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교회가 작다고 사랑이 작진 않아 - 차별 없는 은혜, 오름 직한 동산, 은혜의동산교회 이야기 동네 교회 이야기 시리즈 8
김종원 지음 / 세움북스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티나지 않게 사랑하는 일에 선수, 김종원
<교회가 작다고 사랑이 작진 않아> 간증집을 읽고...
은혜동산교회의 첫 방문일이 생각난다. 예배를 위한 발걸음은 아니었고, 교회가 운영하는 <어,울림 도서관>에서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을"이란 슬로건을 내건 독서모임에 참여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막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책을 완독했고, 그 책의 여운이 가시지 않을 때쯤, 도스토예프스키 전작을 읽는 모임이라고 하니 눈이 동그래져서 꼭 가보고 싶었다. 작년 12월, 교회가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만난 김종원목사님은 목사님 치고는 외모가 출중하셨다. 그러나 출중한 외모와는 달리, 매우 일상적인 인상을 받았다. 그러니까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거리가 느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머리털 나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대전을, 도스토옙스키 때문에 방문하게 된 셈인데, 그곳에서 김종원 목사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성심당을 제외하면 볼 것 없기로 유명한 대전(대전시민님들 죄송), 내 평생 갈 일이 있을까 싶은 그곳을 갔으니, 아무래도 내가 대전에 첫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나는 김종원 목사님의 <교회가 작다고 사랑이 작진 않아>라는 동네교회시리즈 책을 읽을 운명(섭리)였나 보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목사님의 간증집이 출간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회를 개척한 이야기, 그것도 코로나를 거친 이야기, 모두 아픈 사연과 상처를 갖고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들 속에서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만나고 관계를 맺어가는지, 도저히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조금씩 회복되어 가는지의 이야기가 그저 일상의 에피소드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힘을 뺀 이야기란 말이다. 다만 강조할래서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사람들 만난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
심한 사춘기를 겪으며 방황하는 청소년(춘기, 가명이겠지?)에게 "나랑 1박2일 부산 여행 갈래?', 금요일마다 금요특별철야예배 가는 심정으로 당구장에서 춘기를 만난 이야기, 빚더미에 앉아 미래가 막막한 자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듣다가, 제주도 여행을 가자고 제안하는 일, 막막하니 생각나는 건 담배뿐인 이에게, 그의 담배 연기와 함께 만남을 가진 이야기, 호프집에서 술 잔에 술을 따르며 만난 이야기, 이렇게 만남을 이어가다가 마음의 허물이 벗겨지고, 마음과 마음이 만나 한 분씩 한 분씩 공동체의 식구가 되어가는 이야기, 결국엔 그분들 한 분 한 분이 공동체가 되어 아픔을 나누며 그 아픔이 삶을 갉아먹을만큼 중한 것이 아님을 알아가고, 'The Scar is a Star'가 되어가는 일들이 <교회가 작다고 사랑이 작진 않아>에 꽉 차게 담겨 있다.
그러나 짧게 기술된 이야기들 속에는 도리어 '기~인' 여정이 있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한 번 듣고 두 번 들어서, 한 번 만나고 두 번 만나서 마음과 마음이 만날 수 있는 일이라면, 사람 사랑하는 일, 사람 세우는 일을 뉘라서 어렵다고 할 것인가. 좋은 말도 숱하게 들으며 듣기 싫어진다는데, 아프고 괴롭고 막막하고 캄캄한 이야기를 듣고, 아파하고, 기도하고 변화를 기대하는 일이 어찌 만만한 일이었을까. 게다가 공황장애를 경험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싶다. 그러나 그래서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나는 김종원목사님이 벽이 없이 가까운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가 다음과 같은 고백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엄마 배 속에서부터 교회와 나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였고, 한 몸이었다. 누구보다 교회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었다. 열정과 패기 넘치는 서른 살에 담임 목사가 되었으니 열심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열심이라는 것이 어릴 때부터 경험한 교회의 문화를 답습하는 열심이었다"(54p)
선교지에서의 이같은 깨달음은 저자에게 교회에 관하여 새로운 시야와 도전을 갖게 하는 시금석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정직한 자기 직면과 성찰이 지금의 저자를 있게 한 초석이 되었을 것이고, 공황장애라는 자기 한계와 아픔이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에 도왔을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가 지금의 저자를 이루고 있는 매우 중요한 줄기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내 인생의 얼마간을 통해서 나와 너의 다름을 깨닫고 알아갔다. 특히 결혼생활 동안에 일심동체라고 불리는 관계에서 얼마나 서로 다른지를 체험적으로 알아갔다. 다름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와 타인을 위한 이해의 발걸음이고 같이 살아가기 위한 행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토마스 머튼은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는 걸 '깊은 영성'으로 깨달았다고 한다. 그가 어느 지점에서 우리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을까. 나는 그 지점이 바로 연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 깊어질 때, 나와 너는 다르지 않다는 걸 직관적으로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연민은 동떨어져 거룩한 곳에서가 아니라 바로 나, 그리고 바로 내 옆의 인생들의 아픔을 그 일상의 현장에서 마주할 때, 터져나오는 것. 저자가 비록 잘생겼지만, 아픔을 아는 분이라서 앞으로 은동예배당은 사람 냄새와 은혜의 냄새로 가득할 것이라고, 감히 단언해본다.
