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400년 - 쉽고 재미있는 신구약 중간사 이야기
강학종 지음 / 세움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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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400>은 왜 필요했을까?

 

이 질문은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의도를 살피고자 함이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밝힌다.

신구약 중간 시대를 거치면서 예수님을 보내실 조건이 제대로 무르익은 것이다”‘(242p)

 

이에 대한 사실로 저자는 세 가지를 제시한다. 남 유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성전 대신 회당이 들어섰고, 회당은 복음을 전하는 주요 장소가 되었다는 것, 주전 250년경에 모세오경을 시작으로 100여 년에 걸쳐서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것, 그래서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팍스 로마나, 곧 평화의 시대를 열면서 복음이 전하는데, 도로가 정비되고 치안이 유지되고 언어가 통일되었다는 실례를 제시한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는 결국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실질적으로 예비하는 시간이었고,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전해지는 일을 위한 예정된 시간으로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복잡하고 지난한 역사를 통해서 그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의 역사를 아는 것이 하나님의 때에 대하여 끄덕여지는 일이었다.

 

 

한편 중간기의 역사를 앎으로 인해, 예수님 당시의 1차 청자, 또는 독자들이 들었던 복음에 대한 생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상상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은 인자라고 말씀하셨을 때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받았을 충격이 가늠이 된다. 마카비 혁명의 주동자랄 수 있는 맛다디아와 그를 따르는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안식일에 쳐들어온 적군에게 일말의 대응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시리아 군대가 부러 유대인의 안식일 율법을 알고 안식일을 골라 공격했을 때, “우리는 모두 깨끗하게 죽겠다. 너희들이 죄 없는 우리를 죽었다는 것을 하늘이 알고 땅이 증언할 것이라라고(117p) 하면서 당시 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안식일과 목숨을 맞바꾼 것이다. 이런 역사를 알고 있는 유대인이라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고, 제자들과 함께 밀밭에서 곡식을 따 먹는 행동들을 호락호락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고 충분히 반 율법적이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 모독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겠다. 예수님께서 이런 그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으셨을 텐데 예수님은 왜 그리고 급진적으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을까?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실 만큼 힐난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크리스천들에게는 악의 근원지라고 할 만큼 비 호감 집단이다. 그렇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사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인해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무리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고, 그 정체성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었던 이들의 신실함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과 가장 멀리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 실감나게 발견하게 되면, 과연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를 통해서, 본질과 진실에 더욱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것을 이 책이 경험하게 해주는 것 같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상상하면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 등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내가 너무나 단순하게 해석해버렸던 문자들에 대하여 다시금 재고할 의지를 갖게 한다. 그러면 수십 번 읽었던 성경의 말씀이라도 마치 새롭게 읽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저자가 예를 들어 설명한 빌립보서, 빌립보 지방에서 일어났던 패권싸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격전을 벌인 빌립보 지방, 이곳에는 승자인 옥타비아누스가 패자인 안토니우스 휘하 장병들을 정착시키고 그들을 로마시민과 똑같이 대우했던 지역이다. 그래서 빌립보서에는 군사 용어가 많이 나온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읽는 빌립보서와 빌립보서가 쓰여질 당시의 독자가 읽을 때의 빌립보서는 상당히 다른 어감과 어조를 들릴 것이 자명할 것 같다. 저자가 빌립보서의 말씀을 들어 자세하게 설명해준 것처럼 말이다. ‘한마음으로 서서’(1:27 일부)에서 서서는 군인들이 다가오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방패를 들고 굳건하게 서 있는 자세를 연상시키는 말(165p)이라고 한다. 굉장히 전투적이고 각성 상태로 지낼 것을 호소하는 언어이다. 지금처럼 편안하고 일정한 안전한 보장된 상태에서 빌립보서의 저 말씀을 읽자면, 전혀 건져낼 수 없는 행간의 의미이겠다.

 

 

하여 저자가 밝혀준 잃어버린 400년의 역사, 말라기와 마가복음(마태복음보다 먼저 기록됨)의 중간기의 역사를 알고 염두해 둔다는 것은 성경을 새롭게 읽는 길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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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여성들이 믿고 있는 거짓말 - 그리고 이들을 자유롭게 할 진리, 개정판 거짓 분별 시리즈 2
낸시 드모스 월게머스.다나 그레쉬 지음, 김설.류성민 옮김 / 세움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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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0대와 20대의 크리스천 여성들이 세상 속에서 살면서 속기 쉬운 거짓말을 조목조목 따지고, 그 거짓으로부터 어떻게 자유할 수 있는지를 지도하는 안내서와 같다.

