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 프랑스는 어떻게 극복했나 - 삶의 질을 위한 인구정책
이상민.박동열 지음 / 고북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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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는 한국 사회의 저출산의 이유와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두번째는 프랑스의 사례를 제시하고, 세번째 파트는 한국사회에 잇댈 수 있는 구체적인 제도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이 내게도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장성한 대학생 아들이 둘씩이나 있기 때문이다. 이 녀석들을 결혼시킬 생각을 하면 눈 앞이 캄캄하다. 주택 문제에서부터 이어 출생하게 될 자손들의 보육과 교육 문제까지, 어떻게 감당을 해야될 지, 앞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저출산 극복 사례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분명한 사실은, 저출산을 극복하는 정책이란 출산,육아정책을 넘어서 주택정책이자 교육정책이고, 복지 정책이자 임금 정책이며, 여성정책이자 청년 정책이라는 것이다(356p)"라는 저자의 문장에 격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

문제 제기와 이에 따른 정책 제시와 해결 방안을 읽으면서, 내게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어떤 정책이든지 그것은 필요를 따라서 도입된다기 보다는 의식의 변화에서부터 실현 가능성이 발현된다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출산율은 가임여성 기준 1명도 미치지 못하는 0.78명이라고 한다. 이런 현상은 체감하기 어렵지 않다. 결혼 적령기 나이가 갈수록 많아지고, 결혼을 하고자 하는 청년들은 많지 않다. 헬조선이라는 워딩이 나타내는 바, 홀몸 건사히기도 힘든 세상에 가족과 자손을 건사하며 산다는 것은 너무나 많은 희생과 고통을 감내해야 함을 영리한 청년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청년 시절만 해도 결혼은 필수라는 인식이 팽배했건만 지금 청년들은 결혼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이견을 갖지 않는다. 연애는 할망정 결혼을 구지 선택하려 하지 않는다. 나 또한 시대의 변화를 따라 내 아이들이 결혼을 선택하지 않겠다면 이를 강요할 의사는 없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가 결단코 개인의 자유의지의 긍정적 사용이라기 보다는 3포, 5포, 심지어 7포 세대니 하는 것처럼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병폐로 인한 인식의 변이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 소멸하는 세대가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해볼 수 있겠다. 다음 문장에 주목해 본다.
"결국, 올바른 사회란 배제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탈성장사회'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대안을 들 수 있다(348p)"
이 문장은 지금까지 우리는 성장을 가장 큰 가치로 삼아 왔으며 그 가치를 따라 고도성장을 이루어냈지만 이와 더불어 성장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을 양산해 왔다고 바꿔 말해도 되겠다. 그래서 저자는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발걸음, 즉 탈성장사회로의 진보가 필요하다고 제안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근접거리 경제 구축'과 더불어 생산의 목적을 상품의 가치 증대가 아니라 '사용가치'에 두어야한다,
둘째, 노동을 창조적인 자기실현으로 바꾸고,
셋째, 기업의 '계획적 진부화', 즉 계속적인 소비를 유발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교체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제품을 생산하는 횡포를 없애기 위해 제품의 보증기간 의무를 늘리고 '수리할 권리'를 도입하는 것,
넷째, 소비를 부추기는 광고를 줄이고
다섯째, 식품의 폐기를 방지할 것,
여섯째, '최고임금'정책의 모임(최저임금이 있듯이)으로 소득의 불평등 완화 등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이런 제안들은 의식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실현 가능한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전업주부로서, 여성의 입장에서 출산과 양육을 하고 싶지 않은 이유 중 하나를 들라고 한다면, 출산과 양육을 소모적인 행위로 보는 사회적 시각이 한 몫을 한다 싶다. 여성이 가정에서 전업주부로 살면서 살아가는 일들은 어느 것 하나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다. 고도 성장사회는 무엇보다 경제적 가치, 노동의 경제적 환산을 제일의 가치로 둔다는 것을 의심할 이는 없을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 대부분은 전업주부와 자녀들의 주양육자로 살아가는 일을 그리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을 성장시키는 일이라고 여길 수도 없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만 정체되어 있다는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만약 가사노동와 양육에 시간과 노동의 질에 따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여 실제로 급여를 제공한다면 적어도 직장 여성의 절반은 사회적 역할보다는 가정의 역할을 선택하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물론 정확한 근거는 없다. 다만 이렇게 예상해보는 것은 직장생활을 자아실현의 일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리 흔하지 않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더러 소명의식이 없지는 않겠으나, 경제적 필요가 주효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주위에서 만나본 소시민들의 입장은 이러하다. 그러나 가족을 보살피고 자손을 위한 제일 양육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보람과 소명을 느낄 수 있는 일이다. 이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 조성을 위해 급여를 제공해보자는 것이지 경제적 가치가 제1의 가치라고 생각해서는 아니다. 분명 의식의 전환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한다.