생활밀착형 <은등교 목사 사용설명서>
1. 배고프거나 커피 땡길 때 언제든 전화합니다.
2. 애들 맡기고 부부가 데이트하고 싶을 때 전화합니다.
3. 이단이 접근해 이단 옆 차기 하고 싶을 때 전화합니다.
4. 이사할 때 전화합니다.
5. 부모님이나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전화합니다.
6. 당구장에서 짜장면 먹고 싶을 때 전화합니다.
7. 등산 가서 정상에서 컵라면 먹고 싶을 때 전화합니다.
8. 말씀이 땡기고 예배가 고플 때 전화합니다.
9. 복음을 전하려고 이웃을 만나러 가기 전에 전화합니다.
10. 마음이 슬프거나 괴로워서 말동무가 필요할 때 전화합니다.
이 사용설명서을 읽으면서 혹시나 저자가 과로사로 큰 일이 나면 어쩌나, 싶었다. 이건 그야말로 24시간 심부름업체 대표가 할 일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사실 공동체는 서로에게 영향을 받으며 함께 살아가는 곳, 이것은 어쩌면 <은동공동체 사용설명서>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오른다. 은혜의 동산이여, 행복하소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버지 - 옴니버스 작품집 세움 문학 6
김마리아 외 지음 / 세움북스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등내음, 먼 이름, 그림자, 하모니카, 함께. 작품집 <아버지>에 나오는 아버지를 기억, 또는 상징하는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로 그들의 아버지가 저자들 각자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아버지 등에 업힌 저자의 모습, 가깝지 않았던 아버지의 존재, 먼 이름, 아련한 추억의 소리, 하모니카, 그리고 존재가 있는 곳엔 어디에나 드리우는 그림자. 그리고 고된 세월을 지나 '함께' 길을 걷는 존재, 아버지. 유일하게 살아계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다섯 편의 아버지 이야기이다.
이 키워드를 중심 삼아 나와 아버지는 어떤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내게 가장 가까운 아버지는 <아버지의 등내음>의 아버지와 가깝다. 저자의 아버지가 그녀를 업고 산을 올랐을 때 느꼈던 아버지의 등에서 나는 냄새, 그것은 단순한 냄새가 아니라 안정이었고 행복이었을 것이다. 나이 들어 보면 작디 작은 아버지의 등이 그 때만큼은 넓디 넓은 평야처럼 풍요로웠을테니까. 정확히 그 느낌을 알 것만 같았다. 비록 저자처럼 어린 시절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때 등하교길을 아빠가 함께 해주었다. 그 때 아빠는 공직에서 퇴직을 하고 엄마와 함께 수퍼마켓을 꾸리셨는데, 오토바이로 나의 등하교길을 태워주셨다. 하루에 세번을 왔다 갔다 하는 날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심한 비염으로 고생할 때, 점심 시간에 병원 진료까지 그 오토바이로 나를 싣고 다니는 일을 귀찮다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등내음>을 읽으면서 그 때의 시간들이 떠올라, 다시 아빠의 등내음, 그 너른 아빠의 등, 엄마의 품과는 다른, 단단하면서도 바위 같이 안전했던 아빠의 등을 다시 회상할 수 있었다. 내가 결혼하고 전화드릴 때마다, 또는 친정에 갈 때마다 "내 사랑 선영이"이라고 부르던 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아빠의 등내음은 내게도 깊은 추억이다.
<아버지의 하모니카> 하모니카 하나로 그마나 연결되어 있었던 아버지. 죽어서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던 아버지. 설명할 수 없는 아버지의 부재가 가져다 준 절망적인 상황때문에 원망하고 미워했던 아버지가 마침내 눈 앞에 주검으로 나타났던 순간, 한 쪽 손이 잘려나간 아버지의 주검은 미움과 원망을 객관화하는 시점이 되었을 것이다. 비로서 나의 입장에서가 아닌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을 조명할 수 있었던 시간, 비록 서술된 인물이 완연히 다르긴 하지만 나는 이 짧은 소설을 읽으면서 김중미 작가의 <나의 동두천>이라는 소설이 소환되었다. 살았던 동네의 분위기, 그리고 술집에 나가는 여인의 손에 잡혀서 그나마의 작은 보살핌을 누렸던 소설의 주인공을 엿보면서 동두천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구어진은 아버지의 장례식 앞에서 비로소 아버지를 대신한 소중한 인연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아버지의 부재를 원망하다 잊어버려던 현재의 사람들, 의미없는 인생이라 여겼던 자신의 인생마저도 다시 의미를 찾는 시간이 바로 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그래서 구어진은 아버지의 하모니카를 마침내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먼 이름>의 아버지, 아버지가 먼 이름으로 대변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면서도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이름인 지도 모르겠다. 60년대를 통과한 80년대, 90년대까지도 한국의 아버지들은 자식들에게 그리 가깝지 않았던 것이 일반적이지 않았을까. <먼 이름>이란 시점은 필연코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데, 이런 시선이 아버지와 저자 사이를 매우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그 거리가 주는 인사이트를 충분히 건지고 있다. 