진희다. 때는 1969년, 은희경의 고향이 고창이라고 하던데, 소설 속의 공간적 배경 또한 고창과 비슷한 어느 시골 마을이다. 아마도 작가의 고향 고창이 모티브인 것이 분명하지 싶다. 주인공 진희가 사는 집과 그 근처의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이 소재가 되었는데, 필시 이 소설은 은희경의 자전적 소설일 것이다.

"나의 분방한 남성 편력은 물론 사랑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언제라도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나의 열정은 삶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으며 당장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것들만 지니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해 왔다. 삶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 삶에 성실하다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아이러니도 아니다"(12p)

삽십대 중반이 된 진희의 서술이다. 중重한 것이라고는 없는 삶이기에 어느 곳에나 쉽게 자신을 내동댕이칠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성실함을 입증한다는 말은 아이러니라는 장치를 통해 진실처럼 매우 설득적으로 다가온다. 매우 비틀어진 논리임에도 불구하고, 순간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조국혁신당의 조국대표가 이미 멸문지화를 당하여 더이상 무서울 것이 없는 상태로 정치에 뛰어들었다는 것, 더이상 떨어질 나락에 없기에 혼신을 던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이런 맥락과 통할 것 같은 착각 말이다. 그러나 생애를 던진 성실함에서는 비슷할지 모르겠으나, 냉정과 열정, 냉소와 열화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새의 선물>을 읽으면서 줄곧 나는 나의 청소년시절 친구를 떠올렸다. 나는 늘 그녀를 닥달했고, 나의 닥달에도 그녀는 별 반응이 없었다. 나는 애닳아했고 그녀는 태연했다. 삶을 다 알아버린 애늙은이처럼 구는 친구, 그녀는 자기 삶에 대하여 그닥 흥미를 갖지 못했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고, 어떻게든 그녀를 고쳐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화가 났다. 도대체 그 나이에 인생에 대해 뭘 얼마나 안다고 그리도 삶에 대하여 관조적일까. 한번도 삶에 뛰어들지 않고삶의 주위를 겉도는 그녀의 자세가 못마땅했다. <새의 선물>의 주인공 진희도 그랬다.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내 삶은 삶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거리를 유지하는 긴장으로써 지탱돼왔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거리 밖에서 지켜보기를 원한다(12p)"

진희는 12살의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엄마는 우울증으로 자살을 하고, 아빠로부터는 버려져서(12살 당시에는 그렇게 느끼고도 남았다) 할머니 집에서 살아간다. 이 상처로부터 자신을 떼어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는 삶으로부터 떨어져서 살아간다. 그렇게 자신을 관찰하듯 그녀는 타인의 삶도 거리를 두고 관찰함으로 그들의 삶을 엿본다. 엿보는 눈에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구분되듯, 보여지는 삶과 감춰둔 삶이 달랐다. 이 둘 사이에는 거짓과 위선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본다.

보여지는 것과 감춰진 것 사이의 위선과 거짓은 어디에서 근원하는 것일까. 작가는 이를 세상이 만들어놓은, 한 개인을 고유한 존재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규범과 관습 때문임을 지적하고자 했던 것 같다. 주체적 인간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일이 1969년 그 당시에는 더욱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여자란 모름지기 뒤웅박팔자여야 하고, 순결은 어떤 사연이 있건간에 지켜져야 하는 것이며, 선생이 어떤 인물이든지 간에, 학생은 공손해야 하는, 등등의 규범. 작가는 소설 속, 각각의 인물 모두의 위선과 거짓을 보란듯이 까발린다.

12살, 가장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부터 버림받은 진희는 그렇게 자신과 세상을 이해했고,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의 비루함을 감추었고, 상처를 덮었다. 그러나 대신 진희는 12살의 감옥에 갇혔다. 그 감옥에서 그녀는 자유롭지 못했다. 얼마전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었다. <새의 선물>과 나레이션의 방식이 유사하다. 많은 인간군상들이 출현하고, 그들의 이면에 깃든 거짓과 위선의 더러움의 진술. '죽음의 집'이란 시베리아 유형지를 말한다. 자유를 뺏긴 곳에서의 인간의 삶. 감옥. <죽음의 집의 기록>은 감옥이 실제적인 공간인 반면 <새의 선물>에서의 감옥은 상처가 만들어놓은 심리적 감옥이라 하겠다.

<새의 선물> 첫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주자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버렸네"(자크 프레베르 <새의 선물>전문)
이 문장은 12살, 진희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삶이라는 씨앗을 상처라는 포장지에 싸매서 깊이 깊이 감추고 발아하지 못한 채, 감옥 속에 갇혀버린 인생. 상처란 충분히 이렇듯 한 존재를 감옥에 갇히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진희는 12살의 어린 눈으로 어른들의 위선들을 드러내며 인생을 대단하게 깨달은 것 같지만 기실은 자유를 맛보지 못한 삶이다.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으면서, 자유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필연적 요소라 여겨졌다. 자유가 제한된 감옥에서 인간은 교정되거나 교화되지 않는다. 도리어 자유가 거세된 곳에서 인간은 더욱 몰락하게 되는 것을 소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면서, 자유란 인간의 격格을 유지하도록 신이 인간에게 주신 장치가 아닐까, 싶었다.

"건조한 성격으로 살아왔지만 사실 나는 다혈질인지도 모른다. 집착없이 살아오긴 했지만 사실은 집착으로써 얻지 못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 대문에 짐짓 한 걸음 비껴서 걸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받지 않으려고 주변적인 고통을 견뎌왔으며 사랑하지 않으려고 내게 오는 사랑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정열을 다 바쳤는지도 모를 일이다(431p)"
작가도 알았다. 보여지는 나와 관찰하는 나가 가진 거리가 이런 삶을 만들어왔다는 것을..그래서 후회했는가? 아니다.
"하지만 상관없다(431p)"고 말한다.
왜냐하면 "90년대가 되었어도(<새의 선물>은 1995년에 발표됨) 세상은 내가 열두 살이었던 60년대와 똑같이 흘러간다.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고 수미쌍관으로 처음과 끝은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이 문장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 어쩌면 세상은 거대한 감옥 속에 갇혀 있다는 걸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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