그래서 저자가 설명한 프랑스의 많은 정책 제안들 중에 나의 구미를 가장 당겼던 것은 '가족수당기금'이라는 기관이었다.

"프랑스 가족 정책의 주요 기관인 '가족수당기금'은 지역 주민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기능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관련 육아 정보와 가족 생활 교육, 부모 교육, 가족 생활 전문 잡지를 발간하여 새로운 가족 문화의 창출에도 기여한다. 즉, '가족수당기금'은 경제적 지원과 더불어 사회문화적 지원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256p)"
"프랑스에서 가족수당이 자녀가 부양가족으로 머물러 있는 동안 지급되듯이...............아동수당이나 양육 수당을 중학교나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연장하여, 프랑스처럼 자녀 양육을 아동의 생애주기에 따라 체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또한 가족 내에서 부양하는 자녀 수에 따라 부모의 자녀 양육 부담도 다를 것이므로, 부양 자녀 수를 고려한 급여액의 차등화도 고려해야 한다. 한편 프랑스는 보육에 관한 수당도, 집단보육 또는 개별보육에 대한 부모의 선택권을 존중하여 이에 따라 맞춤형 지원을 하고 있다......한국은 보육수당을 부모에게 직접 주지 않고 어린이집 보육료 지급카드로 보육료를 대신 부담하는 형태이다...프랑스는 자녀를 많이 나을수록 수당 혜택이 늘어나는 구조이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들은 저출산을 극복하고 출산율을 유지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데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258p)"

주부 급여가 아닌 자녀수당혜택만으로도 저출산 극복에 성공이 되었다니, 우리나라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정책임이 분명하다. 프랑스 정책의 특징은 매우 다원화되어 있고 다양한 상황을 아우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랄 수 있겠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나라의 저출산 극복을 위한 발걸음은 결국 새로운 사회로의 진일보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출산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인구에 자주 회자되듯이 이 위기를 새로운 사회, 저자가 말한 탈성장사회에서 탈출해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사회를 위한 발걸음이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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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물 위를 걷다 -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세미지 땅끝에서 온 이야기 2
김토성 지음 / 세움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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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을 감수하며 시작한 귀하고 좋은 일이라 믿었던 사역이 왜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난관에 닥쳐온 것인지 정말 알 수 없었다(24p)"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생각하고 그 뜻에 순종함으로 나선 길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 이 때가 정말로 미칠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기에 순적한 일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암암리에 하는 지도 모르겠다. 우리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지 않던가?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지 못하는 믿음 없음을 한탄하면서 순종을 선택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원망할망정,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순종의 길에서 곤란을 주시면 어쩌란 말인가?

 