그 거리 사이에서 느꼈던 저자의 죄책감과 수치심, 그리고 가족관계, 아버지의 부재 이후에 나타난 가족들의 변화 등을 담담하게 서술해 가면서, 그 사이에서 벌어졌던 저자의 마음을 잘 견져서 독자에게 전달한다. 어쩌면 다섯 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사적인 글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사적인 글이지만 관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역동과 변이를 가장 세밀하게 표현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데 도움을 얻지 않을까 싶다.
"이제야 더 뒤늦게 슬퍼하는 중이다"라는 문장을 읽을 때, 저자의 내면 깊숙히 웅크리고 있었던 문제가 비로소 해결되었다는 안심을 하게 되었다. 대학 때 사별한 아버지를 이제 슬퍼하며 떠나 보낼 수 있어서, 저자가 비로소 마땅히 그랬어야 할 '슬픔의 주인'이 될 수 있어서, 그녀에게 찾아왔을 자유로움 때문에 나도 미소지었다.
<함께 길을 걷다>는 유일하게 살아계신 아버지와 이야기다. 죽음 이후의 화해는 아무래도 아쉬움이 있다. 이 글에도 아버지의 허물이 있고 저자의 허물이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아버지와 회복의 함께함을 걷는 일을 우리 모두가 바랄 것인데, 이 글에는 이런 아버지와의 화해와 더불어 함께 걸어가는 삶이 서술되어 있다. 특히 아버지가 군복무를 하시던 철원으로의 동행. 이 동행은 아버지와 아들, 두 존재에게 매우 큰 의미였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아버지의 고향을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아빠가 늘상 읊조리시던 '황해도 율계면 신평리 74번지', 지금은 행정구역의 이름도 바뀌었을텐데도, 나는 어릴 적부터 아빠에게서 들은 아버지의 고향 주소를 잊지 못하고 있다. 아빠가 돌아가시더라도 통일이 된다면 반드시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보라고 했던 말씀. 언제 통일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갈 수 있기를 고대한다. 그만큼 아버지의 흔적은 자식에게도 매우 중한 것, 아버지의 젊음이 새겨져 있는 곳, 그곳에 대한 상상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에도 일조한다. 철원에서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그냥 아버지가 살아 계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다." 이 고백은 어쩌면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을 벗어난 고백일 수도 있겠다. 다만 인생을 같이 걷는 동반자로서의 아버지. 존재로서의 만남, 저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림자로 울다>, "아버지는 평생 혼자셨다"라는 첫 문장에서부터 가슴이 철커덩 내려 앉았다. 이 한 문장으로 모든 것이 상상이 되었다. 그간 그림자 이야기를 한 두번 들었나. 수많은 간증에서 들었던 것처럼, 가정 폭력, 알코올중독, 도박 등등...이 많은 사연들이 자연스레 내 머리를 셋팅하면서 그 한 문장의 의미가 묵직하게 내려 앉았다. 그러나 저자의 그림자는 그저 부정적 의미의 그림자가 아니다. 할아버지가 한센병인이셨다는 아주 특별한 환경에서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버린(?) 할아버지의 보호자가 되면서부터 아버지의 그림자는 깊게 드리워진다. 그 그림자의 어둠이 너무나 깊고 깊어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데도, 저자는 기어코 어두움의 그림자에서 빛이 만들어준 그림자로 모든 것을 승화시킨다. 물론 그 여정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중학교 1학년 때는 새벽마다 기도하면서 말하지 못할 단어가 하나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다. '아버지'라고 하면 가슴이 아파 기도하지 못했다. 아버지라는 말은 내게 불행이었고 고통이었으며 아픔의 전부였다. 그래서 '하나님, 예수님, 주님'이라고만 했다.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은 너무 낯설고 아팠다. 아니 싫었다"(316p)
이렇게 아픔이 되었던 '아버지'가, 그 아버지의 그림자가 어둠을 벗어나 그늘을 만드는 선선한 그림자가 되기까지 저자의 생에 있었던 모든 고난과 수고와 눈물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타인의 생을 살리는 지금의 사역에 박수를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울하고 불안한 그리스도인들에게 - 청교도 목회자 리처드 백스터가 주는 조언
리처드 백스터.제임스 패커.마이클 런디 지음, 최원일.감안식 옮김, 최관호 감수 / 세움북스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관문은 자신의 죄인됨을 인식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법에 저촉되는 일을 행하지 않았더라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행동으로 옮긴 적이 없더라도 하나님의 의 앞에서 절대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돌이키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행동이 죄라서가 아니라 동기가 악할 때에도 죄인 것을 인정하는 일, 선한 행동 이면에도 자기 중심성의 또아리를 발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견되면서 나라는 존재의 부패성에 대해서 처절하게 느끼는 과정이 있다. 이런 죄책감은 자칫 자기 학대와 비하로 내닫기 쉬운 것이 어쩌면 신앙인들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우울증은 비기독교인보다 기독교인들에게서 더 심하게 발현된다는 얘길 듣곤 했다.

