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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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세계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서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하나. 하도 오래, 많이, 자주 봐서 그런가. 내 마음의 박완서 작가는 여전히 현역이다. 어쩐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신간이 나올 것만 같은. 한국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 치고 "박완서"라는 이름 세 글자는 몰라도 그의 작품을 한 번쯤 읽어보지 않은 이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활동 이력이라든지, 글 곳곳에서 그의 세월을 실감할 때마다 깜짝 놀라고곤 한다. 수십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무겁고 시급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놀라우리만치 날카로운 견해, 묵직하게 관록이 붙은 문체 따스함을 잃지 않는 소박한 글감들.

으레 "나이 든 사람"에게 기대하듯 그저 온화하고 진중한 태도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 점 또한 닮고 싶다고 하면 너무 과한 욕심일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살다보면 다 그런거지, 피로에 전 목소리로 말하다가도 남몰래 머리를 맞대고 짓궂게 키득이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오랜 시간 그토록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그의 글에는 일상이 있기 때문이리라. 사람 냄새라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어떤 작품에서든 그리운 기분이 들게 한다. 본 적도, 겪은 적도 없는 언젠가의 시절.

그래서일까. 읽는 내내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도 엄마가 있으면 좋겠다던 엄마, 우리 엄마가 보고싶다던 엄마, 우리 엄마가 해주던 팥죽이 맛있었다고 너무너무 먹고 싶다고 하던 우리 엄마. 엄마 얘기를 하는, 엄마가 엄마가 아니었던 때의 엄마.

엄마도 내가 엄마, 하고 부를 때마다 옛날 생각을 했을까. 메롱이다 이놈아, 혀를 쏙 내밀었을까. 너네 마음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엄마랑도 좀 놀아주라, 할 때마다 문 앞에서 서성였을까.

p.59 내가 한사코 혼자 살고 싶어 하는 걸 보고 외롭지 않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 나는 순순히 외롭다고 대답한다. 그게 묻는 이가 기대하는 대답 같아서이다. 그러나 속으로는 '너는 안 외롭냐? 안 외로우면 바보'라는 맹랑한 대답을 하고 있으니, 이 오기를 어찌할 거나.


둘. 살다보면 내가 싫어 말 그대로 "미치고 팔짝 뛰는" 때가 온다. 비단 아휴, 싫다 정도가 아니라 살면서 봐온 군상들, 저렇게는 되지 않겠다고 다짐해온 것들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나 깨닫는 때가 오기 마련이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고 코웃음을 치던 바로 그 모습과 다르지 않음을, 스스로가 나약한 인간 하나에 불과함을 뼈저리게 깨닫는 시간은 무섭고 또 처참한 것이다. 그것을 마주할 수 있을 때야말로 인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일단 나는 한참 멀었다.

p.80 친구와 약속한 날은 하필 토요일이었다. 토요일 오후의 서울역 혼잡을 무엇에 비길까. 기차도 타기 전에 어질어질 멀미가 났다. 멀미 중 사람 멀미가 제일 고약한 것은 평소 자신에게 있다고 믿었던 인류애니 인도주의니 하는 것이 실은 얼마나 믿을 게 못 된다는 자기혐오 때문일 것이다.

p.248 그래서 나는 이런 내가 싫다. 이런 내가 쏟아 놓은 비비 꼬인 말들과 비겁하게 복면한 말들이 싫다. 그리고 이 긴긴 겨울이 싫다. 개 짖는 소리만이 충만한 이 긴긴 잠 안 오는 음습한 밤은 정말로 싫다.


셋. 언젠가 나도 으레 하는 입바른 소리, 누구도 혼자 살 수 없고 빛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그 말의 무게를 실감하는 때가 올까.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한껏 따뜻하고 다정한,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을 담은 이야기를 읽으며 연신 나는, 나라면 하는 물음을 내려놓지 못한 것은 아직도 갈 길이 먼 탓일까.

옛날이라고 말할 만큼, 잊혀져가는 때를 살아낸 사람. 고향을 잃은 사람, 자식을 잃은 사람,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고 말해줄 사람을 잃은 사람. 그에 비하면 나는 그저 풋내기,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때. 이제야 겨우 모른다고 말할 줄 알게 된 정도.

언젠가 내가 저 나이가 된다면 저렇게 말하게 될까. 무겁고 따뜻하면서도 깊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셋에 하나 더. 나이 들어가는 티를 내는지, 아니면 당초에 생겨먹기를 앞뒤 꽉 틀어막힌 벽창호인 탓인지 혀를 차는 일이 잦아졌다. 나중 가서 생각해보노라면 이래서는 안 되는데, 부끄러워 할 때도 많다.

p.218 사람들은 몇천 년을 두고 늙은이는 젊은이 하는 짓에 "말세로다 말세로다" 한탄을 하는 짓을 반복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직도 말세는 안 왔고 젊은이들에 의해 역사는 발전해 왔지 않은가.


사람이라면 누구도 혼자 살 수 없는데, 저마다 혼자서도 살 수 있을 줄로 안다. 혼자만 잘 살면, 우리끼리만 잘 살면 다인 줄 안다. 나도 그럴 것이다. 아니라고 말만 잘 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떨군다.

사람이 다 그러고 사는 거지, 도망칠 구석을 주지 않는 글에서 도리어 위로를 받았다.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세상 없어도 아닌 건 아닌 거라고, 자신 또한 부끄러웠노라, 스스로를 내걸고 호되게 질책하는 데엔 당할 방도가 없다.

에세이는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창인 동시에 거울이자 시선의 공유이기도 하다. 긴긴 세월만큼 쌓인 웃음과 눈물, 참회와 감사의 기록을 읽으며 오늘도 노작가의 지혜를 배워간다. 잘 늙으리라. 사람답게 늙으리라.

p.130 인간답게 사는 길도 나만 인간답게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 자체가 이미 인간답지 못하다. 이웃이 까닭 없이 인간다움을 침해받는 사회에서 나만은 오래오래 인간다움을 지키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인간 이하의 어리석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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