게다가 병을 얻었다. 백혈병. 선교사로 남아공에 찾아갔지만 선교는 고사하고 병을 얻어 급하게 철수해야 했던 저자, 감당할 수 없는 치료비, 가족들의 생계 등이 막막하다. 계속되는 병, 담낭을 제거하는 수술 부작용으로 백혈병 항암치료보다 더 죽을 고비를 넘겼다. 패혈증을 세 차례나 겪었다. 당장 내일 살아있을지 알 수 없는 시간들을 보냈다. 수개 월 동안 입으로 음식섭취를 하지 못했다. 걷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한 세월이 한참이었다. 어느 것 하나 고통을 감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고난이 큰 만큼 저자를 돕는 하나님의 손길은 세심했다. 모두 사람을 통해서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금방망이 같은 기적이 아니라 그간 관계를 맺어왔던 사람들을 통해서 병원과 치료비와 집을 구하는 일까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도움을 받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사람이 바로 기적임을 알려주시는 것만 같았다. 저자는 한 때 같은 교회 셀 식구였던 분에게 신장을 기증했다. 혈연으로 치면 아무런 관계가 없는 셀 식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도 위험할 수 있는 신장 기증을 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설사 본인은 결정했더라도 가족이 이 일을 용납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저자의 아내는 이를 허락했다. 그야말로 저자는 그 병자에게 기적이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기적이 되었던 것처럼 그 누군가도 그에게 기적이 되는 일들을 저자는 병이라는 고난을 통해서 체험했다.

 

형부가 수년 전에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가족이지만 내가 존경하는 목회자였다. 그 때 무너졌던 마음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이미 몸의 다른 기관에 전이가 된 상태였다. 쉽지 않은 상황이었고 생존율은 10도 되지 않았다. 인적이 없는 시간에 날마다 예배당에 가서 기도를 했다. 살려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했다. 쉽지 않은 투병생활을 했다. 어느 날 온갖 링거를 매단 형부와 함께 병원을 거닐었다.

처제, 어제도 혼자 걷고 있는데, 앞에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걸어가는 자매가 보이더라고. 예전 같으면 저리 짧은 스커트를 입은 게 볼 성 사납다고 생각했을 텐데, 아프고 보니 생기롭고 활기차게 걷는 모양새가 그저 보기 좋게만 생각되더라고

형부 말인즉, 아프고 보니 모든 상황이 달리 보인다는 뜻이었고, 당연하다 여겼던 것들이 모두 감사할 것들임을 체험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별다른 기적이 있다. 특별한 기적은 분명 있다. 그러나 저자는 또 하나의 기적을 말하고자 했다. 바로 우리가 당연하다 생각했던 모든 일상이 사실은 기적임을. 우리는 너무 자주 기적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잊어버린다. 나는 간혹 하나님이 짓궂다 싶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내몰아서 벼랑 끝에 매달려 있을 때, ‘하고 나타나실까? 이왕에 도와주실 거, 애타기 전에, 지쳐서 나자빠지기 전에 손을 펴주시면 안되나?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시스템을 이해하고 진정한 삶의 목적과 가치를 발견하며 그분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에 기대에 그분이 제안하는 길로 순응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에 대한 최고의 해결책이자 최선의 선택인 것이다(222p)"

 

세상은 인과관계가 분명하게 해석되는 곳이 아니다. 나는 신앙이 단계별로 업그레이드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해 어떤 상황을 펼치시고 그 안에서 우리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지 지켜보고 있다가 하나님 맘에 드는 것을 선택하면 보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거나, 성장시키신다는 것은 나에게 그리 설득적이지 못하다. 어떤 패턴을 만들어버릴 때 신앙은 도리어 종교적인 의식이 되어버릴 때가 많은 것 같다. 하나님은 패턴 속에 갇히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법은 패턴으로 정형화 되거나 규칙화 될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저자가 말한 아름다움, ‘즉 원래의 목적과 가치를 가진 것들이 질서 속에서 어우러진 모습의 아름다움(253p)'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손을 잡고 계신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손의 감촉을 저자는 행복이라 하지 않았는지....’행복은 고난의 깊이만큼 느낀다라고 한 것처럼(258p). 혹한의 겨울에 잡아보는 손의 온기가 우리를 얼마나 환기시키는가 말이다. 비로소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따뜻함, 이것이 바로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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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400년 - 쉽고 재미있는 신구약 중간사 이야기
강학종 지음 / 세움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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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400>은 왜 필요했을까?

 

이 질문은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의도를 살피고자 함이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밝힌다.