나는 간혹 우울감을 느끼기는 하지만 우울증을 경험한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깊이 공감하지는 못했고 그저 피상적인 느낌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요의 <나는 내가 왜 사는 지 몰랐습니다>라는 책을 읽고서 우울증이 그저 마음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님을 인식하게 되었다. 우울은 단지 증상일 뿐이 아니라 병이라고 칭할 수 있는 생리적 이상 현상에 의한 것임을, 아무리 의지로 우울을 이겨보려고 해도 불가항력적인 것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리가 부러진 사람이 의지가 있을지라도 걷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간 교회 안에서 조언이라고 회자되었던 것들, 예를 들어 마음 먹기에 따른 문제이지 더 기도를 열심히 해라, 믿음의 의지를 더욱 사용해 보아라, 항상 기뻐라하라, 감사하라 하셨으니 이 말씀을 붙잡아 보아라 등의 섣부른 말들이 실제 우울증(또는 병)을 겪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이었을지 비로소 상상할 수 있었다.

청교도 목회자, 리차드 백스터는 도리어 이런 조언을 한다.

"개인적인 기도를 하기가 어려운 곳이라면 굳이 힘들게 기도하지 말라.....능력 밖의 모든 노력은 당신을 방해하고, 의무를 걱정거리로 만들며, 당신의 상황을 악화시켜, 당신을 무력화시킬 뿐이기 때문이다.....배 속이 불편할 때는 건강한 상태로 회복하기 위해 음식을 많이 먹어서는 안되고 잘 소화시켜야 한다. 소화가 잘되지 않을 때는 먹는 양을 줄여야 하듯이 묵상과 개인 기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138P)"