책의 첫 파트는 "속이는 자", "속는 자", 그리고 "진리"로 나누어져 있다. 이 부분을 앞으로의 거짓말을 낱낱이 밝히기 위한 대전제 같은 부분으로서, "거짓"의 기원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런 거짓에 속는지, 거짓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이런 대전제 아래서 구체적인 거짓의 모습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거짓의 아비는 사탄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대전제가 분명하다는 걸 인정한다면, 거짓의 모습들이 그저 면피용이라느니, 세상에서 살다보면 어쩔 수 없다느니, 또는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것인데 무슨 죄가 되는가,라는 방심하고 방만한 마음을 곧추 세우게 될 것이다. 한편 속는 자가 없다면, 어찌 속이는 자가 활동할 수 있겠는가. 속임을 당하기에 취약한 인간의 모습은 죄로 인하여 진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고, 결국 이런 상태에서 자유할 수 있는 능력은 진리에 기반하고 있음을 이 책은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특히 작금의 10대와 20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다원화된 세상 속에서 거대하게 밀려오는 세상의 가치관과 세계관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막막한 마음이 많을 것 같다. 전통적인 규범의 세계가 무너지고 어떤 면에서는 아노미와 같은 지금의 세대는 방향을 알지 못하는 운전자와 같은 모습일 수 있겠다. 그 어느 때보다도 거짓의 소리에 취약할 수 있겠다. 

     지금 10대와 20대들이 가장 혼란스러워 할 만한, 그래서 거짓의 말에 쉽게 혹할 수밖에 없는 소리는 무엇보다 성性에 관한 지금의 세태일 것이다. 모태솔로가 수치가 되는 세상이 되었고, 혼전에 성경험이 없는 것이 부끄러움이 된 시대에 그리스도인이라고 혼전순결을 고수한다고 한다면 마치 신석기인 취급을 받는 시대이다.  이런 세태는 10대와 20대의 여성들에게 성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가질 수 있게 하며, 이것이 한편으로 가정을 깨뜨리기 위한 거짓의 아비의 술수임을 간과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저자는 가정에서의 관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의 그림자와 같은 것으로서 무엇보다 거룩함이 보존되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여기에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순결은 지켜져야 한다는 당위를 넘어서 성性은 결단코 도구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싶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을 죄라고 명시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여성이 성적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명시하시는, 더욱 높고 분명한 기준을 제시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성들이 남성들과는 다른 측면에서 성적 유혹에 넘어지는 것은 사랑을 확인받고자 하는 거짓의 소리에 응답하기 때문이라고 저자가 말하는 것은, 결국은 이와같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죄의 모습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비단 여성의 문제만은 아닐 건데, 죄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명백한 거짓말이다. 사람은 연약해서 쉽게 죄에 넘어지는 경험을 하다보니, 연약함이 변명이 되기도 하고, 깊은 좌절에 빠지는 경험을 하면서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거짓에 자신도 모르게 넘어가서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지만, 이것 또한 분명히 진리에 반하는 거짓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힘입이 죄를 이길 수 있음을 확언하고 있으며, 이 확언은 부유하는 주장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분명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죄를 향한 욕구보다 의를 위하여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을 성경의 말씀을 들어 확인시켜주고 있다. 나 또한 이런 일련의 경험을 겪어본 신앙 선배로서 너무나 합당하고 동의가 되는 부분이었다.


    미디어에 관한 거짓말은 무엇보다 스마트폰과 함께 생을 시작한 이 세대에게 너무나 필요한 부분인 것 같다. 기술의 발달이 인류에게 분명 유익을 준 부분이 있지만, 해로움이 거세된 유익은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스마트폰이 자기 정체성이기도 한, 그 안에 자신의 모든 정보가 들어있고, 알고리즘으로 인해 나보다 나를 더 잘 분석하고 파악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독성이 심한 것임을 인식하는 10대와 20대는 흔하지 않은 것 같다. 없어서는 안 될 도구가 되어버린 미디어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습관을 들여다 보고 자신의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필수품이 된 이 시국에서 대부분은 부정적 영향보도 긍정적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거짓말일 수 있는 것이다.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들 하지만 미디어만큼은 부정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판단해야 자신의 습관과 태도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을 것 같다. 미디어를 통해 세상의 가치, 윤리, 사고방식이 매일 같이 젊은 여성들의 일상에 흘러들어오는 것(193p)을 내버려 두다가, 큰 피해를 입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조절력을 기르기 위해, 선택한 것의 예고편을 보라, 장단점을 정리하라, 기도하라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미디어를 필터링 할 때 무엇보다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작품(194p)이라는 자기 인식이다. 


