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잠든 사이에
스테이시 에이브럼스 지음, 권도희 옮김 / 비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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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시작부터 암시되는 죽음과 함께. 망상에 사로잡힌 남자는, 원래도 온화하고 유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썩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보인다.

사사건건 불만에 의심을 달고 사는 데다 성미는 불같고 도무지 존중이라고는 모르는, 그의 정신은 무너져가고 있다. 현실과 상상을 혼동하고, 심장처럼 단단했던 기억은 나날이 흐려지고 있다.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러나 조금만 시각을 달리하면 위기와 불안의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다.

문제는 그가 평생을 연방대법관으로 살아온, 사법체계의 정점에서 수많은 이들과 권력의 향방에 영향을 미쳐온 거물이라는 데에 있다. 신념과 열정만큼 적도 많아졌다. 심지어 그의 죽음과 파멸을 가장 강력하게 소망하는 이는 바로...

그의 몰락은 그 자신만의 불행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누구를 의지할 수 있는가, 누구를 믿어야 할 것인가. 그는 궁지에 몰려 있다. 거대하고 강력한 적의 위협을 피해 아주 중요한 것, 물러서서는 안 되는 것을 단단히 숨겨야 한다. 적으로부터, 그 자신으로부터.


주인공 에이버리의 삶은 순탄치 않다. 마약중독자인 어머니, 가난, 불안한 직장. 그는 뛰어난 지성과 끝없는 지적 호기심을 가졌으나, 현실은 자꾸만 발목을 잡는다. 여자라서, 유색인종이라서, 나이가 아주 어리지 않고 당당한 매력이 있지 않아서...

수없이 깔보고 가장 중요한 성과는 안중에도 없는 사회에서 몇 안 되게 그를 사람으로, 정확히는 "그나마 덜 한심한 부하"로 여겨준 이가 있다. 그 자신도 엄청난 노력과 철저한 자기관리, 정의를 위해서라면 물러서지 않는 심지로 살아온 사람.

청천벽력같은 소식, 그가 죽음에 임박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가슴 아픈 일이나 여전히 일상을 살아갈 수는 있다. 문제는 별다른 접점도, 친밀감도 없었던 사이에, 냅다 법적 후견인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이다. 멀쩡히 살아있는 배우자와 자녀를 두고, 대체 왜?

p.29 "그녀에게 전해... 해답을 구하려면, 동쪽(East)에서 찾아보라고. 강(river)을 봐야 해. 그 사이(in between)에 있는. 광장(the square)으로 가야 해. 라스커. 바우어. 날 용서해(forgive me)."


여기서 이야기는 처음으로 돌아간다. 뭔진 몰라도 위기에 처한 남자, 하워드 윈은 에이버리를 믿고 모든 것을 맡겼다. 졸지에 얼마 남지도 않은 평범한 일상을 홀랑 빼앗기고 그의 수수께끼를 넘겨받은 에이버리에게 말 그대로 삶을 뒤흔드는 압력과 위험이 몰려드는데...!

뒤로 갈수록 상상도 못했던 치밀한 복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아니, 여기까지 내다봤다고? 불세출의 천재란 대체 뭘까,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평범한 사람보다 한 수, 아니, 때때로 상상도 못 할 경우의 수까지 내다보는 이들이 간혹, 아주 드물게 있기는 하다. 비범하다는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인 사고력을 지닌 자들. 그들은 아주 쉽게 오만해진다.

물론 그 오만은 개인적인 냉소나 폭력성으로 향하지만은 않는다. 그보다는 오만의 심부가 타인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데에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나와 타인의 생각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행동과 개별 사건들의 궤적과 접점을 극도로 치밀하게 추적하고 예측할 수 있기 떄문에.

p.206 하워드 윈은 무례하게도 아무 설명도 없이 에이버리를 함정에 빠뜨리고, 그녀의 인생 전체를 위험에 빠뜨렸다. 에이버리의 룸메이트가 집에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었고, 모르는 사람들이 에이버리를 마치 체스판 위의 말처럼 다루게 만들었다. 쓸모없는 힘을 가지고 있고, 움직임에 제약이 있는 불운한 비숍처럼.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대의를 위해 장기말처럼 "배치하고 운용하는" 이들은 일종의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비열하지 않은가. 이 오만의 핵심을 살짝 비껴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뿐이다. 최고의 승부사가 되는 것, 자기 자신마저 하나의 말로, 희생패로 써먹는 것.

이쯤에서 묻게 된다. 제목의 "정의"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누가 악인가. 누가, 정의의 신의 눈을 가리고 그 칼날을 제 손으로 휘두르려 하는가. 이것은 신념의 이야기이다. 취약하고, 절박한 신념.

아무것도 예상하지 말고, 빈 손으로 따라가기를 권한다. 그렇게 우리 사회를 돌아보기를 바란다. 정의의 신이 눈을 가린 사이 우리는, 어디를 헤매고 있는가. 연약한 선은 끝끝내 살아남을 수 있을까.

p.524 "그 사람은 애국자가 아니에요. (...) 당신도 마찬가지고. 당신들은 괴물이야." (...) "숭고한 합동작전이었어. 인간의 목숨은 전쟁에서 피해를 입는 법이야. 실수하지 마. 우리는 전쟁 중이니까. (...) 순진하게 굴지 마. 나라를 위한 일이야. 난 내 조국을 위해 봉사해. 필요에 따라 외국과 국내에 있는 모든 적들로부터 조국을 지켜왔어." (...) "당신이 죽인 사람들은 적이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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