"문맹인 사람은 성경을 읽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고, 감옥에 있거나 병든 사람은 말씀의 선포 없이도, 혹은 성도의 교제가 없이도 구원 받을 수 있다. 같은 이치로 우울증으로 능력이 감퇴한 사람은 공식적이고 긴 시간이 필요한 기도와 홀로 하는 기도가 아닌 간단한 묵상과 짧은 기도를 통해서도 구원 받을 수 있다(139p)"라고,

그간 교회 공동체에서 너무 쉽게 회자되던 조언과는 거리가 있는 그의 지침이다.

이는 단지 기도를 줄여하라는 의식적 규율의 제한ㅇ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리가 부러졌다면, 완쾌될 때까지는 걷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 전체가 고통을 받게 될 테니 말이다. 부러지고 상해를 입은 부분이 바로 당신의 사고 능력 혹은 상상력이다(136p)"

벡스터의 진단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부러지고 상해를 입은 것을 먼저 온전케 하는 것 이전의 종교적 행위는 그다지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일 게다. 또한 이렇게도 지침하고 있다.

"몸이 치료되지 않는 한 마음의 치료는 요원하므로 아무리 명쾌하고 논리 정연한 중고라고 해도 효과는 없을 것이다(161p)"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영혼의 상태가 개인의 선택과 통제를 벗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생리적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것일수록, 죄와 거리가 멀고 위험도도 낮은 상태라는 것이다(179p)"

위와 같은 언급들을 하며 실제로 약물치료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17세기의 청교도 목사가 우울증에 대하여 이렇듯 깊은 이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매우 신기했다.

<영혼의 밤을 지날 때>라는 책을 읽으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앙적 위인들이 얼마나 깊은 우울증으로 시달렸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의 성과나 업적 이면에는 우울이 깊이 내재하고 있었다. 하여 어떤 이는 자살에 이르기도 하였다. 15세기 종교개혁가 루터 또한 우울병을 앓았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삶의 쓸모없음을 탄식하는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죄인 괴수에게 베푸시는 은혜>에서 읽은 존 번연의 글에서도 깊은 우울이 읽히곤 했다. 죄책감에 몸부림치면서 한 오라기의 실낱같은 죄라도 자기 영혼에 붙어있지 않기를 씨름하면서, 때론 마귀의 참소와 치열하게 싸우고 환영과 환청을 들으면서까지 괴롭힘을 당하는 에피소드 들을 읽었다. 그러나 항상 베푸시는 은혜로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는 번연을 그 책에서 자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끊임없는 자기 내부의 진단과 조명으로 자칫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의 빛을 미처 간과하고 우울감에 빠지기 쉬운 존재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성공과 성취를 타인과 비교경쟁하여 재단하는 것을 옳다 하지 않듯이, 죄 또한 타인과의 비교로 더 나쁜 죄, 덜 나쁜 죄롤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 존전 앞에서 그 빛 앞에서 죄인 것이다. 다시 말해 위에서 아래를 보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의 본래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전제가 없다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은 쓸 데 없는 일일 수도 있다. 죄란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며, 본래의 모습에서 떨어진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신체적이든 지적이든 그것이 자기 파괴적이라면 그것은 지나친 죄책감이라 할 수 있다......시민법, 교회법, 가족법 등의 목적이 각 영역을 발전시키고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듯이 개인에 대한 규율은 사람에게 해로움이 아닌 유익을 끼치기 위함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희생 제사보다 자비를 더 원하신다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종교를 핑계 삼아 우리 자신이나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구실로 사용해서는 안된다(170p)"

빛 앞에서의 죄에 대한 통절함은 자기 파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하여 죄임임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었음을 기억하고 재확인하는 일이다. 본래의 모습에서 이탈한 자신의 모습을 인식했을 때, 그곳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려 할 것이다. 이는 자기로부터의 자유이기도 하다.