     총25개의 거짓말을 정리해 밝히고 그것에 대응하는 말씀을 밝혀줌으로서 젊은 여성들이 진리 안에서 자유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밝혀준 이 책을 젊은 여성들 뿐만 아니라 남성들까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함께 읽으며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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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 연습 (일러스트판) Reborn Classic 1
로렌스 형제 지음, 홍종락 옮김 / 사자와어린양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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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에 이 책을 처음 읽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손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 볼 수 없는 하나님, 감각할 수 없는 하나님과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는 늘상 내 신앙의 화두였다. 간혹 나 자신에게 질문했다. "너는 하나님을 알고 있니?", 모른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선명하게 안다고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치 수건에 가린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하나님을 더욱 갈망하게 했고, 그분의 임재 아래 머물로 싶은 소망은 풍선처럼 부풀었다. 그러나 매일의 일상을 살다보면, 어느새 하나님은 내 마음에서 사라지고, 내 상황과 감정과 처지에 따라 변화무쌍한 나 자신만이 충만했다. 어떻게 하면 나에 의하여 좌지우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임재 아래 있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더랬다. 
 
      6년 전 그 때, 이 책을 읽고, 하나님의 임재 아래 사는 것이 걸출할 영성을 가져서 되는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이후로 로렌스 형제가 조언한대로 일상의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자 노력했다. 아들들과 마찰과 갈등이 있었을 때도, 바로 반응하기 보다 한 템포 늦췄다가, 하나님 앞에 머무르곤 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묻는 기도를 했다. 많은 부분, 지금의 나의 영적 생활은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연습>에 기대고 있다.
 
 
     이번에 새로운 판본으로 나온 책은 디자인에서부터 로렌스 형제의 의중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두 권의 책을 선물 받고, 나는 한 여성이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디자인을 선택했고, 남편은 명화버전을 선택했다. 이 버전의 책은 남편과 함께 인도로 날라갔다. 주부인 나는 주방에서 일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할 때가 많다. 많은 생각을 거친 난 다음 이루어지는 기도는 이 주방에서 이루어질 때가 많다. 
 
"제게 일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다르지 않습니다.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주방에서 여러 사람이 동시에 제게 각기 다른 일들을 요구하며 소리를 높여도, 무릎을 꿇고 복된 성찬을 받을 때처럼 지극히 평온하게 하나님을 소유합니다"(44p)
 
    일상의 예배자라는 화두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생소하지 않다. 그러나 어떻게 이 일을 실현시킬 것인가는 여전히 큰 과제이다. 이런 과제에 대한 가벼운(그러나 결단코 가볍지 않은)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다. 이 책을 통해서 영성이란 어떤 초월적인 세상의 것이 아니라 내 일상과 주변에, 하나님은 내 생각보다 가까이 계시는 분임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연습할 수 있다. 그리고 경험할 수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외부적인 일들을 멈추고 영혼의 은밀한 곳으로 물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그분을 더 기쁘게 만들 예물이 있을까? 게다가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애를 파괴한다.....하나님과 함께할 때면 무심결에 우리의 자기애가 사라진다"(109p)
 
    하나님의 임재 아래 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존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깊이 인식하는 일이지 싶다. 그 사랑 앞에, 그간 자신을 지키려고 포장하고 있었던 자기를 발견하게 되면 이기적인 자기애를 벗을 용기가 생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통과한 자기사랑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시선을 통과한 자기 사랑은 타자 또한 그런 사랑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것 같다. 여기서 자아와 타자가 연결이 되는 것 같다. 로렌스 형제의 얼굴과 행동에서 이런 성화의 빛이 은은하게 빛나지 않았을까. 내게서도 이런 분위기가 흘러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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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 연습 (일러스트판) Reborn Classic 1
로렌스 형제 지음, 홍종락 옮김 / 사자와어린양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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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에 이 책을 처음 읽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손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 볼 수 없는 하나님, 감각할 수 없는 하나님과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는 늘상 내 신앙의 화두였다. 간혹 나 자신에게 질문했다. "너는 하나님을 알고 있니?", 모른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선명하게 안다고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치 수건에 가린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하나님을 더욱 갈망하게 했고, 그분의 임재 아래 머물로 싶은 소망은 풍선처럼 부풀었다. 그러나 매일의 일상을 살다보면, 어느새 하나님은 내 마음에서 사라지고, 내 상황과 감정과 처지에 따라 변화무쌍한 나 자신만이 충만했다. 어떻게 하면 나에 의하여 좌지우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임재 아래 있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더랬다.

