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옷의 어둠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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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가 픽션의 영역에 머물기 위해서는 최소한, 핍진성을 갖추되 현실의 위협, 그러니까, 현실에서 흔해빠지게 보이는 그것을 그대로 가져다 쓰지 않아야 한다.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그렇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가? 있을법한 일, 너무도 익숙한 사건을 토대로 그려내는 편이 쓰는 이와 읽는 이 모두 몰입하기 쉽지 않은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쓰는 사람에게는 현실을 그대로 가져다 따붙이는 셈이 되고, 읽는 사람에게는 조금도 현실 바깥, 뉴스나 신문의 사회면이 아닌 세계를 상상할 수 없게 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창작이 실제 사건, 역사의 일면을 토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

그렇게 말하자면 '거기서부터는 다른 장르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회고발, 르포... 어떤 이름이든. 그것에 괴기 또는 미스터리와 추리가 더해질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 끝낼 수는 없다.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는 힘이 필요하다. 그런 작품에는 필연적으로 명쾌한 결말이 따라붙을 수 없다.

p.12 전쟁 전이나 전쟁 중에 신문과 라디오는 국민의 전의를 대대적으로 선동했다. 물론 그에 편승한 국민에게도 책임이 있겠으나 그 청구서는 전쟁 중과 전쟁 후의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는 형태로 날아왔다. (...) 이에 국민이 격노했느냐 하면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무리도 아니다. 화나 내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살고 봐야 했다. 그래서 암시장이 생겨났다.


대신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은 면모, 대안역사가 주는 위안의 한계. 서글프거나 원통하거나 참담한 뒷맛이 자리를 차지한다. 출판사며 서점의 구분이 어떻든간에, 독자인 내가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를 역사와 사회현실에 기반을 두는 분야로 보는 것도 그런 이유다.

사건의 배경은 태평양전쟁 직후 뒷골목의 암시장, 제도와 터전 모두 폐허가 된 국가의 암시장, 그것도 뒷골목. 말 그대로 어둡고 숨어들어가야만 하는 곳이다. 국민을 지켜야 할 자가 그 자신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내맡기기를 강요당한 이들을 버렸기에.

그러고도 그들 위에 군림하기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 안위를 보전하기 위해 다른 모두를 사람의 자리에서 몰아냈기 때문에.

p.50 두 사람 앞에는 신이치의 어머니가 준비해준 호화로운 요리와 술이 쭉 차려져 있었다. 변함없이 '있는 곳은 다 있는' 모양이다. 참고로 황실이 '있는 곳'의 대표였다. 황궁 벽에는 황족이 먹을 오늘 음식이 나붙었는데 쌀도 고기도 생선도 채소도 풍부했다. 그곳에 '배고픔'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황실은 도쿄도에서 완벽하게 다른 세계였다.

p.108 "그건 그렇고 국가는 말이야, 우리를 아무렇지 않게 배신하고 깨끗이 버리더라." 그녀는 자기들 창부를 가리켜 말했을 텐데 여기 나온 '우리'를 '일본 국민'으로 바꿔도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전쟁 중에 국가는 확실히 국민을 버렸다. 아니, 실은 똑같은 짓을 패전 후에도 공공연히 저질렀다.


오롯이 그들만의 잘못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이 선과 악으로 명확히 나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악한 '이 편'의 압제로 신음하는 선량한 민중에게 새로운 '저 편'의 '구원'이 도래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이지, 얼마나 쉽고 편리하고 순종적일까.

전쟁의 비참함은 일면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 고통이 '응당 받아야 할' 이에게만 몰려들지도 않는다. 그로 인한 죽음이 환한 빛으로 일시에 찾아와 모든 것을 끝내버리는 자비로움이지도 않다. 삶의 구석구석을 파괴하고, 가장 약한 자가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로 밀려 떨어지며, 죽음은 한껏 느린, 그러나 무슨 수를 써도 피할 수 없는 파멸로 다가온다.

다시금 사건의 현장으로 돌아가보자. 패전국의 수도, 도쿄에 '붉은 옷의 괴인'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그는 다른 곳도 아닌 암시장의 한 골목, '붉은 미로'에 나타나 행인을 절망과 공포에 빠트린다고 한다. 그는 무엇을 바라 나타나는 것이며 정체는 무엇인가.

p.351 ...다른 차원의 세계. 북적이는 암시장 구석에 나타난, 정적으로 가득한 어두운 세계. 이승이라기보다 저세상에 가깝다고 여겨질 정도의, 느낌이 드는 좁은 공간. 인간이 아닌 존재가 수없이 방황하고 있는, 결코 인간은 들어가서는 안 되는 장소.


신시대의 평화를 꿈꿨던 전도유망한 청년에서 체제의 기만과 패망을 목도한 자, 재건의 꿈을 안고 가장 천대받는 탄광부에서 등대지기를 전전하며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모색하던 그가 이번에는 암시장에 나타났다. 이전까지의 거처가 일종의 벽지, 오지였던 것과는 사뭇 다른 행보이다.

괴이는 괴이.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비틀린 곳에 왜곡된 현실이 비집고 들어와 덧씌워진 것일 뿐임을 온몸으로 겪고 돌아온 그가 다시금 마주한 초토의 신-수도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가장 무서운 것은 괴이도 신도 아닌, 사람과 그의 마음임을 다시금 확인하지 않았던가.

어느 고전의 제목(~는 ~의 꿈을 꾸는가) 처럼, 모토로이 하야타는 조국 재건의 꿈을 꾸는가, 여전히. 처음 이 시리즈의 소개를 마주했을 때 감상은, 솔직히 말해, '꿈도 크지' 내지는 '무슨 염치로 여전히?'였다. 물론 그 생각은 작가가 그려내는 참상, 죄 없는 국민과 그들의 유죄성을 동시에 다뤄내는 솜씨를 이해하자마자 사라졌지만.

모토로이 하야타의 모험, 기행, 아니... 여정이라고 해야할 그것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머지않아 그가 마주할 전쟁특수와 재부흥의 시기에 또 어떤 절망과 그에서 피어나는 의지를 보일 것인가. 그저 기대할 뿐이다. 참담한 마음으로.

*도서제공: 출판사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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