신구약 중간 시대를 거치면서 예수님을 보내실 조건이 제대로 무르익은 것이다”‘(242p)

 

이에 대한 사실로 저자는 세 가지를 제시한다. 남 유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성전 대신 회당이 들어섰고, 회당은 복음을 전하는 주요 장소가 되었다는 것, 주전 250년경에 모세오경을 시작으로 100여 년에 걸쳐서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것, 그래서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팍스 로마나, 곧 평화의 시대를 열면서 복음이 전하는데, 도로가 정비되고 치안이 유지되고 언어가 통일되었다는 실례를 제시한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는 결국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실질적으로 예비하는 시간이었고,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전해지는 일을 위한 예정된 시간으로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복잡하고 지난한 역사를 통해서 그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의 역사를 아는 것이 하나님의 때에 대하여 끄덕여지는 일이었다.

 

 

한편 중간기의 역사를 앎으로 인해, 예수님 당시의 1차 청자, 또는 독자들이 들었던 복음에 대한 생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상상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은 인자라고 말씀하셨을 때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받았을 충격이 가늠이 된다. 마카비 혁명의 주동자랄 수 있는 맛다디아와 그를 따르는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안식일에 쳐들어온 적군에게 일말의 대응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시리아 군대가 부러 유대인의 안식일 율법을 알고 안식일을 골라 공격했을 때, “우리는 모두 깨끗하게 죽겠다. 너희들이 죄 없는 우리를 죽었다는 것을 하늘이 알고 땅이 증언할 것이라라고(117p) 하면서 당시 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안식일과 목숨을 맞바꾼 것이다. 이런 역사를 알고 있는 유대인이라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고, 제자들과 함께 밀밭에서 곡식을 따 먹는 행동들을 호락호락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고 충분히 반 율법적이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 모독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겠다. 예수님께서 이런 그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으셨을 텐데 예수님은 왜 그리고 급진적으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을까?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실 만큼 힐난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크리스천들에게는 악의 근원지라고 할 만큼 비 호감 집단이다. 그렇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사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인해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무리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고, 그 정체성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었던 이들의 신실함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과 가장 멀리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 실감나게 발견하게 되면, 과연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를 통해서, 본질과 진실에 더욱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것을 이 책이 경험하게 해주는 것 같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상상하면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 등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내가 너무나 단순하게 해석해버렸던 문자들에 대하여 다시금 재고할 의지를 갖게 한다. 그러면 수십 번 읽었던 성경의 말씀이라도 마치 새롭게 읽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저자가 예를 들어 설명한 빌립보서, 빌립보 지방에서 일어났던 패권싸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격전을 벌인 빌립보 지방, 이곳에는 승자인 옥타비아누스가 패자인 안토니우스 휘하 장병들을 정착시키고 그들을 로마시민과 똑같이 대우했던 지역이다. 그래서 빌립보서에는 군사 용어가 많이 나온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읽는 빌립보서와 빌립보서가 쓰여질 당시의 독자가 읽을 때의 빌립보서는 상당히 다른 어감과 어조를 들릴 것이 자명할 것 같다. 저자가 빌립보서의 말씀을 들어 자세하게 설명해준 것처럼 말이다. ‘한마음으로 서서’(1:27 일부)에서 서서는 군인들이 다가오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방패를 들고 굳건하게 서 있는 자세를 연상시키는 말(165p)이라고 한다. 굉장히 전투적이고 각성 상태로 지낼 것을 호소하는 언어이다. 지금처럼 편안하고 일정한 안전한 보장된 상태에서 빌립보서의 저 말씀을 읽자면, 전혀 건져낼 수 없는 행간의 의미이겠다.

 

 

하여 저자가 밝혀준 잃어버린 400년의 역사, 말라기와 마가복음(마태복음보다 먼저 기록됨)의 중간기의 역사를 알고 염두해 둔다는 것은 성경을 새롭게 읽는 길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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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여성들이 믿고 있는 거짓말 - 그리고 이들을 자유롭게 할 진리, 개정판 거짓 분별 시리즈 2
낸시 드모스 월게머스.다나 그레쉬 지음, 김설.류성민 옮김 / 세움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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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0대와 20대의 크리스천 여성들이 세상 속에서 살면서 속기 쉬운 거짓말을 조목조목 따지고, 그 거짓으로부터 어떻게 자유할 수 있는지를 지도하는 안내서와 같다.