"그들의 생각은 저의 자기에 관한 것으로 한정된다(121p)"

벡스터의 이 진단은 매우 주효하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을 자꾸 바깥 세계로 이끌어주고, 그들을 홀로 두지 않고 함께 있어주는 것은 매우 필요한 조언임이 분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출산, 프랑스는 어떻게 극복했나 - 삶의 질을 위한 인구정책
이상민.박동열 지음 / 고북이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는 한국 사회의 저출산의 이유와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두번째는 프랑스의 사례를 제시하고, 세번째 파트는 한국사회에 잇댈 수 있는 구체적인 제도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이 내게도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장성한 대학생 아들이 둘씩이나 있기 때문이다. 이 녀석들을 결혼시킬 생각을 하면 눈 앞이 캄캄하다. 주택 문제에서부터 이어 출생하게 될 자손들의 보육과 교육 문제까지, 어떻게 감당을 해야될 지, 앞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저출산 극복 사례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분명한 사실은, 저출산을 극복하는 정책이란 출산,육아정책을 넘어서 주택정책이자 교육정책이고, 복지 정책이자 임금 정책이며, 여성정책이자 청년 정책이라는 것이다(356p)"라는 저자의 문장에 격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

문제 제기와 이에 따른 정책 제시와 해결 방안을 읽으면서, 내게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어떤 정책이든지 그것은 필요를 따라서 도입된다기 보다는 의식의 변화에서부터 실현 가능성이 발현된다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출산율은 가임여성 기준 1명도 미치지 못하는 0.78명이라고 한다. 이런 현상은 체감하기 어렵지 않다. 결혼 적령기 나이가 갈수록 많아지고, 결혼을 하고자 하는 청년들은 많지 않다. 헬조선이라는 워딩이 나타내는 바, 홀몸 건사히기도 힘든 세상에 가족과 자손을 건사하며 산다는 것은 너무나 많은 희생과 고통을 감내해야 함을 영리한 청년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청년 시절만 해도 결혼은 필수라는 인식이 팽배했건만 지금 청년들은 결혼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이견을 갖지 않는다. 연애는 할망정 결혼을 구지 선택하려 하지 않는다. 나 또한 시대의 변화를 따라 내 아이들이 결혼을 선택하지 않겠다면 이를 강요할 의사는 없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가 결단코 개인의 자유의지의 긍정적 사용이라기 보다는 3포, 5포, 심지어 7포 세대니 하는 것처럼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병폐로 인한 인식의 변이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소멸하는 세대가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해볼 수 있겠다. 다음 문장에 주목해 본다.
"결국, 올바른 사회란 배제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탈성장사회'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대안을 들 수 있다(348p)"
이 문장은 지금까지 우리는 성장을 가장 큰 가치로 삼아 왔으며 그 가치를 따라 고도성장을 이루어냈지만 이와 더불어 성장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을 양산해 왔다고 바꿔 말해도 되겠다. 그래서 저자는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발걸음, 즉 탈성장사회로의 진보가 필요하다고 제안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근접거리 경제 구축'과 더불어 생산의 목적을 상품의 가치 증대가 아니라 '사용가치'에 두어야한다,
둘째, 노동을 창조적인 자기실현으로 바꾸고,
셋째, 기업의 '계획적 진부화', 즉 계속적인 소비를 유발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교체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제품을 생산하는 횡포를 없애기 위해 제품의 보증기간 의무를 늘리고 '수리할 권리'를 도입하는 것,
넷째, 소비를 부추기는 광고를 줄이고
다섯째, 식품의 폐기를 방지할 것,
여섯째, '최고임금'정책의 모임(최저임금이 있듯이)으로 소득의 불평등 완화 등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이런 제안들은 의식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실현 가능한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전업주부로서, 여성의 입장에서 출산과 양육을 하고 싶지 않은 이유 중 하나를 들라고 한다면, 출산과 양육을 소모적인 행위로 보는 사회적 시각이 한 몫을 한다 싶다. 여성이 가정에서 전업주부로 살면서 살아가는 일들은 어느 것 하나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다. 고도 성장사회는 무엇보다 경제적 가치, 노동의 경제적 환산을 제일의 가치로 둔다는 것을 의심할 이는 없을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 대부분은 전업주부와 자녀들의 주양육자로 살아가는 일을 그리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을 성장시키는 일이라고 여길 수도 없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만 정체되어 있다는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만약 가사노동와 양육에 시간과 노동의 질에 따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여 실제로 급여를 제공한다면 적어도 직장 여성의 절반은 사회적 역할보다는 가정의 역할을 선택하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물론 정확한 근거는 없다. 다만 이렇게 예상해보는 것은 직장생활을 자아실현의 일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리 흔하지 않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더러 소명의식이 없지는 않겠으나, 경제적 필요가 주효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주위에서 만나본 소시민들의 입장은 이러하다. 그러나 가족을 보살피고 자손을 위한 제일 양육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보람과 소명을 느낄 수 있는 일이다. 이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 조성을 위해 급여를 제공해보자는 것이지 경제적 가치가 제1의 가치라고 생각해서는 아니다. 분명 의식의 전환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한다.

