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마법사
해도연 지음 / 구픽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구픽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후회와 기회, 얼핏 보기에 전혀 관계 없는 두 단어에는 미련이라는 고리가 있다. 기회를 놓친 자는 후회하게 된다. 놓친 기회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나 그저 놓쳤다고 생각될 뿐이더라도, 미련이 남는다. 어떤 미련은 잊을 수 없는 후회가 된다. ‘생을 관통한다’는 건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다양한 장르의 패치워크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읽고 나서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현실은 활극이 아니라서, 어떤 상상은 현실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현실의 비극은, 생이 강제로 끊기고 지워지고 뜯겨나가는 그 모든 일들은 만화처럼, 소설처럼 잠시간의 묘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작품 또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생각한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끌어안는 마음을, 영원이 나뉘는 순간에 자기 자신을 버려서라도 누군가를 지키는 마음을, 너를 지킬 수 있어 좋았다고 말하는 그 마음을.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상상은 현실을 넘어서지만 현실은 상상 그 이상이기 마련이니까.

p.97 “2만 5000명이라고요! 내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는 걸 또다시 보고 싶지 않아요! 전 역사 교과서에 최악의 재난을 방치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싶지 않다고요!”

p.171 전철이 승강장으로 들어오자 세나는 사람들을 비집고 올라탔다. 수만 명의 사상자가 확인된 사고가 있었더라도, 다음 날 아침에 어김없이 출근해야 하는 사람들이 전철 안을 가득 채웠다.


난세의 영웅이 기껍지 않다고 수차례 말해왔다. 그 말은 영웅의 영광 아래 가려지는 수많은 참극이 기껍지 않다는 말이다. 소수의 영웅,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서게끔 하는 난세가 기껍지 않다. 그런 세상 따위 없을수록 좋다.

동시에, 난세가 아니더라도 저마다의 세상에서 누군가는 영웅이다. 그 자신조차도 영웅이다. 영웅은 대의를 위해 세상을 갈아넣는 이가 아니다. 난데없이 끌려든 이가 영웅이다. 정확히는, 차마 그럴 수 없다고 징징대면서도 뛰어드는 이가 영웅이다.

p.113 세나는 뉴스를 보고 싶은 마음을 참아야 했다. 자기가 조금 전까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 전화 한 통이라도 했다면 한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나는 이렇게 묻고 싶은 것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동시에 모든 것을 새로이 얻는 그 때에, 단 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당신 또한 모두를 구하기 위해 애쓸 수 있겠느냐고, 기꺼이 그러겠느냐고,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그 시간에 다시 한 번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이 질문은 어떤 날의 깨달음을 닮았다. 아니, 반복한다. 자 들어보세요. 당신은 철로를 달리는 트롤리를 운전하고 있습니다... 로 시작하는 그 진부하고도 괴로운 질문 말이다. 아무리 봐도 답이 없는 이 질문(과 그 변주들)에는 딱 한 가지 해답이 있다. 어쩌면 탈출구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자기희생, 다른 이와 나란한 선에 자기를 두기. 오직 그것만이 답이 될 수 있다. 나에게 누군가를 해칠 권리가 없는 것처럼, 누군가의 참극을 방관할 권리가 없는 것처럼. 그것이 ‘나를 위해서’라면. 달리는 열차 앞에 놓인 누군가를 차마 두고 볼 수 없다면 내 몸을 던지는 수밖에.


어쩌면, 작가의 상상이, 그가 그려내보이는 ‘만약에’가 언젠가에 보내야만 했던 애도일지도 모른다. 후회란 그런 것이다. 그랬어야 했다고, 내가 했어야만 했다고, 돌아갈 수만 있다면 주저않고 나서겠노라고, 몇 번이고 되뇌이게 하는 수많은 ‘만약’이 후회의 다른 이름이다. 기회와 후회는 그렇게 이어진다.

어떤 깨달음, 도저히 혹은 차마 무엇을 어찌할 수가 없음을, 단 한 번의 기회가 남았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사람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알고도 그럴 수는 없기 때문에, 세상 모두가 모를지언정 나 하나만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내게 영웅은, 볼품없고 나약한, 봉변처럼 내세워진 이다. 울며불며 발을 구르면서도 차마 어찌할 수 없어 돌아서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영웅의 조건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 또한 영웅의 이야기이다. 온 세계를 지켜내는 존재의 이야기이다.

“널 지킬 수 있어 좋았어. 지키게 해줘서 고마워.”

p.221 세나의 인격은 과거를 품으면서도 세나라는 인물을 초월해 완전히 새롭게 구성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윤세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