책의 첫 파트는 "속이는 자", "속는 자", 그리고 "진리"로 나누어져 있다. 이 부분을 앞으로의 거짓말을 낱낱이 밝히기 위한 대전제 같은 부분으로서, "거짓"의 기원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런 거짓에 속는지, 거짓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이런 대전제 아래서 구체적인 거짓의 모습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거짓의 아비는 사탄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대전제가 분명하다는 걸 인정한다면, 거짓의 모습들이 그저 면피용이라느니, 세상에서 살다보면 어쩔 수 없다느니, 또는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것인데 무슨 죄가 되는가,라는 방심하고 방만한 마음을 곧추 세우게 될 것이다. 한편 속는 자가 없다면, 어찌 속이는 자가 활동할 수 있겠는가. 속임을 당하기에 취약한 인간의 모습은 죄로 인하여 진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고, 결국 이런 상태에서 자유할 수 있는 능력은 진리에 기반하고 있음을 이 책은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특히 작금의 10대와 20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다원화된 세상 속에서 거대하게 밀려오는 세상의 가치관과 세계관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막막한 마음이 많을 것 같다. 전통적인 규범의 세계가 무너지고 어떤 면에서는 아노미와 같은 지금의 세대는 방향을 알지 못하는 운전자와 같은 모습일 수 있겠다. 그 어느 때보다도 거짓의 소리에 취약할 수 있겠다. 

     지금 10대와 20대들이 가장 혼란스러워 할 만한, 그래서 거짓의 말에 쉽게 혹할 수밖에 없는 소리는 무엇보다 성性에 관한 지금의 세태일 것이다. 모태솔로가 수치가 되는 세상이 되었고, 혼전에 성경험이 없는 것이 부끄러움이 된 시대에 그리스도인이라고 혼전순결을 고수한다고 한다면 마치 신석기인 취급을 받는 시대이다.  이런 세태는 10대와 20대의 여성들에게 성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가질 수 있게 하며, 이것이 한편으로 가정을 깨뜨리기 위한 거짓의 아비의 술수임을 간과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저자는 가정에서의 관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의 그림자와 같은 것으로서 무엇보다 거룩함이 보존되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여기에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순결은 지켜져야 한다는 당위를 넘어서 성性은 결단코 도구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싶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을 죄라고 명시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여성이 성적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명시하시는, 더욱 높고 분명한 기준을 제시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성들이 남성들과는 다른 측면에서 성적 유혹에 넘어지는 것은 사랑을 확인받고자 하는 거짓의 소리에 응답하기 때문이라고 저자가 말하는 것은, 결국은 이와같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죄의 모습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비단 여성의 문제만은 아닐 건데, 죄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명백한 거짓말이다. 사람은 연약해서 쉽게 죄에 넘어지는 경험을 하다보니, 연약함이 변명이 되기도 하고, 깊은 좌절에 빠지는 경험을 하면서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거짓에 자신도 모르게 넘어가서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지만, 이것 또한 분명히 진리에 반하는 거짓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힘입이 죄를 이길 수 있음을 확언하고 있으며, 이 확언은 부유하는 주장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분명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죄를 향한 욕구보다 의를 위하여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을 성경의 말씀을 들어 확인시켜주고 있다. 나 또한 이런 일련의 경험을 겪어본 신앙 선배로서 너무나 합당하고 동의가 되는 부분이었다.


    미디어에 관한 거짓말은 무엇보다 스마트폰과 함께 생을 시작한 이 세대에게 너무나 필요한 부분인 것 같다. 기술의 발달이 인류에게 분명 유익을 준 부분이 있지만, 해로움이 거세된 유익은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스마트폰이 자기 정체성이기도 한, 그 안에 자신의 모든 정보가 들어있고, 알고리즘으로 인해 나보다 나를 더 잘 분석하고 파악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독성이 심한 것임을 인식하는 10대와 20대는 흔하지 않은 것 같다. 없어서는 안 될 도구가 되어버린 미디어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습관을 들여다 보고 자신의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필수품이 된 이 시국에서 대부분은 부정적 영향보도 긍정적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거짓말일 수 있는 것이다.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들 하지만 미디어만큼은 부정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판단해야 자신의 습관과 태도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을 것 같다. 미디어를 통해 세상의 가치, 윤리, 사고방식이 매일 같이 젊은 여성들의 일상에 흘러들어오는 것(193p)을 내버려 두다가, 큰 피해를 입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조절력을 기르기 위해, 선택한 것의 예고편을 보라, 장단점을 정리하라, 기도하라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미디어를 필터링 할 때 무엇보다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작품(194p)이라는 자기 인식이다. 