6년 전 그 때, 이 책을 읽고, 하나님의 임재 아래 사는 것이 걸출할 영성을 가져서 되는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이후로 로렌스 형제가 조언한대로 일상의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자 노력했다. 아들들과 마찰과 갈등이 있었을 때도, 바로 반응하기 보다 한 템포 늦췄다가, 하나님 앞에 머무르곤 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묻는 기도를 했다. 많은 부분, 지금의 나의 영적 생활은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연습>에 기대고 있다.


이번에 새로운 판본으로 나온 책은 디자인에서부터 로렌스 형제의 의중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두 권의 책을 선물 받고, 나는 한 여성이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디자인을 선택했고, 남편은 명화버전을 선택했다. 이 버전의 책은 남편과 함께 인도로 날라갔다. 주부인 나는 주방에서 일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할 때가 많다. 많은 생각을 거친 난 다음 이루어지는 기도는 이 주방에서 이루어질 때가 많다.

"제게 일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과 다르지 않습니다.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주방에서 여러 사람이 동시에 제게 각기 다른 일들을 요구하며 소리를 높여도, 무릎을 꿇고 복된 성찬을 받을 때처럼 지극히 평온하게 하나님을 소유합니다"(44p)

일상의 예배자라는 화두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생소하지 않다. 그러나 어떻게 이 일을 실현시킬 것인가는 여전히 큰 과제이다. 이런 과제에 대한 가벼운(그러나 결단코 가볍지 않은)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다. 이 책을 통해서 영성이란 어떤 초월적인 세상의 것이 아니라 내 일상과 주변에, 하나님은 내 생각보다 가까이 계시는 분임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연습할 수 있다. 그리고 경험할 수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외부적인 일들을 멈추고 영혼의 은밀한 곳으로 물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그분을 더 기쁘게 만들 예물이 있을까? 게다가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애를 파괴한다.....하나님과 함께할 때면 무심결에 우리의 자기애가 사라진다"(109p)

하나님의 임재 아래 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존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깊이 인식하는 일이지 싶다. 그 사랑 앞에, 그간 자신을 지키려고 포장하고 있었던 자기를 발견하게 되면 이기적인 자기애를 벗을 용기가 생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통과한 자기사랑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시선을 통과한 자기 사랑은 타자 또한 그런 사랑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것 같다. 여기서 자아와 타자가 연결이 되는 것 같다. 로렌스 형제의 얼굴과 행동에서 이런 성화의 빛이 은은하게 빛나지 않았을까. 내게서도 이런 분위기가 흘러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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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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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의 감옥, <새의 선물, 은희경>을 읽고

프롤로그의 제목,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문장으로 은희경의 소설, <새의 선물>은 시작한다. 소설 속의 열두 살의 아이는 진희다. 때는 1969년, 은희경의 고향이 고창이라고 하던데, 소설 속의 공간적 배경 또한 고창과 비슷한 어느 시골 마을이다. 아마도 작가의 고향 고창이 모티브인 것이 분명하지 싶다. 주인공 진희가 사는 집과 그 근처의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이 소재가 되었는데, 필시 이 소설은 은희경의 자전적 소설일 것이다.

"나의 분방한 남성 편력은 물론 사랑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언제라도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나의 열정은 삶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으며 당장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것들만 지니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해 왔다. 삶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 삶에 성실하다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아이러니도 아니다"(12p)

삽십대 중반이 된 진희의 서술이다. 중重한 것이라고는 없는 삶이기에 어느 곳에나 쉽게 자신을 내동댕이칠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성실함을 입증한다는 말은 아이러니라는 장치를 통해 진실처럼 매우 설득적으로 다가온다. 매우 비틀어진 논리임에도 불구하고, 순간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조국혁신당의 조국대표가 이미 멸문지화를 당하여 더이상 무서울 것이 없는 상태로 정치에 뛰어들었다는 것, 더이상 떨어질 나락에 없기에 혼신을 던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이런 맥락과 통할 것 같은 착각 말이다. 그러나 생애를 던진 성실함에서는 비슷할지 모르겠으나, 냉정과 열정, 냉소와 열화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새의 선물>을 읽으면서 줄곧 나는 나의 청소년시절 친구를 떠올렸다. 나는 늘 그녀를 닥달했고, 나의 닥달에도 그녀는 별 반응이 없었다. 나는 애닳아했고 그녀는 태연했다. 삶을 다 알아버린 애늙은이처럼 구는 친구, 그녀는 자기 삶에 대하여 그닥 흥미를 갖지 못했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고, 어떻게든 그녀를 고쳐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화가 났다. 도대체 그 나이에 인생에 대해 뭘 얼마나 안다고 그리도 삶에 대하여 관조적일까. 한번도 삶에 뛰어들지 않고삶의 주위를 겉도는 그녀의 자세가 못마땅했다. <새의 선물>의 주인공 진희도 그랬다.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내 삶은 삶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거리를 유지하는 긴장으로써 지탱돼왔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거리 밖에서 지켜보기를 원한다(12p)"