그래서 저자가 설명한 프랑스의 많은 정책 제안들 중에 나의 구미를 가장 당겼던 것은 '가족수당기금'이라는 기관이었다.

"프랑스 가족 정책의 주요 기관인 '가족수당기금'은 지역 주민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기능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관련 육아 정보와 가족 생활 교육, 부모 교육, 가족 생활 전문 잡지를 발간하여 새로운 가족 문화의 창출에도 기여한다. 즉, '가족수당기금'은 경제적 지원과 더불어 사회문화적 지원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256p)"
"프랑스에서 가족수당이 자녀가 부양가족으로 머물러 있는 동안 지급되듯이...............아동수당이나 양육 수당을 중학교나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연장하여, 프랑스처럼 자녀 양육을 아동의 생애주기에 따라 체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또한 가족 내에서 부양하는 자녀 수에 따라 부모의 자녀 양육 부담도 다를 것이므로, 부양 자녀 수를 고려한 급여액의 차등화도 고려해야 한다. 한편 프랑스는 보육에 관한 수당도, 집단보육 또는 개별보육에 대한 부모의 선택권을 존중하여 이에 따라 맞춤형 지원을 하고 있다......한국은 보육수당을 부모에게 직접 주지 않고 어린이집 보육료 지급카드로 보육료를 대신 부담하는 형태이다...프랑스는 자녀를 많이 나을수록 수당 혜택이 늘어나는 구조이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들은 저출산을 극복하고 출산율을 유지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데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258p)"

주부 급여가 아닌 자녀수당혜택만으로도 저출산 극복에 성공이 되었다니, 우리나라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정책임이 분명하다. 프랑스 정책의 특징은 매우 다원화되어 있고 다양한 상황을 아우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랄 수 있겠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나라의 저출산 극복을 위한 발걸음은 결국 새로운 사회로의 진일보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출산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인구에 자주 회자되듯이 이 위기를 새로운 사회, 저자가 말한 탈성장사회에서 탈출해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사회를 위한 발걸음이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고 싶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도 물 위를 걷다 -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세미지 땅끝에서 온 이야기 2
김토성 지음 / 세움북스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희생을 감수하며 시작한 귀하고 좋은 일이라 믿었던 사역이 왜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난관에 닥쳐온 것인지 정말 알 수 없었다(24p)"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생각하고 그 뜻에 순종함으로 나선 길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 이 때가 정말로 미칠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기에 순적한 일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암암리에 하는 지도 모르겠다. 우리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지 않던가?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지 못하는 믿음 없음을 한탄하면서 순종을 선택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원망할망정,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순종의 길에서 곤란을 주시면 어쩌란 말인가?