     총25개의 거짓말을 정리해 밝히고 그것에 대응하는 말씀을 밝혀줌으로서 젊은 여성들이 진리 안에서 자유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밝혀준 이 책을 젊은 여성들 뿐만 아니라 남성들까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함께 읽으며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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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 연습 (일러스트판) Reborn Classic 1
로렌스 형제 지음, 홍종락 옮김 / 사자와어린양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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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에 이 책을 처음 읽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손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 볼 수 없는 하나님, 감각할 수 없는 하나님과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는 늘상 내 신앙의 화두였다. 간혹 나 자신에게 질문했다. "너는 하나님을 알고 있니?", 모른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선명하게 안다고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치 수건에 가린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하나님을 더욱 갈망하게 했고, 그분의 임재 아래 머물로 싶은 소망은 풍선처럼 부풀었다. 그러나 매일의 일상을 살다보면, 어느새 하나님은 내 마음에서 사라지고, 내 상황과 감정과 처지에 따라 변화무쌍한 나 자신만이 충만했다. 어떻게 하면 나에 의하여 좌지우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임재 아래 있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더랬다. 
 
      6년 전 그 때, 이 책을 읽고, 하나님의 임재 아래 사는 것이 걸출할 영성을 가져서 되는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이후로 로렌스 형제가 조언한대로 일상의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자 노력했다. 아들들과 마찰과 갈등이 있었을 때도, 바로 반응하기 보다 한 템포 늦췄다가, 하나님 앞에 머무르곤 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묻는 기도를 했다. 많은 부분, 지금의 나의 영적 생활은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연습>에 기대고 있다.
 
 
     이번에 새로운 판본으로 나온 책은 디자인에서부터 로렌스 형제의 의중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두 권의 책을 선물 받고, 나는 한 여성이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디자인을 선택했고, 남편은 명화버전을 선택했다. 이 버전의 책은 남편과 함께 인도로 날라갔다. 주부인 나는 주방에서 일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할 때가 많다. 많은 생각을 거친 난 다음 이루어지는 기도는 이 주방에서 이루어질 때가 많다. 
 
"제게 일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다르지 않습니다.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주방에서 여러 사람이 동시에 제게 각기 다른 일들을 요구하며 소리를 높여도, 무릎을 꿇고 복된 성찬을 받을 때처럼 지극히 평온하게 하나님을 소유합니다"(44p)
 
    일상의 예배자라는 화두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생소하지 않다. 그러나 어떻게 이 일을 실현시킬 것인가는 여전히 큰 과제이다. 이런 과제에 대한 가벼운(그러나 결단코 가볍지 않은)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다. 이 책을 통해서 영성이란 어떤 초월적인 세상의 것이 아니라 내 일상과 주변에, 하나님은 내 생각보다 가까이 계시는 분임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연습할 수 있다. 그리고 경험할 수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외부적인 일들을 멈추고 영혼의 은밀한 곳으로 물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그분을 더 기쁘게 만들 예물이 있을까? 게다가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애를 파괴한다.....하나님과 함께할 때면 무심결에 우리의 자기애가 사라진다"(109p)
 
    하나님의 임재 아래 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존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깊이 인식하는 일이지 싶다. 그 사랑 앞에, 그간 자신을 지키려고 포장하고 있었던 자기를 발견하게 되면 이기적인 자기애를 벗을 용기가 생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통과한 자기사랑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시선을 통과한 자기 사랑은 타자 또한 그런 사랑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것 같다. 여기서 자아와 타자가 연결이 되는 것 같다. 로렌스 형제의 얼굴과 행동에서 이런 성화의 빛이 은은하게 빛나지 않았을까. 내게서도 이런 분위기가 흘러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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