진희는 12살의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엄마는 우울증으로 자살을 하고, 아빠로부터는 버려져서(12살 당시에는 그렇게 느끼고도 남았다) 할머니 집에서 살아간다. 이 상처로부터 자신을 떼어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는 삶으로부터 떨어져서 살아간다. 그렇게 자신을 관찰하듯 그녀는 타인의 삶도 거리를 두고 관찰함으로 그들의 삶을 엿본다. 엿보는 눈에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구분되듯, 보여지는 삶과 감춰둔 삶이 달랐다. 이 둘 사이에는 거짓과 위선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본다.

보여지는 것과 감춰진 것 사이의 위선과 거짓은 어디에서 근원하는 것일까. 작가는 이를 세상이 만들어놓은, 한 개인을 고유한 존재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규범과 관습 때문임을 지적하고자 했던 것 같다. 주체적 인간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일이 1969년 그 당시에는 더욱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여자란 모름지기 뒤웅박팔자여야 하고, 순결은 어떤 사연이 있건간에 지켜져야 하는 것이며, 선생이 어떤 인물이든지 간에, 학생은 공손해야 하는, 등등의 규범. 작가는 소설 속, 각각의 인물 모두의 위선과 거짓을 보란듯이 까발린다.

12살, 가장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부터 버림받은 진희는 그렇게 자신과 세상을 이해했고,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의 비루함을 감추었고, 상처를 덮었다. 그러나 대신 진희는 12살의 감옥에 갇혔다. 그 감옥에서 그녀는 자유롭지 못했다. 얼마전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었다. <새의 선물>과 나레이션의 방식이 유사하다. 많은 인간군상들이 출현하고, 그들의 이면에 깃든 거짓과 위선의 더러움의 진술. '죽음의 집'이란 시베리아 유형지를 말한다. 자유를 뺏긴 곳에서의 인간의 삶. 감옥. <죽음의 집의 기록>은 감옥이 실제적인 공간인 반면 <새의 선물>에서의 감옥은 상처가 만들어놓은 심리적 감옥이라 하겠다.

<새의 선물> 첫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주자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버렸네"(자크 프레베르 <새의 선물>전문)
이 문장은 12살, 진희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삶이라는 씨앗을 상처라는 포장지에 싸매서 깊이 깊이 감추고 발아하지 못한 채, 감옥 속에 갇혀버린 인생. 상처란 충분히 이렇듯 한 존재를 감옥에 갇히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진희는 12살의 어린 눈으로 어른들의 위선들을 드러내며 인생을 대단하게 깨달은 것 같지만 기실은 자유를 맛보지 못한 삶이다.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으면서, 자유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필연적 요소라 여겨졌다. 자유가 제한된 감옥에서 인간은 교정되거나 교화되지 않는다. 도리어 자유가 거세된 곳에서 인간은 더욱 몰락하게 되는 것을 소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면서, 자유란 인간의 격格을 유지하도록 신이 인간에게 주신 장치가 아닐까, 싶었다.

"건조한 성격으로 살아왔지만 사실 나는 다혈질인지도 모른다. 집착없이 살아오긴 했지만 사실은 집착으로써 얻지 못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 대문에 짐짓 한 걸음 비껴서 걸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받지 않으려고 주변적인 고통을 견뎌왔으며 사랑하지 않으려고 내게 오는 사랑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정열을 다 바쳤는지도 모를 일이다(431p)"
작가도 알았다. 보여지는 나와 관찰하는 나가 가진 거리가 이런 삶을 만들어왔다는 것을..그래서 후회했는가? 아니다.
"하지만 상관없다(431p)"고 말한다.
왜냐하면 "90년대가 되었어도(<새의 선물>은 1995년에 발표됨) 세상은 내가 열두 살이었던 60년대와 똑같이 흘러간다.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고 수미쌍관으로 처음과 끝은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이 문장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 어쩌면 세상은 거대한 감옥 속에 갇혀 있다는 걸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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