 

게다가 병을 얻었다. 백혈병. 선교사로 남아공에 찾아갔지만 선교는 고사하고 병을 얻어 급하게 철수해야 했던 저자, 감당할 수 없는 치료비, 가족들의 생계 등이 막막하다. 계속되는 병, 담낭을 제거하는 수술 부작용으로 백혈병 항암치료보다 더 죽을 고비를 넘겼다. 패혈증을 세 차례나 겪었다. 당장 내일 살아있을지 알 수 없는 시간들을 보냈다. 수개 월 동안 입으로 음식섭취를 하지 못했다. 걷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한 세월이 한참이었다. 어느 것 하나 고통을 감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고난이 큰 만큼 저자를 돕는 하나님의 손길은 세심했다. 모두 사람을 통해서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금방망이 같은 기적이 아니라 그간 관계를 맺어왔던 사람들을 통해서 병원과 치료비와 집을 구하는 일까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도움을 받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사람이 바로 기적임을 알려주시는 것만 같았다. 저자는 한 때 같은 교회 셀 식구였던 분에게 신장을 기증했다. 혈연으로 치면 아무런 관계가 없는 셀 식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도 위험할 수 있는 신장 기증을 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설사 본인은 결정했더라도 가족이 이 일을 용납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저자의 아내는 이를 허락했다. 그야말로 저자는 그 병자에게 기적이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기적이 되었던 것처럼 그 누군가도 그에게 기적이 되는 일들을 저자는 병이라는 고난을 통해서 체험했다.

 

형부가 수년 전에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가족이지만 내가 존경하는 목회자였다. 그 때 무너졌던 마음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이미 몸의 다른 기관에 전이가 된 상태였다. 쉽지 않은 상황이었고 생존율은 10도 되지 않았다. 인적이 없는 시간에 날마다 예배당에 가서 기도를 했다. 살려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했다. 쉽지 않은 투병생활을 했다. 어느 날 온갖 링거를 매단 형부와 함께 병원을 거닐었다.

처제, 어제도 혼자 걷고 있는데, 앞에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걸어가는 자매가 보이더라고. 예전 같으면 저리 짧은 스커트를 입은 게 볼 성 사납다고 생각했을 텐데, 아프고 보니 생기롭고 활기차게 걷는 모양새가 그저 보기 좋게만 생각되더라고

형부 말인즉, 아프고 보니 모든 상황이 달리 보인다는 뜻이었고, 당연하다 여겼던 것들이 모두 감사할 것들임을 체험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별다른 기적이 있다. 특별한 기적은 분명 있다. 그러나 저자는 또 하나의 기적을 말하고자 했다. 바로 우리가 당연하다 생각했던 모든 일상이 사실은 기적임을. 우리는 너무 자주 기적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잊어버린다. 나는 간혹 하나님이 짓궂다 싶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내몰아서 벼랑 끝에 매달려 있을 때, ‘하고 나타나실까? 이왕에 도와주실 거, 애타기 전에, 지쳐서 나자빠지기 전에 손을 펴주시면 안되나?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시스템을 이해하고 진정한 삶의 목적과 가치를 발견하며 그분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에 기대에 그분이 제안하는 길로 순응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에 대한 최고의 해결책이자 최선의 선택인 것이다(222p)"

 

세상은 인과관계가 분명하게 해석되는 곳이 아니다. 나는 신앙이 단계별로 업그레이드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해 어떤 상황을 펼치시고 그 안에서 우리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지켜보고 있다가 하나님 맘에 드는 것을 선택하면 보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거나, 성장시키신다는 것은 나에게 그리 설득적이지 못하다. 어떤 패턴을 만들어버릴 때 신앙은 도리어 종교적인 의식이 되어버릴 때가 많은 것 같다. 하나님은 패턴 속에 갇히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법은 패턴으로 정형화 되거나 규칙화 될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저자가 말한 아름다움, ‘즉 원래의 목적과 가치를 가진 것들이 질서 속에서 어우러진 모습의 아름다움(253p)'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손을 잡고 계신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손의 감촉을 저자는 행복이라 하지 않았는지....’행복은 고난의 깊이만큼 느낀다라고 한 것처럼(258p). 혹한의 겨울에 잡아보는 손의 온기가 우리를 얼마나 환기시키는가 말이다. 비로소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따뜻함, 이것이 바로 기적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